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시모프 Jan 15. 2024

<괴물> 기둥 뒤에 공간 있어요

사람은 누구나 다양한 면이 있지만, 우리는 사람의 한쪽 면 밖에는 보지 못한다. 과학적으로도 사람은 4차원의 시공간에 살고 있지만, 실제로 사람이 보는 세상은 너무나 평면적이다. 세상은 나라는 1인칭 시점에서 본 2차원 평면일 뿐이다.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밈으로, '기둥 뒤에 공간 있어요', '비둘기 아래 담장 있어요'가 있다. 서로 다른 입체 공간의 색이 비슷하기만 해도 그 사이에 공간이 있는지 언듯 알기 쉽지 않아 일어나는 착시에 대한 밈이다. '기둥 뒤에 공간'이 있다는 걸 알려면 다양한 경험과 보이는 대로 다 믿지 않는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은 초등학교 5학년인 무기노 미나토(쿠로가와 소야)가 점점 이상하게 변해가는 모습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과 주변인물들을 바라본다. 말 그대로, 이 영화는 한 인물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고 그 시점이 달라져가며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느끼게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보면 일본 영화계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1950)>을 떠오르게 된다. 하지만 <라쇼몽>이 세상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해하거나 거짓말하는 인간 모두에게 담긴 이기주의를 다루고 있다면, <괴물>은 보이지 않는 진실을 오해하거나 이해하게 하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여기엔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가진 세상을 향한 서늘한 비판적 시선이 더욱 날카롭게 꽂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괴물은 누구게?

무기노 사오리(안도 사쿠라)는 미나토를 혼자 키우고 있는 싱글맘이다. 그녀는 일찍 죽은 남편을 대신해, 바쁘게 살며 씩씩하게 아이를 키우고 있다. 하지만 아이를 혼자 키운다는 것은 녹록지 않다.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점점 알기 어려워지고, 어떤 학교생활을 하는 지도 알 수 없다. 어느날부터 미나토는 점점 이상한 행동을 한다. 걱정이 되지만 아무렇지도 않으려 애를 쓰는 사오리. 결국 그녀는 미나토의 담임선생인 호리 미치토시(나가야마 에이타)가 폭력을 썼다고 듣게 되고 학교를 찾아간다.


지금까진 평범한 영화 같았지만, 여기서부터 영화는 급격하게 기이한 흐름을 타게 된다. 교사폭력으로 학교에 항의하러 온 걸 아는 선생님들은 무언가 대책회의를 하고 방안을 마련한 모양인데, 그 모양새가 너무도 기이한 나머지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느낌이다. 학부모인 사오리의 말은 전혀 듣지도 않고, 정해진 매뉴얼대로 반응하며 답을 하고, 그녀의 말이나 항의에는 고개나 몸을 살짝 틀며 회피할 뿐이다. 대놓고 무시하고 있지만 자신들은 정상적으로 이 사건에 대해 해결하려 했다는 결과를 남기려는 것인지, 무언가를 숨기는 것인지, 학교는 왜 호리 선생님을 감싸는 것인지, 호리 선생님은 왜 이런 와중에 사탕을 먹거나 웃고 있는 것인지. 관객마저 너무도 답답하고 이상해 공포감을 느낄 정도다. 게다가 호리 선생님은 유흥업소를 다닌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미나토와 친하게 지냈다는 호시카와 요리(히이라기 히나타)와도 만나보지만 무언가 이상하고 찝찝한 느낌이 든다. 괴물은 학교인가? 호리 선생님인가? 요리인가?


그러다 시간을 거슬러, 영화의 시점이 호리 선생님으로 바뀌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유흥업소에 다닌다는 것은 동거하는 애인과 같이 다니는 걸 보고 아이들이 제멋대로 지어낸 이야기처럼 보인다. 사오리의 시선과 달리, 호리 선생님은 지극히 상식적인 행동을 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자기는 폭력교사라는 오해를 받고,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고, 애인도 떠난다. 동네 사람들에게도 따돌림을 받는 사람이 된다. 자신의 삶이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지 호리 선생님은 이해할 수 없다. 그저 자기 자신을 이렇게 몰아간 거짓말을 한 미나토가 밉다. 괴물은 미나토인가? 집요한 사오리인가?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은 학교인가?


영화가 조금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지만, 우리는 타인의 삶을 온전히 알지도 못한 채,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사람을 재단하곤 한다. 이제 이어지는 미나토의 시선에서, 미나토는 '괴물은 누구게'라는 게임을 한다. 그림이 그려진 카드를 자신이 못 보게 자신의 머리에 붙이고, 상대가 설명하는 것으로 그림을 맞추는 게임이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상대방의 시선으로만 알 수 있다. 내가 왜 괴물로 보이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괴물은 누구게?'게임을 하는 느낌을 받는다.



괴물은 없다

미나토와 요리는 과연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반 아이들은 키가 작고 여자애 같고 조금 특이한 행동을 하는 요리를 괴물 취급한다. 미나토는 요리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요리가 반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아이이긴 해도, 나빠보이지 않는다. 알고 보면 사오리가 느끼던 미나토의 조금 이상한 행동들은, 미나토가 요리에게 잘보이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이다. 두 아이의 순수한 우정, 아니 우정을 넘어선 그 무언가. 미나토는 요리의 세계를 받아들이며 고민한다. 미나토가 엄마인 사오리에게 물어본, "돼지의 뇌를 이식한 인간은 돼지일까? 인간일까?"라는 말은 사실 요리의 아빠가 요리를 학대하며 한 말이었다. 미나토는 요리의 존재, 나아가서 요리가 따돌림당하고 학대받는 아이라는 걸 엄마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 좋은 호리 선생님의 핑계를 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모든 것들의 오해의 시작이고 틀어지게 된 이유였다.


호리 선생님과 학교를 괴물로 알고 있었던 사오리. 미나토를 괴물로 알고 있던 호리 선생님. 그러나 모두 괴물이 아니었다. '괴물은 누구게?'를 맞추려고 했지만 다들 괴물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이제 막 2차 성징이 오려는 시기, 5학년. 그 사이에 알게 되는 같은 성별의 친구에 대한 우정을 넘는 마음. 그것에 미나토는 혼동을 느끼고 갈등하고 감추려 한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미나토의 그런 마음을 감싸준 것은 사오리에게 괴물 같아 보이던 교장선생님이었다. 교장선생님이 그런 얼빠진 행동을 하고 있던 것도, 사오리나 호리 선생님에게는 좋지 않았지만 따지고 보면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미나토의 마음을 해소해 주는 단 한 명의 어른이었다. 또한 이야기가 진행되며 초반 건물에 불을 지른 것이 미나토처럼 보였다가 사실은 요리였다는 식으로 흘러가, 요리가 정말 괴물인가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요리의 그런 행동들은 아버지의 학대에 의한 결과물이었다.


각각의 사람들은 잘못을 하고 죄가 있지만,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어쩌면 그것들은 그저 오해이기도 했고, 실제로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게 과연 그들을 탓하기만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게 한다.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며, 기둥 뒤에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된다. 과연 우리가 괴물이라고 부르던 사람들, 괴물이라는 것은 존재할까? 혹 괴물은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괴물은 있다

이렇게 시점이 달라지며 서로 다른 저마다의 이유를 조금씩 드러내는 중에도, 여전히 감독이 용서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잘못을 덮으려는 일본 문화와, 낙인 찍힌 이들에 대한 집단 따돌림, 그리고 아동학대다. 애초에 학교는 왜 폭력교사 때문에 찾아온 학부모를 그렇게 대했을까? 자신들이 지키고 있는 학교라는 시스템이 어떤 잘못 때문에 이슈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최대한 법적으로 막으려 한 조치들이다. 사실 그런 대응과 조치들이 일을 더욱 확산시켰고, 미나토와 사오리, 호리 선생님 간의 오해를 더욱더 크게 만들었다.


일본에는 '臭い物に蓋をする (냄새가 나는 것에 뚜껑을)'이라는 속담이 있다. 일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단 일단 덮어서 그것이 없던 것처럼, 그저 가리고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만 한다는 뜻이다. 이 속담은 일본사람들에게 뿌리 깊게 박힌 문화를 설명해 준다. 한국과의 관계도 그렇지만 그것을 떠나서, 가깝게는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나 코로나19의 대응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자신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더욱 큰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덮어두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문제가 더욱 커졌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괴물 같아 보이는 개개인에게는 애정을 드러내면서, 일본의 이런 문화는 아무런 핑계도 대지 않고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또 하나의 괴물은 바로 집단 따돌림이다. 여자애 같고 조금 특이하다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지는 이지메는 '그런 일은 당연히 있지'정도로 보여준다. 이 아이들이 가장 큰 괴로움도 바로 그런 집단 따돌림, 자신들이 다수이고 따돌려도 되는 정당한 타깃이 정해지면 누구나 놀이하듯 죄책감없이 참여하는 것. 아무도 그것을 들여다보고 해결하려 하지 않는 것. 이것은 비단 학생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은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따돌림이 심하다. 심지어, 되게 이상하지만 죄인이 아니라 피해자에 대한 따돌림도 성행한다. 얼마 전에는 코로나19에 걸린 환자를 따돌림시켜서 문제가 되었었다.


처음엔 요리가 따돌림당하지만, 나중에는 호리 선생님이 따돌림당한다. 아니, 처음부터 호리 선생님은 따돌림을 일삼는 아이들의 먹잇감이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선생님이 여자와 있다는 이유만으로 영상을 찍으며 걸스바에 드나든다는 소문을 퍼트리고, 선생님에게 요리와 미나토에 대한 거짓 정보를 준다. 결국 호리 선생님이 학교에서 잘렸을 때는, '돼지의 뇌'를 문 앞에 두고 그를 조롱한다. 너희 같은 것들은 죽어라라고 노래를 하는 것이다. 이런 집단 따돌림 문화는 그 이유가 무엇이든, 정당할 수 없다. 감독은 따돌림하는 이들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괴물로 남아있어야 한다. 이것은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도 '혐오해도 되는'누군가에게 마음대로 집단 혐오를 쏟아내고 있지는 않은가? '죽어라'라고 노래를 부르며.


또한 요리의 아빠는 요리를 학대하고 있다. 부동산 일을 하며 돈을 많이 벌었음에도 부인도 어디 갔는지 없고, 매일같이 욕조에 가두고 때리는 것 같다. '돼지의 뇌'는 그런 요리를 학대하며 내뱉은 말이다. 사실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 데에도 이유를 찾자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감독은 단순히 세 사람의 시선이 중요해서 요리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뺀 것은 아니다. 교장선생님도 슬쩍 풀어주지 않았던가? 요리가 어떤 행동을 하든, 성정체성이 어떻든, 어떤 특이한 생각을 하든, 그것이 학대로 이어진다면 그것이 곧 괴물이다.





모든 사람들의 오해와 불행이 한 지점으로 뭉쳐, 요리가 말하던 빅 크런치가 가까워지고 있다. 미나토의 이상행동은 요리와 비밀기지에서 놀며 생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그들만의 비밀이었다. 그들이 뛰어노는 터널 저편의 숲에 놓인 기차, 그곳은 그들만의 낙원이다. 하지만 그 기찻길을 따라 달리다가, 결국 폐쇄되어 있어 다리를 건너지 못한다. 그래도 그들은 그 안에서 행복했다. 미나토는 그것이 우정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고, 또 요리가 불을 지른 것이라는 걸 깨닫고 혼란이 오지만 결국 사랑을 찾아간다.



폭풍우가 치는 세상, 미나토와 요리는 빅 크런치를 맞이하기 위해 그들만의 터널 끝 기차에 앉는다. 사오리와 호리 선생님이 그들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어 찾아 나설 때, 그들은 빅 크런치를 맞이한다. 마치 질을 통해 세상에 다시 태어나듯, 터널 밑 작고 축축한 통로를 기어가 새 세상으로 나아간다. 그곳엔 폭풍우가 없고 햇살이 내리쬔다. 그들이 가지 못했던 막혀있던 기찻길 다리도 어느새 열려있다. 미나토와 요리는 새로 태어나 달리기 시작한다.


그곳에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서로를 괴물로 바라보는 일은 없으리라.






*영화와 인문학을 접목한 저의 브런치북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도 재미있습니다. :)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


매거진의 이전글 <플라워 킬링 문> 살인의 일상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