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파 결승을 일주일 앞두고
우리 아들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입니다.
'박지성의 맨유 시절을 경험한 세대도 아닌데 왜 맨유일까?', '아들이 축구를 많이 좋아하게 된 시절부터 맨유라는 팀이 멋진 축구를 구사하거나 성적이 좋은 강팀이었던 적이 없는데 도대체 왜 맨유일까?'
(맨유 팬분들께는 죄송 ^^;)
언젠가 아들에게 맨유가 왜 좋은지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그냥."일 뿐이였습니다.
저야 박지성의 맨유 시절을 함께한 세대로서 밤늦게까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니 박지성을 응원했었으니 한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팬이었지만, 지금은 토트넘에 손흥민이 있지 않습니까?! 하여 실제 토트넘 팬만큼이야 아니겠지만 요즘에는 당연히 손흥민, 토트넘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상황으로 인해 저희 집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유로파 4강전을 앞두고 반대편 사다리 꼭대기에 위치해 있던 토트넘과 맨유가 각각 보되와 빌바오를 상대로 모두 이긴다면, 두 팀이 나란히 결승에 올라 마지막 전장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죠.
저는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들, 손이 무관인데 결승 가면 쏘니가 우승할 수 있도록 응원할 거지?"
"아니, 난 맨유가 결승 가면 맨유 응원할 건데."
응!?!?
"아니 손흥민 선수가 그동안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선수 생활 중에 우승컵 한번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
"난 원래 맨유 좋아해."
"손흥민이 결승 가도?"
"응."
그 순간 저희 부자 사이에 흐르던 공기가 묘하게 변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우려했던 그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토트넘과 맨유가 4강전에서 모두 승리하여 두 팀의 맞대결이 성사된 것입니다.
그것도 유럽 클럽 대항전 결승에서!!
저는 다시 한번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진짜 맨유 응원할 거?"
아들은 변함이 없습니다.
"당연하지~"
성인 무대에서 아직 우승 트로피가 없는 손흥민.
그동안 EPL 득점왕도 하고 챔피언스 리그 결승도 갔었고 리그 준우승도 해봤지만 아직 우승 타이틀만은 달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동안 손흥민이 보여줬던 노력과 헌신들을 생각하면 분명 아쉬운 대목이네요. 부디 이번 결승전에서는 꼭 우승이라는 타이틀을 따내길...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승리라는 결과보다 그 순간에 최선을 다했는지, 경기에 얼마나 집중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그건 보통의 경기들에서나 통하는 말이지 않을까요? 일 년 동안 수많은 경기를 거치면서 올라온 결승전, 우승을 눈앞에 둔 최후의 한 경기라면 좀 다르지 않을까요?
결승전에서는 단순히 승리와 패배로 결과가 나뉘는 것이 아니라 우승 타이틀을 거머쥐느냐 빈손이 되느냐, 일생의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느냐 마느냐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경기이니 말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결과가 중요한 순간, 그런 순간은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지난 카타르 월드컵의 메시처럼 부디 우리나라의 위대한 축구선수 손흥민이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장면을 만나 볼 수 있기를. 그동안의 노력과 헌신들이 한 번쯤은 우승이라는 결과로 보상받을 수 있기를...
물론 세상에는 노력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끝내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언해피엔딩'이 부지기수 입니다. 제 삶 또한 그러하고요...하지만 현실이 그러하기에 내가 아닌 누군가는, 열심히 애썻던 누군가는 '해피엔딩'을 맞이했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것 아닐까요?
그것이 비록 욕심일지라도.
근데 이런 내 마음도 몰라주고 맨유를 응원하겠다니... 내일은 경기 소식이 뉴스에서 나온다면, 맨유 선수들이 지나가는 화면에라도 잡힌다면 아드님 앞에서 금기어인 '맹구'라는 단어로 한 번쯤 놀려야겠습니다. 아들 눈에서 쏟아지는 살기가 좀 걱정되기는 하지만.
(※맹구 : 맨유가 못해서 순위가 9위까지 떨어졌을 때 붙은 별명. 올해는 16위 ㅜㅜ)
그리고 어차피 아들 녀석은 맨유가 이긴다면 제 앞에서 엉덩이를 흔들며 저를 놀려 될 테니까요...
From. 22일 새벽을 기다리며...
토트넘이 이기면 손흥민의 우승이 기쁠 것이고 맨유가 이기면 아들이 매우 기뻐할 것이므로 손해 볼 것 없는 아저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