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트> 고통을 덮는 고통

by 카시모프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고통을 안고 산다. 나에겐 나의 고통이 가장 시급한 문제이며, 나보다 멀리 떨어진 문제일수록 외면하게 되기 쉽다.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차이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절대적인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이의 고통까지 내가 떠맡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올리베르 라시 감독의 <시라트>는 가슴까지 둥둥 울려주는 레이브 파티 음악과 목이 메일 정도의 모래 날리는 사막의 영상을 통해, 작은 고통이 어떻게 큰 고통 속에 덮여가는지 영화적으로 보여준다.


레이브 파티는 보통 무허가로 진행되는 게릴라성 밤샘파티를 말한다. 일부러 이교도적인 퍼포먼스나 쇼를 하기도 하며, 제단을 만들거나 숲, 절벽, 큰 바위등 이교도의 신성한 장소에서 파티를 열기도 한다. 또한 약물도 이 파티에 빠질 수 없는 일부분이다. 영화 <시라트>에서는 모로코 사막에서 레이브 파티가 열리는데, 이 레이브 파티 도중 레이저 쇼로 바위에 거대한 제단을 그리며, 그곳에 계단을 만드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 파티에 루이스(세르히 로페스)와 그의 아들 에스테반(브루 누녜스 아르호나)은 가족을 찾기 위해 나타난다. 루이스의 딸이 이 레이브 파티에 간다고 한 정황 때문이다. 자세히 말하진 않았지만 딸은 성인이니 가출이 아니라고 하며, 가족을 떠난 지 한참 된 것 같다.



또 루이스 가족과 우연히 엮이게 되는 레이브 파티를 즐기는 히피들, 비기, 스테프, 조시, 토닌, 제이드는 정말 밤새도록 파티를 즐기고 춤을 춘다. 몸에 타투와 피어싱이 가득하기도 하고, 팔과 다리가 없는 장애인이기도 한 이들이 그 몸을 이끌고 모래바닥에서 밤부터 낮까지 음악에 맞춰 흔드는 모습을 보니, 광기라기보다는 그저 고통을 이겨내려는 처절한 몸부림 같다.


사회에서 아예 일탈해 돈과 명예를 버리고 자유롭게 즐기는 삶을 택한 사람들은 각자의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런 선택을 한 경우들이 많다. 레이브 파티에서 죽어라 춤을 추고 있는 제이드의 친구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중간중간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가족 이야기나 힘들었던 이야기를 지나가듯 말하고, 자신의 장애를 아무렇지도 않게 웃음으로 승화할 정도로 고통을 이겨내 사는 건 바로 그렇게 일탈해서 약을 먹고 춤을 추며 세상을 돌아다니는 삶을 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루이스와 에스테반은, 딸이 혹시나 잘못될까 봐 그 힘든 여정을 감수하고 모로코까지 와서 딸을 찾는다. 이 파티는 묵직하게 울리는 베이스 가득한 음악에 맞춰 다들 몸을 흔들고 있지만, 그것은 각자 개인이 가진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의식이다. 카메라는 스피커 앞에 걸려있는 쇠 지지대를 십자가처럼 보여주며 크게 줌인하고, 이들은 그 스피커 앞에서 스피커를 잡고 춤을 춘다.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곧 군인들이 와서 이들을 통제하며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라 한다. 군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세계 3차 대전이 발발한 것 같은 뉘앙스다. 하지만 파티에 와서 춤을 추던 히피들은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는다. 왜 누구에게도 피해 주지 않고 춤을 추는데 방해하냐며 군인들과 대치한다. 여기 춤추러 온 이들에게 전쟁은 남의 이야기이며 남의 고통이다. 그러기에 주인공을 포함한 이들 중 일부는 군인들의 통제를 따돌리고, 다른 레이브 파티로 향한다.


이들은 사막 도로를 통해 가려고 하지만, 군인들이 다니기 때문에 절벽을 넘어가는 좁은 산길을 선택한다. 이들이 사막을 건너고 절벽을 오르는 그 험한 여정에서 마주하는 시련들을,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루이스의 딸을 찾자는 것에 공감하며 헤쳐나간다. 그 모든 시련과 고통들은 잃어버린 딸에 비길 바가 아니니까.


하지만 영화는 절망스럽게도, 여기에서 더 큰 고통을 그들에게 준다. 절벽에서 모래에 빠진 앞 차를 빼내고 있을 때, 루이스의 차에 타고 있던 에스테반이 갑작스레 차와 함께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제이드와 친구들도 모두 루이스 가족과 친구처럼 지내고 있었는데, 그들의 고통은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딸은 행방불명이지만 아들은 딸을 찾다가 죽어버렸다. 이렇게 더 큰 고통이 덮치자, 루이스는 자책감과 고통 속에 무너지게 된다.


루이스는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제이드와 친구들이 도움을 청한 사이 혼자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 속으로 걸어간다. 딸을 찾겠다는 생각, 하나의 고통을 해결하려다 더 큰 고통이 덮쳤다. 이젠 딸을 찾을 이유조차 없어졌다. 루이스는 그저 그 사막 속에 자신도 묻히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제이드와 친구들은 루이스를 사막 속에서 찾아냈고, 그의 마음을 돕기 위해 작은 아무도 없는 사막에서 약물과 파티를 준비한다. 모두 약에 취해 춤을 추기 시작하고, 루이스도 슬슬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던 제이드는 갑작스레 폭발해 죽고 만다. 이게 무슨 일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제이드의 시신으로 울며 다가가던 토닌 역시 갑작스레 폭발해 죽고 만다. 알고 보니 이곳은 온통 지뢰가 매설된 지뢰밭이었다. 루이스의 딸이 행방불명이거나, 에스테반이 사고로 죽은 일은 지금 이들에겐 모두 당면한 이 끔찍한 현실 앞에 작은 고통이 되어버린다. 이들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가장 고통 속에 있던 루이스다. 더 큰 고통이 닥치자, 마음속에서 작은 고통들을 밀어내고 다 같이 겪는 이 고통을 이기기 위해 집중한다.


이 영화에서 전쟁에 대한 언급이나 지뢰 장면이 뜬금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렇지가 않다. 모로코는 내전으로 인해 80년대에 사막에 거대한 군사 장벽이 생겼으며, 한국의 휴전선과 마찬가지로 그 주변 사막에 거대한, 세계에서 가장 긴 지뢰지대가 생겼다. 그곳에 사는 모로코인들은 전쟁이 자신들에게 직면한 고통이며, 지뢰로 인한 가족들의 죽음은 바로 자기 자신들의 일이다. 그들은 그런 거대한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지중해 건너에 있는 유럽인들이, 3차 대전을 외면하고 자신들 안의 고통을 해소하고자 바로 그 거대한 고통이 잠들어 있는 사막에서 환각 파티를 벌이고 있던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의 고통을 해소하려 한 업보는 곧 더 큰 고통으로 닥쳐왔고, 더욱 큰 고통이 바로 자신의 일이 되어서야 잔인하게도 삶에 집중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살아남은 루이스와 스테프, 조쉬는 모로코인들과 같은 열차를 타고 그들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녹아들어 가게 된다. 물론 각자 개인이 가진 고통의 크기를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에게 끼치는 거대한 사회적 고통은 존재하며, 그것을 외면한 대가는 처절하다. 웅장하게 울리던 레이브 음악의 베이스는, 지뢰의 폭음이 된다.


이 영화에서는 가느다란 천국과 지옥을 잇는 길, 시라트에 대한 비유적인 영상이 중간중간 인서트로 등장한다. 그것은 레이저 쇼이기도 하고, 사막을 가르는 도로이기도 하며, 절벽에 겨우 만들어진 좁은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내내 기울어져있고 비틀어져 있다. 그 길이 기울어지고 비틀어져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나에게로, 내 고통에게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내 주변에서 같이 고통받고 있는 거대한 사회적 고통을 마주하고 그것을 실감하게 된다면, 비로소 모로코열차에 탄 주인공들처럼 똑바로 올라가는 열차 길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 영화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해보는 글들인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시리즈도 재미있습니다 :)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2


* 2024년 개봉영화 리뷰를 모아놓은 브런치북입니다 :)

https://brunch.co.kr/brunchbook/casimovcin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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