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끝나고 난 뒤 혼자서 책상에 앉아
1987년, 나는 막 국민학교에 입학해 외숙모가 사준 초록색 둘리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12월, 조용하고 말 잘 듣는 아이였던 나는 무난하게 일 년의 학교 생활을 마친 후 첫 번째 겨울방학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저녁 시간, 언제나 5시가 넘으면 만화를 틀고는 두 살 어린 동생과 니가 좋아하는 만화를 보니, 내가 좋아하는 만화를 보니 투닥거리며 싸웠다. 사실 싸움이라기보단, 오빠였던 내가 늘 내 취향대로 골라 보자니 동생이 심통을 부린 것이다. 아마도 난 나 하루, 너 하루 이렇게 정하자고 말해서 동생을 달랬던 것 같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나와 동생이 방에서 만화를 보는 동안 어머니는 항상 우리와 함께하지 않았었다. 아마도 마루에서 신을 신고 가야 하는 부엌 한 켠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계셨겠지? 오후부터 내내 무얼 해먹을지 반찬 걱정을 하곤 했으니까...
그러다가 7시쯤 모든 만화가 끝나고 짧은 뉴스를 시작할 때쯤에는 아버지가 퇴근하여 초인종을 눌렀다. 나와 동생 그리고 부엌에 있던 어머니는 모두 나가 아버지를 맞이했다. 아버지는 가끔 보름달, 크림빵, 옥수수빵 같은 간식거리를 나에게 전해주곤 했었다. 그걸 받으면 동생과 나는 누가 어떤 빵을 먹을지를 두고 또다시 투닥거렸다. 동생은 꼭 내가 먹겠다고 하는 빵만 탐 냈던 것도 같다.
(조금 큰 후 나는 아버지가 가져다주는 빵을 더 이상 반가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많이 크고 난 후 그 빵이 회사에서 아버지에게 나온 간식이었을 것이고 아버지는 그걸 먹지 않고 주머니에 보관해 두었다가 우리에게 가져다주었겠구나라고 깨달았다. 지금 내가 아이들에게 그러하듯이... 그때, 조금 더 신나 하면서 빵을 받고, 더 맛있게 먹었으면 좋았을 걸... 아버지는 그걸로 충분히 행복했을 텐데.)
당시 내가 기억하는 것 중 또 하나는 그보다 어렸을 적, 나무 상자에 미닫이 문이 달린 텔레비전에서 대학생들이 화염병을 던지며 시위를 하고 경찰인지 군인인지 모를 사람들이 장갑차를 타고 그걸 진압하던 모습을 보여주던 뉴스다. 언젠가는 집 근처 전철역에서 큰 시위가 있었는데, 나는 그날 방 안에서 문과 창을 모두 꼭 닫고 있음에도 눈이 따가운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른들은 그걸 최루탄 때문이라고 했고, 집 밖으로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돌아와서 87년 12월의 저녁 시간, 아버지의 퇴근이 꽤나 늦은 날이 있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일을 마치고는 곧바로 집을 향하는 사람이었기에 흔치 않은 일이었다. 어머니는 귀가가 늦는 아버지 걱정에 안절부절못하셨고, 나도 약간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아랫목에 앉아 동생과 TV를 보고 있었다.
9시쯤? 드디어 대문 앞에 있는 초인종이 눌렸을 때 나는 새소리가 울려 퍼졌고, 아버지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보다 2시간 정도 늦으신 아버지는 퇴근길에 천 원짜리, 오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주었다며 웃던 기억이 난다. 여느 때처럼 오래된 자전거를 끌고, 기름때가 잔뜩 묻은 작업복을 입은 채였다.
아버지는 빠르게 씻고, 늦은 저녁을 드셨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평소보다 많이 늦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어렴풋이 기억나는 아버지의 말은 이랬다.
퇴근하는 길에 노태우 유세차가 철공소가 있던 만석부두 근처에 왔고, 유세를 하며 돈을 막 뿌려 됐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늘에 휘날리는 지폐를 잡기 위해 양손을 높이 들며 연신 점프를 했고, 바닥에 뒹구는 지폐를 줍기 위해 혈안이 되어 무릎을 꿇은 채 기어 다녔다고도 했다. 아버지도 그 난리통에서 지폐 몇 장을 줍긴 했으나, 만 원짜리를 건지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던 것도 같다. 당시 아버지의 월급이 20만 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하니 만 원짜리 한 장이면 그의 하루 일당보다도 큰돈이다. 나중에 친척과 통화하며 농담인 듯 '돈을 받았으니 노태우를 뽑아야 하나.'라고 했던 것도 같다. 당시 대선에서 실제로 누굴 뽑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몹시 고단하고 가난한 삶에 도움이 하나도 되지 않는 그럴싸한 정치인보다 일원 한 푼이라도 나에게 직접 도움을 준 사람이 나아 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금권선거. 네이버에서는 그 당시 민정당의 금권선거가 극에 달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분명 '나에게 실제로 도움을 준 사람으로 뽑자'라는 마음, '돈을 받고 고마워서' 찍어준 마음도 상당히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당시 정치 상황이나 팩트를 조사해 본 것은 아니지만 분명 그들은 '뿌린 만큼 거두리라.'라는 믿음으로 선거에 돈을 막 뿌려 되지 않았을까? 기존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정권을 잃는 것이 두렵기도 했을 테고...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래 자료처럼 당시에는 부정부패가 만연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는 대통령이 된 후 뿌린 것보다 많은 돈을 거두어드리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번 대선에선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었다.
내게 이재명이란 이름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기본소득’과 ‘지역화폐’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경기도에 터전을 잡은 나는 이재명 현-대통령이 도지사이던 시절에 지역 화폐를 받아서 사용하기도 했었고, 할인 등의 혜택을 받아보기도 했었다. 당시 난 왜 언론이나 타당, 일부 자당 사람들이 그 정책을 반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역 화폐로 뿌리면 저축으로 은행에 다시 들어가는 것도 막을 수 있고, 분명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의 매장에서 소비가 될 텐데 말이다.
가령 나를 비롯한 근처 이웃 50명이 지역 화폐로 동네 돼지국밥집에서 국밥을 사 먹는다 치면, 국밥집 사장님은 국밥 50 그릇을 팔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국밥 50그릇을 팔기 위해선 그만큼의 돼지고기와 각종 야채와 재료들을 도매상에서 사야 할 것이고, 또 도매상에서는 그런 식재료들을 준비하기 위해 생산자에게 구매해야 할 것이고, 생산자들은 그걸 생산하기 위해 또 다른 종류의 소비를 할 것이고.... 이런 게 반복되면 혜택을 보는 사람이 엄청 많아지는 거 아닌가? 그것이 큰돈은 아닐지라도 모든 것이 연결된 현대의 사회 시스템에서 작은 것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걸 텐데.
반대하는 이유 중 왜 세금을 그런 곳에 쓰느냐, 회사들 경영 활동에 혜택을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인 방향이지 않느냐?라는 글을 봤었다. 아마도 회사의 세금을 깎아 주거나 어떤 혜택을 줘서 회사와 산업을 키우는 것이 더 효율적인 발전 방향이 아닌가 하는 주장 같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회사가 경영 활동을 해서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그걸 소비해야 할 국민들이 지금 당장 돈을 벌지 못해 가난한 상태면 무슨 소용일까?? 회사와 산업이 발전해도 그걸 소비해 줄 건강한 국민이 없으면 무쓸모한 일 아닌가?? 지역 화폐던 기본 소득이던 조금씩이라도 전체 국민이 숨통이 트여야 회사가 경영 활동을 통해 생산한 부가 가치 높은 제품들을 살 것이고 결국 회사도 이익을 남기는 거 아닌가??
난 경제 전문가가 아니라서 이 정도 밖에는 모르겠다. 물론 빛을 내가면서까지 기본 소득을 챙겨주고 지역 화폐를 발행하는 건 문제가 될 것도 같지만, 세금을 아껴서 남는 돈으로 진행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없는 거 아닌가? (전문가는 아니기에 더 이상 깊이 들여다보진 못하지만, 적어도 내가 살아본 경험으로는 그렇다.)
생각해 보면, 앞에 언급한 두 시절은 전혀 다른 듯하면서도 묘하게 닮아 있다.
노태우도 당시에 국민들에게 돈을 뿌렸고, 이재명도 지역화폐로 도민들에게 돈을 뿌렸다. (노태우가 당시 뿌린 돈을 사비라고 하지는 말자. 회사에게 받은 돈이건, 개인에게 받은 돈이건 국가의 돈이었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도 그 돈을 받았었고, 나도 그 돈을 받았다. 아버지도 그 돈을 우리 가족이 생활하는데 유용하게 사용했고, 나도 그 돈을 아이들과 맛있는 걸 사 먹는데 잘 사용했다.
그럼... 노태우가 뿌린 돈과 이재명이 나눴던 돈, 그 둘은 정말 다르지 않은 걸까?
아버지도 그 돈을 생활에 보탰고, 나도 아이들과 맛있는 걸 사 먹는 데 사용했다. 우리의 행동은 같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돈도 같은 의미였던 걸까?
결국은 같은 행동일지라도 사람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로 이야기들을 연결해서 끝맺고 싶었으나.... 능력도 부족하고, 여기까지 적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여기서 줄여야겠다. 이 이야기를 적어두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충분히 의미가 있으니.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재명 대통령은 자기 주머니가 아닌 국민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대통령이 되어 더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어 주길.
저의 첫 책 : Coffee & 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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