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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리뷰

by 박경민


24년 10월 10일.

아침에 깨면 항상 그러하듯 리모컨을 찾아 전원 버튼을 누른다.

곧 티브이가 켜지는 전자음이 들리고 한 3초쯤 지나 적막을 깨며 뉴스 아나운서의 음성이 집안에 퍼져나간다.

난 아직 자리에 누운 채로 눈을 감고 그 음성을 듣는다.

내 귀로 들어오는 아나운서의 음성이 평소의 차분함과는 다른 약간의 흥분이 섞인 힘 있는 목소리다.

난 눈을 뜨고 몸을 한번 쭉 뻗어 기지개를 켠 다음, 몸을 일으켜 티브이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화면에서 '한강', '노벨 문학상'이라는 단어를 캐치해 낼 수 있었다.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건가?!'

후보에 올랐다거나 수상이 유력하다는 기사를 본 적이 없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나오다니...

예전에 우리나라 문학도 충분히 훌륭하지만, 언어의 한계로 불리한 점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럼 한강 작가의 문학은 그런 한계를 뛰어넘은 건가?'


나는 마침 어제 오후에 배송 문자를 하나 받았었다.

얼마 전에 주문한 채식주의자 책이 오늘 중 배송된다는 내용이었다.

'음, 오늘 퇴근하면 바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책을 읽을 수 있겠군.'

이번 달에는 어떤 책을 살까 고민하다가 예전 부커상 관련 뉴스가 떠올라 검색해 보고 구매를 결정한 책이었는데, 타이밍이 절묘하다.




그렇게 채식주의자를 읽은 지 반년이 더 지났다.

읽으면서 '문장이 확실히 다르구나.'라는 느낌은 어렴풋이 들었다. 하지만 너무 재미있다거나 감동적이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논란을 일으킬만한 충격적인 소재도 있었고... 이런 걸 예술이라 하는 건가??

언젠가 한번 다시 읽어야지라는 마음을 품긴 했었는데 아직 다시 읽지는 못했다.


그리고 오늘, 책을 다시 읽기 전에 반년 전 읽으며 마음에 걸렸던 내용들에 대해 먼저 정리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읽으면 분명 또 다른 감정과 생각으로 변할 것 같았기 때문에...




먼저 남편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제목처럼 아내가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했다는 이야기. 제목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한 아내의 상황이나 육식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이 펼쳐지려나 지레짐작을 했다.

하지만 이야기의 방향은 그런 쪽이 아니었다. 아내의 채식에 대한 남편의 불만 그리고 가족과의 갈등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갔다.

가족과의 갈등은 폭력적인 아버지로 인해 결국 폭발했다. 채식을 위해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를 가족 모두가 한 마음으로 걱정하다가 답답했던 아버지가 강제로 딸의 입을 벌려 탕수육을 먹게 만들려고 했다. 그 결과 그날 더 큰 사건이 터지며 마무리가 되었다. 그런데 내가 느끼기에 '채식주의자' 입장에서 더 소름 끼치게 싫었던 상황은 아버지의 폭력이 아니었다. 그 이후 병원에 있는 '채식주의자'에게 걱정과 사랑의 마음으로 몰래 흑염소를 먹게 만드는 어머니가 더 폭력적으로 다가왔다.

'왜 그렇게까지 싫다는 사람에게 엄마로서의 걱정과 사랑이라는 무기를 써가면서까지 육식을 시키려고 했을까?'

내가 남자라서 그런지 서로 의견이 다르고 갈등이 생겼을 때 물리적인 폭력은 크게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심했네.', '그래도 때리면 안 되지.', '우리나라 아버지들은 너무 가부장적이야.' 정도로 다가왔다. 반면, 어머니의 행동은 더 찝찝하게 마음에 남았다. 아마도 아버지의 행동은 세상 누구라도 '잘못했네.'라고 손가락질하는 행동이지만, 어머니의 행동은 '엄마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행동이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채식주의자' 입장에서 아버지의 행동은 주변에서 말리는 사람도 있고, 자기의 의지로 충분히 버틸 수 있었지만, 어머니의 행동은 주변의 시선이나 자기의 의지로 버틸 수 없는 '함정'같은 상황으로 다가왔을 것 같다.

무언가 폭력이라고 정의하기 힘들지만 결과적으로 더욱 폭력적인 상황에 빠져버리고 마는 그런 함정.


이런 느낌은 두 번째 이야기에서도 비슷했다.

분명 형부의 행동은 잘못되었다.

그런데 글의 대부분은 형부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예술가로서 그럴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고 설명해 주는 느낌.

그런 느낌에서 맞닥뜨려서 그런지 사건이 터진 날 아침에 아내의 대응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무런 설명이나 해명이 필요 없다는 듯이 정신 병원에 신고하고 남편이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장면.

나는 위 장면과 어렸을 적 키우던 개를 잡는 아래 장면이 겹쳐져서 다가왔다.

키우던 개가 나를 물었고, '감히 나를 물어?'라는 마음으로 오토바이에 질질 끌려다니며 죽어가는 개를 바라보던 모습. 이야기가 몇 번째 장에 나오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를 물었던 개도 해명을 할 수 없었고, 그녀의 남편에게도 해명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질질 끌려가는 방법밖에는....

이 느낌도 내가 남자이기에 좀 왜곡된 걸까?

분명 형부의 행동은 성적인 폭력 행위로, 사회적으로 규정된, 모두가 인정(?)하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이다. 그런데 그에 대한 언니의 행동은 그럼 당연하고 적절한 대응이었을까? 죄를 묻더라도 이야기는 들어보고 죄를 물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결혼을 통해 가족으로 묶인 존재,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라는 존재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이런 애매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형부를 일부러 예술가로 설정해서 이야기한 것도 같고...

아마 나의 이런 생각도 두 번째 이야기만큼이나 논란이 있으려나..?


그리고 세 번째 이야기.

세 번째 이야기는, 결국 정신 병원에서 지내게 된 동생과 언니의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동생의 기이한 행동들을 들려준다. 그리고 그런 동생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조치들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생명의 소중함, 그 어떤 경우에도 지켜져야하는 사람의 목숨, 그 당연한 '상식' 때문에 동생이 고통받는 상황을 보여준다. 몸부림치는 동생을 향해 '살리려면 어쩔 수 없다.'며 의료진들이 행하는 행동들. 그로 인해 고통받는 '채식주의자'

과연 앞에서 이야기한 좀 더 확실하게 나쁘다고 생각되는 행동들은 '폭력'이고, 생명을 살리기 위한 의료진과 언니의 선택은 '폭력'이 아닌 건가?를 묻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나의 의지로 선택한 것들에 대해 이 사회가, 세상이 잘못된 것이라고 규정짓고 억압한다면, 그런 억압을 피하기 위해 나의 의지를 꺾고 묻어두어야 하는가?

과연 그건 옳은 것이고 폭력이 아닌 것인가??

여기에는 언니가 죽으려고 했던 짧은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리고 그 에피소드 뒤에 언니의 선택이 바뀌는 장면이 이어져서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살아야지.'라는 사회적으로 당연하고 옳다고 여겨지는 선택에서, 과연 이제 맞는 걸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다른 종류의 선택을 하는 장면.

'채식주의자'를 마침내 이해해 주기로 한 결말이지 않았을까?

책 속의 언니, '나'라는 독자 그리고 이 사회가 너무 본인들만의 기준으로 폭력을 정의하고 있기에 어딘가에는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채식주의자'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

책 표지에 있는 글은 아래와 같다.

"한번만, 단 한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럴 수 있을까."




무엇이 정답인지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소설은 참고서나 전공 서적처럼 '사실'이나 '정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뿐이므로.

해석은 각자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첫 번째로 '채식주의자'를 읽었던 나의 해석은 이러하다.

이제 곧 두 번째로 읽어봐야지.



저의 첫 책 : Coffee & Tree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6447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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