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몸

영화 '아워 바디'

by 이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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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워 바디>는 오랜 고시 공부로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자영이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겪는 변화를 담은 영화다. 바람을 가르며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자영의 모습은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와는 달리 편하고 자신감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를 몸을 움직이며 생에 대한 새로운 감각과 긍정적 변화를 얻어내는 작품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그러기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너무 짙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의 압력이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실로 내게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달리는 몸이 아닌 말할 수 없는 몸이었다. 이 영화 저변에 깔려 있는 문제적 의식은 방치된 심신을 돌봐야 한다는 구호보다 복잡한 것이며 극 중 가장 큰 비극은 말할 수 없는 몸에 연관돼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달리며 건강해지는 몸뿐만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몸에 대해 말해야 한다.


언어를 갖지 못한 육체를 살피기에 앞서, 먼저 달리는 몸의 다른 의미, 즉 좌절한 몸에 대해 살필 필요가 있다. 자영이 운동을 시작하는 이유는 쇠약해진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신체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 뒤에는 원하는 목표에 다다르지 못한 자의 씁쓸함이 자리하고 있다. 친구 민지의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급여까지 그녀의 돈으로 받은, 자존심이 처참히 구겨진 날 저녁 자영은 달리는 현주를 보고 무작정 뒤를 쫓는다. 숨이 차도록 달리다 끝내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의 모습은, 탄탄한 육체를 원한다기보다 마음의 상처를 떨쳐내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주가 매일 집을 나서는 이유 역시 비슷하다. 그녀에겐 작가라는 꿈이 있으나 아직 그것을 이루지도 버리지도 못했다. 이 사실은 영화에 직접 명시되지는 않지만 그녀를 억누른다. 어딘지 모르게 얼굴에 늘 그늘이 져 있는 그녀는 술을 마신 날에도 달려야 한다고 우긴다. 자영과 현주에게 달리기란 원하는 자리를 찾지 못해 상처받은 사회적 자아에 대한 보상이다. 사회적 자아의 위치는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이지 않지만 현존하는 육체는 내 지시에 따라 변하며 배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상체계로서의 달리기는, 그러나 몸에 축적된 좌절에 완전한 해독제로 작용하지 못한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거니와 그들이 관리된 몸에 많은 애를 썼다는 사실 자체가 인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 자영과 현주가 서로의 성적 판타지를 이야기하던 장면을 보자. 그저 호텔 스위트룸이 배경이었으면 좋겠다는 자영과 달리 현주는 서른 살 많은 남자와의 잠자리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유인즉슨 어린 남자들은 자기 몸만 자랑하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덧붙인다. “나만 억울하잖아. 나도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온 건데.” 이 대사를 듣는 순간 우리는 현주의 몸이 관리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노력을 말할 수 없다는 걸 포착해야 한다. 만일 스스로 말할 수 있었다면 억울함까지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녀의 말에서 탄탄한 몸이 타인의 시선과 인정이 있어야만 만족감을 준다는 걸 알아야 한다. 만약 운동이 보상이 아니라 자기만족에 불과했다면 자신의 몸이 인지되지 않는 것에 분함까지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현주가 ‘어떻게 이 몸을 만들었는데’가 아니라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온 건데”라고 말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자신이 운동하는 데 들인 노력을 위치로 표현하는 저 말은 곧 ‘내가 작가가 되기 위해 얼마나 달려왔는데’라는 말로 들린다. 아마도 현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뛰고 넘어졌는지가 보이지 않는 데 대해 부조리를 느꼈던 게 아닐까.


결국 이 영화의 요지는 여성들의 좌절이 제대로 읽히지 않는다는 것인데, 슬픈 건 여성들마저 서로의 달리는 몸에 대해 말하거나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엄마와 친구는 자영에게 계속 사다리를 오르라고 재촉하며 달리기를 할 체력으로 다른 일을 하라고 조언한다. 영화의 말미, 다시 공부를 제안하는 엄마에게 자영은 “엄마는 쉬지 않고 얼마나 달려봤어?”라고 우회적으로 답답함을 토로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자영 역시 현주의 절망을 파악하지 못한다. 그녀의 매끄럽고 늘씬한 육체에 감탄하되 그 뒤에 있는 이야기는 듣지 못한다. 그녀는 “자영아, 내 소설 한 번 읽어볼래?”라는 현주의 질문을 술에 취해 넘기고 만다. 때문에 현주에게 남는 건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신의 트랙 안에서 달리는 일뿐이다. 함께 달리던 마지막 날 밤 현주는 “자영아, 나 오늘 네 뒤에서 뛰어도 돼? 힘들면 윤자영 기 빼먹으면서 뛰어야지”라고 말하지만 결국 앞서서 달린다. 그녀에게 주어진 건 그뿐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자영이 그녀를 향해 “나 네 기 빼먹는다!”라고 하는 대신 왜 내 뒤에서 달리지 않느냐고 물었다면, 현주의 오묘한 표정과 비극적 사고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영은 변할 수 있을까. 그녀는 말을 하고 들을 수 있을까. 슬프게도 그건 현주의 죽음 뒤에도 요원한 일로 보인다. 극적인 변화가 일기는커녕 그녀가 현주의 망령에 시달리는 듯 기행을 펼치기 때문이다. 그녀는 달리기에 더욱 집착하는 한편 현주의 판타지를 직접 실천, 정 부장과 섹스를 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들을 부정적으로만 파악한다면 마지막에 등장하는 자영의 자위 장면과 그 모습을 긍정적으로 담아낸 영화의 연출을 이해할 수 없다. 어쩌면 자영은 현주의 죽음 이후 읽히지 않는 몸이 되지 않으려는 노력을, 달리는 와중에도 계속 탐색해 왔는지 모른다. 꿈속에 등장한 현주의 몸을 자영은 손으로 훑는다. 이때 현주의 몸은 전신이 아니라 생전에 찍었던 사진에서처럼 맨 등만 노출되어 있다. 전에는 감탄만 하며 바라봤던 그 등을 자영이 천천히 쓰다듬는 건 혹 그 몸의 의미를 뒤늦게나마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아닐까. 이 추측에 확신이 서는 이유는 그녀가 현주의 말을 따르는 데에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정 부장과 일탈을 벌이기 전 그녀는 민우와 섹스를 한다. “누나는 괜찮아?”라는 따뜻한 물음으로 시작된 그날 밤이었지만 관계를 끝낸 직후 민우는 자신의 몸을 자랑, 아니 자신이 들인 수고에 대해 말한다. 그와 함께 운동한 자영의 옆에서 그녀를 보지도 않은 채 말이다. 따라서 자영이 현주의 판타지를 대리 실천하는 것은 정신적 이상 행위라기보다 그녀의 몸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저항이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정 부장은 그녀의 젊은 육체에 감탄이라도 하기 때문이다. 회사를 관두는 것 역시, 그녀의 그런 의도가 민지에 의해 조금도 이해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종국에 자영이 자신을 만지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위무다. 달리는 몸의 보상을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신에 두고 읽히지 않는다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영화의 엔딩은 분명 소극적 저항이고 자영이 헤쳐가야 할 세상은 여전히 험하다. 하지만 어쩐지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확신이 드는 이유는 무얼까. 나는 이 질문에 자영의 동생 화영이 언니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언니의 몸을 흘끗거리던 시선을 상기해 보면 그녀의 운동은 말 그대로 몸을 만들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친구들의 질시를 받을 만큼 이미 날씬한 몸을 갖고 있다. 그녀에게 달리기는 조금 다른 의미인 것으로 보인다. 늦은 밤 운동을 위해 집을 나서는 언니를 조금은 의뭉스럽게 바라보던 표정. 이미 잠자리에 들었음에도 언니가 나가는 소리를 듣고 굳이 따라나섰던 이유는, 몸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보다 언니에게 달리기가 무슨 의미인지를 알고 싶어서였던 건 아닐까. 화영은 “같이 가”라고 말한 뒤 언니의 뒤에서 기를 빼먹지 않고 옆에서 달린다. 결국 헉헉 대며 뒤처지기는 하지만, 자매는 서로를 옆에 두고 달린다. 이 이미지에서 나는 화영이라면, 그녀라면 언니가 혼자 달리다 넘어지게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호텔 창밖을 바라보는 자영의 얼굴에서 긍정의 기운이 느껴진다면, 그건 그녀가 자신의 몸을 스스로 보려는 노력을 시작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건 “나, 오늘은 또 뛰어보려고”라고 말해주는 화영이 저 바깥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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