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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Feb 04. 2024

만년필을 샀다

카웨코 릴리풋 에코프라스

구독하고 있는 팟캐스트 매거진에 세계 No.1 만년필 연구가 박종진 만년필연구소 소장님이 나오신다. 어찌나 이야기할 때마다 필기구와 만년필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지, 듣고 있노라면 만년필을 생전 써본 적이 없는 나까지도 이미 한 10개는 써본 느낌이다. 그래서 만년필에 대한 호기심이 좀 생기던 차였다.


생각해 보면 나는 필기구와 아주 가까운 삶을 살았고, 미술학원 강사였을 때도 연필 데생 강사였으며 20살 이후부터 컴퓨터 작업을 했지만 대부분은 펜 타블렛(펜으로 직접 패드나 화면에 대고 그리면 움직이는 펜마우스)을 사용해 왔다. 그래서 올해는 마음에 드는 나만의 만년필을 하나 가져보고 싶어졌다.


그 유명한 파카, 몽블랑 등등 유명하다는 것들이 있었지만, 비싸기도 하고 어쩐지 내 마음에 들 것 같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우리 집에도 만년필이 몇 개 굴러다니긴 했는데, 써보다가 접은 이유는 그 뚱뚱한 몸체 때문이었다. 나는 필기구가 뚱뚱하거나 곡선인 것을 별로 안 좋아했다. 이상하게도 만년필들은 꼭 4색 볼펜 같은 느낌이거나, 행사로 나눠주는 볼펜 같은 몸체의 느낌을 한 것들이 많은데 그 그립감이 싫었던 것이다. 물론, 볼펜이 고급만년필을 흉내 내어서 그렇게 만든 것이겠으나, 나는 애초에 연필 같은 느낌을 좋아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만년필이 가지는 플라스틱 재질 느낌도 별로였다.


내가 정말 좋아하고 많이 쓰던 필기구가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건 바로 샤프 <MIT 3000> 실버였다.


실버를 쓰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지금도 자료가 거의 안 남아있다.

지금은 회사가 망하고 이마이크로가 되어 품질이 저하되었지만, 저 당시 MIT 3000 샤프는 정말 명작이었다. 저중심설계로 필기감의 피로를 덜어주고, 미끄러지지 않는 그립이어서 만화 그리기에도 아주 좋으며 고장도 적었다. 그걸 생각하며 만년필을 고르다 보니 한 가지가 눈에 띄었다. 웬 황동재질의 1자형 만년필이었다.


핫트랙스 제품 설명 이미지


바로 독일의 KAWECO(카웨코) 사에서 나온 <카웨코 릴리풋 에코브라스>라는 만년필이다. 릴리풋 시리즈는 1910년에 나왔던 제품인데 최근 다시 만들어졌다고 한다. 1자형 생김새, 자연스럽게 변색되는 황동 재질, 오랜 역사를 가졌지만 최근에 복각된 역사성, 후기에 있는 사각거리는 필기감 등 모든 게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하다! 10만 원 정도로 구입할 수 있다. 일반 만년필보다 작다는 것을 단점으로 꼽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난 오히려 그건 장점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재질 때문인지 스팀펑크 SF느낌도 들고 말이야. 너무 많이 팔리지 않는 제품이라는 점도 맘에 들었다. 그래서 구입!


만년필 케이스가 금속통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일반적으로 고급 귀금속 같은 케이스에 들어있는데, 그것 자체가 필기구라는 느낌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품설명에는 색이 칠해져 있던데 내건 왜 아무 칠도 안되어있지? 모르겠다.


속에는 보증서와 여분의 카트리지등이 들어있다. 혹시 몰라 여분의 카트리지를 더 구입했다.


뚜껑을 열지 않은 상태에서 모습. 조금 큰 담배 같다고나 할까? 일반적인 볼펜보다도 작았다. 하지만 재질이 황동이어서인지, 무게감은 조금 있는 편이었다.


뚜껑을 돌려 열고 뒤에 돌려 끼우니 길이가 얼추 길어지고 무게중심도 맞아진다. 굴러가지 않도록 하는 클립도 따로 파는 모양인데, 그건 오히려 이 모양을 망칠 것 같아 구입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손이 크지 않은 편이라, 나에겐 적당히 괜찮았다. 이제 카트리지를 끼우고 종이에 써볼 차례.


가장 가는 펜촉인 EF로 구입했는데, 샤프를 생각한 나에겐 적당한 굵기다. 아니 오히려 조금 굵다고 느껴졌다. 잉크-펜 하면 만화그릴 때 썼던 딥펜을 생각하고 쓰기 시작했는데, 만년필과 딥펜은 아주 달랐다. 굵기가 되게 일정하게 나온달까. 딥펜이 붓이라면 만년필은 볼펜에 가까웠다. 필기할 때나, 굵기가 일정한 선으로 그림을 그릴 때는 좋겠다 싶었다. 그리고 사각거리며 써지는 필기감이 나에겐 대만족이었다. 이전에 싸구려 볼펜을 사서 글을 쓸 때, 내가 왜 이리 글이 날아가는지 잘 몰랐는데 필기감 때문이었다.


학창시절 하던 것처럼, 노트 첫머리에 자작 캐릭터를 그려 넣고 마무리했다. 역시 PC 펜타블렛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고 해도, 실제 종이에 쓰는 느낌은 다르다. 더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있어서 뇌가 활성화되는 느낌이다. 앞으로 글쓰기 전에, 조금씩 끄적여본 다음 글을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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