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대표님에게 퇴직 의사를 밝히는 날, 나는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이상한 일이었다. 새벽부터 확 깬 것이 이상한게 아니라, 얼른 출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 몹시도 이상했다. 근 1년간 아침마다 심장을 쥐어짜는 불쾌함이 있었다. 그 불쾌함을 말로 표현한다면--
아 시X 회사가기 싫다.
대체로 이런 것이었다. 그 전에는 매일 기대와 설렘을 안고 회사로 나갔다는 사실, 세상도 나도 결국에는 또 변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안타까웠다. 지금 내 인생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 날엔 이 불쾌함을 기어코 내 의지로 종료시킨다는 점이 나를 들뜨게 했던 것 같다. 매일 걸어갔던 출근길인데도 새롭고 싱그러웠다. 매일 앞을 지나가는 횟집에서 사장님이 나와 호스로 물을 빼는 것을 보았다. 네모진 어항속 물고기들이 천천히 헤엄쳤다. 늦봄이어서 아직 나뭇잎이 연두색이다. 이제 더 짙은 녹색으로 변하겠지?
대표와의 면담 시간은 오후 3시였다. 그 전까지 나는 두 개의 미팅과, 단독 처리할 세 가지의 태스크가 있었다. 미팅 중 하나는 나의 팀과 진행하는 정기 주간 미팅이었다. 미팅을 하면서 그들의 예쁜 얼굴을 찬찬히 보면서 웃었다. 이제 매일 못보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충분히 많은 것을 함께 겪고 이뤄내왔다.
퇴사 결심 전에는 조직의 리더로서 이 어린 양떼같은 친구들을 성장시키고 이끌어 더 큰 성과를 만들어내겠다, 나는 팀원들의 방패이자 선장이다! 라는 영웅심 가득한 생각과 말을 했었다. 이제 보니 나는 한 때는 정말로 회사를 통해 자아실현을 하려 했구나 싶다. 하지만 막바지에 가서 이건 퇴사를 미루는 핑계 중 하나에 불과했다.
어제 나는 전직장 동료들을 만났다. 내가 회사를 4년 넘게 다니는 동안 이들은 출산을 하고(그것도 두번이나), 인간 형태를 막 갖추기 시작한 아기들을 키우는 어엿한 엄마가 되었다. 어란 스파게티와 크림 리조또를 덜어 먹으며 우린 아기를 키우는 것에 대해 떠들었다. 아기가 엄마'만' 찾는 시기가 왔다고 했다. 아이가 처음으로 자립심이 생기기 직전에 오는 갱년기같은 거라고. 신기해서 웃었다. 첫째가 질투가 심하다고, 둘째한테 뭐라도 챙겨주면 그리 성을 내고 서운해 한다고 했다. 나도 아주 어렸을 때 동생 한정으로 샘이 아주 많았다고 얘기했다. K-장녀인 우리들은 공감하며 첫째편을 들어줘야한다고 입을 모았다.
식사 후 커피를 마시며 그들이 내게 물어왔다. '회사 왜 나왔어요? 계기가 뭐예요?' 수많은 사람들이 했던 질문이었지만, 그들이 원하는 단순화된 결정적인 계기를 주기에 나는 너무 정직한 편이기에 이렇게 답했다:
'계기가 없었어요. 그냥 더이상 이 회사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깨달음도 계기라면 계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또, 그 깨달음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과 상황들이 있었나. 그들은 내게 멋있다고 했다. 그리고 당신은 일은 얼마든지 하고싶을 때 할 수 있다고, 그리고 또 돈버는 방법은 정말 다양하다고도 했다. 이것도 수없이 들은 얘기였지만, 나는 그저 좋았다. 까놓고 말해 남의 돈 벌어먹는게 어디 쉽겠어? 그저, 이 사람들은 나의 마음을 생각해서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거고, 난 그 마음씨가 고마운거다. 애초에 이들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바란게 아니었으니까.
사표쓴 그날, 오후 세시가 되어 나는 묘하게 차분해졌다. 술이 식기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라던 관우마냥 비장하고 당당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아주 작은 걱정이 있었다. 혹시 반려하고 붙잡으면 어떡하지? 뭐라고 설득하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대표실에 들어가자 어쩐지 눅눅해진 시리얼같이 피곤해보이는 대표님이 짠해보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야기를 꺼냈다. 퇴사하고자 한다고. 짧은 정적이 흘렀다. 놀란 대표님의 입술이 떨렸지만, 나는 이 분이 어느 정도는 '언젠가는 나갈 것 같다'라고 예상하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정적을 잘라내고 사유를 말씀드렸다. 여기에 쓰지는 못하지만, 합당하고 중요한 이유들로 잘 준비해갔던 내용이었다.
대표님은 안타까워하는 소리를 냈다가, 심각한 상황인지 물었다가, 이런 얘기를 했다.
"디딩님한테 제가 너무 스트레스를 준 게 아닌지...죄송하네요."
조금 황당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경제도, 업계도, 회사도 힘든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안받는 것이 이상하지 않나? 아니, 그것보다도--대표님이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었던가? 어쨌든 나는 아니요, 회사는 다같이 힘들고 스트레스받는건데요(당신 포함해서) 뭐, 라고 얼버무렸다.
면담이 끝나고난 나는 하마터면 날아갈 뻔했다. 그만큼 마음이 가벼웠고 해피가스같은 충만감으로 빵빵하게 부풀어올랐다. 자리로 돌아왔다가, 당일 술약속을 잡은 후, 나 다음으로 시니어인 팀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ㅇㅇ님, 놀랄까봐 미리 말씀드려요- 저 퇴사합니다. 내일 얘기해요!'
옆자리에 앉은 그가 눈이 휘둥그레 커져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신나게 짐을 챙겨 떠날 채비를 하는 중이었다. 팀원은 나를 붙잡으려다가, 술마시러 가야한다는 내 말에 왈칵 눈이 빨개지더니 소리죽여 울음을 터뜨렸다! 눈물없는 T 중의 T로 유명한 그가 울다니, 그날 하루 중 가장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다른 직원들 눈치채지 못하게 해달라고 급히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술은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취했다.
어제 만난 친구들에게 물었다. 그 회사에 들어갔던 걸 후회하나요? 우리는 모두 똑같이 후회는 전혀 없다고 했다. 이제보면, 내 30대 인생 중 무려 4년이나 차지한, 내가 만들고 살아낸 내 시간인데-- 나는 내 인생이 후회스럽다고 생각하나? 아니요, 후회라니. 원체 자기반성을 많이 하고 종종 흑역사가 기억나 고통받는 스타일이지만, 두고두고 후회를 하는 성격은 아니다. 시간이 아깝잖아. 범죄를 저지른 것도 없고, 남의 눈에 피눈물나게 한 것도 없다. 큰 병이 생겨 평소에 몸 좀 잘 챙길걸,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니다.(건강 상태가 좋지 않기는 하지만) 그런데 뭐니뭐니 해도 나는 내가 선택한 수많은 길에 대해서, 전반적으로는, 잘 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다.
난 꽤 괜찮은 인간이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