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이 프레임을 벗어나는
영화 '보희와 녹양'
**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열다섯 살 소년의 성장기. 이 소재의 영화에서 우리는 어떤 풍경을 기대할 수 있을까. 고민의 이유에 따라 그 풍경은 달라지겠지만 자신이 사회의 정상 규범들에서 조금씩 벗어나 있음을 아쉬워하는 소년의 이야기라면 그 분위기가 어렵지 않게 예상된다. 아마도 동족의 무리에 끼기 위해 몸에 맞지 않는 비행을 저지르는 소년의 괴로움이 펼쳐지는 건 아닐까. 그러나 <보희와 녹양>은 이런 예상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다. 영화는 무리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을 부수기보다 그 반대편에서 본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를 택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의 제목은 <보희와 녹양>. 주인공 보희의 곁을 지키는 건 소녀 녹양이다. 십 대 소년들이 가장 궁금해하면서도 멀리 대하는 존재인 소녀. 보통의 소년들과 달리 보희는 녹양의 손을 잡음으로써 다른 그림의 성장기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소년들이 배척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 괴로워하고 놀라워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들이 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말이다.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보희는 걱정스러운 것이 많다. 자신의 이름에 따라붙은 보지라는 별명도, 감성적이고 조심스러운 성격도, 엄마에게 생긴 남자친구의 존재도 모두가 고민스럽다. 마침 죽은 줄 알았던 아빠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보희는 그를 찾아 나선다. 아빠를 찾는 보희의 여정은 그리운 아빠의 품으로 뛰어들고픈 마음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과 다른 성격의 소유자이기를, 그가 자신에게 실망해서 떠나버린 게 아니기를 바란다. 보희는 묻는다. “저희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영화는 보희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의 이유가 무엇인지, 가슴에 구멍이 뚫릴 만큼 받은 스트레스의 근원이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놓여 있는 상황들에 기대어 추론할 수 있다. 그는 남자다운 이름과 당당한 성격을 지닌 아버지의 아들이 되지 못해 괴로운 것이라고 말이다. 이걸 압축하자면 사회가 기대하는 소년성을 갖추지 못한 남자아이의 고민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보희가 문득 “저는 녹양이처럼 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것 또한 그의 문제가 소년성에 밀착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그녀는, 보희에 따르자면, 성인 남자인 성욱과 비슷한 친구다. 털털하고 거침이 없다.
한데 녹양이가 되고 싶다는 보희의 바람은 모순적이다. 왜 하필 여자인 녹양인가. 성욱도 아니고. 이 기묘한 희망은 그러나 보희가 지닌 특별함이다. 그가 또래에게 인정받기 위해 녹양을 멀리하지는 않을 거라는 증표. 학교에서 남자아이들은 보희를 보면 시비를 건다. 그가 녹양과 이야기할 때마다 꼭 한두 마디씩을 던진다. “연애 좀 작작해라.” “야, 교실이 너희 거야? 막 연애질하게?” 늘 무리 지어 축구를 하거나 저들끼리만 얘기하는 그들에게 보희와 녹양의 우정은 진짜가 아니다. 그건 연애질일 수밖에 없다. 소년의 가장 친한 친구가 소녀일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욱은 보희에게 묻는다. “왜 붙어 다녀? 얘들이 안 놀려?” 아이들의 놀림은 분명 보희의 고민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그는 녹양과 거리를 둘 생각은 하지 않는다. 녹양은 절대로 그를 버리지 않을 불알친구이기 때문이다. 보희는 무리에서 배제당하지 않기 위해 바깥의 타자를 이유 없이 놀리거나 멀리하지 않는다. 그가 특별해 보이는 이유다.
보희의 성장통은 아버지의 비밀이 알려지며 완화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가 괜찮아지는 이유는 그 자신에 대한 깨달음에 있다. 엄마가 없는 녹양에겐 더욱 소중했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보희는 말없이 녹양을 안아준다. 이를 본 남학생은 또다시 “할머니 죽은 게 뭔 대수라고”라며 비아냥거린다. 보희는 참지 않고 그와 몸싸움을 벌인다. 비이성적인 조롱에 직접 맞선 경험은 보희로 하여금 자신이 결핍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 문제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는 걸 깨닫게 한다. 성욱을 데리고 싸운 친구의 집을 찾아가 사과를 할 때 그가 눈여겨보는 것 또한 그 집의 화목한 분위기가 주는 모순이다. 사과를 하러 온 보희에게 아이는 “아빠 없어서 형 데리고 왔냐?”라며 다시 시비를 건다. 그런 아들을 엄마는 적극적으로 혼내지 않는다. 인자해 보이는 부모와 그런 그들을(특히 아버지를) 따르는 아이. 보희가 상상했을 법한 가족의 모습이다. 하지만 온화한 부모와 독설을 내뱉는 아이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부조리를 예민한 보희가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다. 깨달음이 쌓이면서 보희는 자연스레 자신의 고민을 내려놓게 된다. 아빠를 만나기 전, 그가 녹양에게 “괜찮아”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다.
보희의 성숙함은 아버지의 비밀을 대하는 자세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아버지가 다른 남자와 키스를 하는 장면을 목격한 뒤 그가 가족을 떠났던 이유를 알게 된다. 아버지가 남성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소년은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충격? 경악? 단어를 달리 해도 예상할 수 있는 반응들의 본질은 비슷하다. 하지만 보희는 단지 그렇구나, 아버지가 나를 싫어해서 떠난 게 아니었구나,라고 이해하기만 한다. 그 이상으로 혼란을 보이며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는다. 이 마음과 태도는 특별함을 넘은 미덕이다.
보희는 전복적이란 단어를 떠올리게도 한다. 아버지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 그가 새파란 강물에 들어가던 장면을 생각해 보자. 순간 나는 그가 극단적 선택을 내린 줄 알았다. 언젠가 그가 울며 보았던 어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강물에 빠지는 소년의 뒷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된 그가 요동치는 혼란함에 물속에 뛰어들었으리라고 예상했다면 너무 편협하고 못된 걸까.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이 그처럼 밑으로 가라앉은 소년들의 이야기를 보아 왔던가. 그러나 영화가 비극적 선택을 내린 소년과 보희의 뒷모습을 같게 한 이유는 그들이 같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다. 잠깐이라도 보희가 영화 속의 소년처럼 강물에 잠긴 채 마지막을 마주할 거라 생각했다면 그건 오롯이 우리의 편견이다. 보희는 유유히 사선으로 헤엄쳐 가면서 자신은 다르다는 걸 다시금 보여준다. 보희의 가볍고 편안한 유영은 앞서 극단적 선택으로 보였던 장면의 프레임을 빠져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프레임은 영화 속의 영화가 암시한 틀만이 아니라 우리가 영화 속 소년들에게서 예상했던 편견이기도 하다. 영화 내내 보희는 영화 속 세상의 규칙만이 아니라 밖에 있는 우리의 협소한 사고와도 싸워왔던 것이다.
물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온 보희는 엄마에게 괜찮다고 말한다. 자신의 이름이 보희인 것도, 엄마가 남자친구를 만나는 것도. 자신을 긍정하기 시작한 소년은 자신에게 던져질 시선들이 더는 두렵지 않다. 이 두려움의 극복은 더 넓은 의미의 가족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해준다. 보희와 녹양의 생일, 성욱과 사촌누나, 그리고 보희의 엄마가 함께 모여 있는 모습은 그들이 한 가족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들 모두 일반적인 가족의 풍경을 이루며 살지 못했다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보희와 녹양>은 정상의 기준선 반대편에 있는 것들을 끌어안는 영화다. 그리고 그 포옹이 결코 힘겹지가 않다. 이 산뜻함을 기만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더 자주 이런 예외들을 접해야만 한다. 프레임은 무너져야 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