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전쟁 같은 맛’
“나한테 분유를 주더라.”
“아, 그래요?” 나는 놀란 척하며 말했다.
하던 생각이 끊긴 듯, 엄마는 잠시 조용해지더니 환각적 몽상에 깊이 빠져드는 듯했다.
“그 맛은 진절머리가 나.” 엄마는 말했다. “전쟁 같은 맛이야.”
엄마가 묻지도 않았는데 전쟁 얘기를 꺼낸 건 이번이 겨우 두 번째였다. 그 말을 듣자 연구 내용이 파편처럼 머릿속에 떠올랐고 나 역시 몽상에 빠져들었다. 죽은 엄마의 시신 옆, 흙길 바닥에 나앉아 있는 아기들, 네이팜탄에 화상을 입고 미라처럼 붕대를 감은 여자들의 모습. 미군기가 공중에서 폭탄을 떨어뜨려 아이를 잃은 노근리 학살 생존자 여성의 말. 그날 미국의 두 얼굴을 봤어요. 미국의 식량 원조를 회고하는 전쟁 신부의 말. ‘양키’가 우리를 구하러 왔다는 말을 들었어요……. 쌀이나 보리를 기다리던 차에, 먹을 게 넉넉히 올 거란 생각에 침을 흘렸죠……. 그랬는데 분유만 끝없이 쏟아졌고, 그걸 타서 마시는 사람마다 며칠씩 설사로 고생을 했어요. p.39-40
책 <전쟁 같은 맛>은 작가가 어머니 군자에 대해 쓴 회고록이다. 군자 씨는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 일본으로 강제 징용된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가 전쟁과 분단, 미국의 점령을 겪은 뒤 미국인인” 남성과 “동침했다는 죄로 추방”당한 여인이다. 힘들게 백인 남편과 결혼해 이민을 갔지만, 그가 옮겨 간 미국의 어느 “동네는 피난처가 되지 못했고, 소위 구제되었다는 명목으로 이민자들에게 끊임없이 정신적 대가를 치르게 했던, 제국의 폭력으로 얼룩진 또 다른 장소”였다(20). 결국 군자 씨는, 그곳에서 조현병을 앓게 되었다. 작가 그레이스 조가 아직 십 대였을 때 처음 발병한 군자 씨의 조현병은, 당시 병에 대한 의료계의 무지와 가족들(특히 남편)의 미흡한 대처로 이후 수십 년간 그를 작은 방에 가두게 만들었다. 훗날 서른을 훌쩍 넘긴 성인이 된 그레이스는, 증세가 심해져 음식을 거부하는 어머니를 위해 한국 음식을 요리하기로 결심한다. 온전한 미국인이 되기 위해 잊고 살았던 한국의 음식들, 특히 생태찌개를 맛본 군자 씨는 문득 입맛이 돌기 시작한다. 미셸 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가 그러했듯, <전쟁 같은 맛>은 딸인 그레이스가 어머니 군자를 위해 요리하고, 그로써 어머니의 저물어가는 삶을 보살핀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두 책은 작가 본인들이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어머니를 보살폈는지에 대해 포장하지 않는다. 두 책은 언젠가 “엄마! 다시 돌아와줘! 엄마!”(135)를 외치며 쓰러진 적이 있는 그레이스의 울부짖음처럼,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애도, 그리고 ‘한(恨)’으로 가득하다. 나를 길러내며 희생한 엄마. 나를 세상 무엇보다 사랑한 엄마. 도무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나의 엄마. 그레이스 조는 어머니 군자 씨의 삶을 직시하며 그를 온전히 끌어안고자 한다. “페이지 위에서 그분의 유산을 살아 숨 쉬게 하고, 그 자취를 따라 내 유산을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24).
그레이스는 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군자 씨는 기지촌에서 일한 여성이었다. 이전까지 어머니의 삶(가난한 한국여성이 어떻게 미국인 아버지를 만났는가)에 대해 희미하게 추측만 해왔던 그는 오빠와 올케를 통해 알게 된 사실로 인해 큰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단지 충격을 받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이 알게 된 새로운 진실을 바탕으로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엄마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양공주(yankee whore)라 일컬어진 여성들의 삶을 공부하고 그에 대한 논문을 썼다. 바로 이 경험 덕에 <전쟁 같은 맛>은 매우 사적인 회고록이면서도 사회학 서적으로서의 성격을 띤다. 그레이스는 엄마가 작은 방에 갇혀 ‘오키(옥희)’의 목소리에 좌우되는 삶을 살게 된 이유를 찾아 헤맸고, 그로 인해 그의 삶을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작가가 보기에, 군자 씨의 조현병은 타고 난 기질적인 측면보다 그가 겪어 온 상황의 탓이 훨씬 더 컸다. 흔히 성을 거래하는 여성들에게는 ‘쉽게 돈을 벌려한다’는, 여성 개인의 도덕성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지만, 그들을 통해 돈을 벌어들인 사회 구조에 대해서는 대체로 다들 무지하다(혹은 그런 척한다). 이에 대해 그레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군 기지로 몰려든 여성들은 그 일로 훗날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내다볼 수 없었다. 바걸, 클럽, 호스티스, 가수, 댄서, 성매매 여성, 웨이트리스, 군인들을 상대하는 편의점 주인, 클럽 여성들 머리를 손질해주는 미용사, 군매점PX 제품을 거래하는 암시장 행상인, 길거리 호객 행위에 노출되는 지나가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성에게 ‘양공주’나 ‘양갈보’라는 낙인이 찍혔다. 가족들이 용납 못 할 남자들과 유흥가에서 가볍게 어울려 다니는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그들이 한국인이 빚을 지고 종속 관계에 놓인 미국인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민족에 대한 모욕으로 여겨졌다. 미군 주둔으로 한국이 얻는 이익은 상당해서, 당국은 기지촌 성산업을 “외화벌이”의 일환으로 적극 홍보했지만, 정작 이곳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은 점차 권리를 박탈당했다. 한국 사회에서 이 여성들에 대한 낙인은 너무나도 심각해서,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게 더 이상 불가능할 정도였다. 아버지들은 딸이 일해서 번 돈으로 가계 빚을 갚았으면서도 그 딸을 호적에서 파냈다. 일부 여성은 학대자 손에 목숨까지 잃었지만, 이 남성들은 제대로 재판도 받지 않았다. 65-66
한국뿐 아니라 미국 역시 군자 씨의 정신을 위축시킨 사회였다. 군자 씨는 누군가 자신을 해하려 한다고 믿었는데, 물론 이는 조현병의 증상이긴 하지만, 그레이스는 말한다. 애초에 미국의 적대적 분위기가 군자 씨에게 해로웠다고.
셔헤일리스 사람 대부분은 엄마가 이사 오기 전까지 이민자를 대면해본 적이 없었다. 표면만 보지 않고 그 안을 들여다봤더라면, 이들은 엄마가 출신 국가의 생활 방식을 고수하면서 그걸 전염병처럼 퍼뜨린다거나, 합법적인 미국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으려 드는 그런 이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기실 그런 이민자들은 우리 마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단지 추상적으로만 존재하는, 우익 언론이 만들어낸 이미지의 합성물일 뿐이었다. 황화론. 외국인 침공. 미국 사회의 근본을 흔드는 외국인의 손. p.79
미국의 언론이 만들어낸 ‘황화론’과 아시아인과 맞부딪치며 살아본 적 없는 백인 침략자들(작가의 아버지는 셔헤일리스에서 원주민을 몰아낸 개척자 집안이었다) 사이에서 군자 씨는 그럼에도 미국인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동화는 절대로, 결코 쉽지 않았다.
... 엄마는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한단 사실에 전력이 나서 사람들이 하는 짓을 대놓고 거론하기 시작할 것이다. 사람들이 따라오고, 괴롭히고, 박해했다고 말할 것이다. 이 동네 사람 다 나를 노리고 있어. 애초 엄마의 말은 전적으로 합리적이고, 완전히 현실적인 말로 들릴 것이다. 미친 사람 말이 아니라. 조현병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라. p.91
슬프게도, 군자 씨의 이민 경험이 쉽지 않았던 데에는 그가 아시아인이라는 사실뿐 아니라 여성이라는 사실도 한몫했다. 그의 남편이자 작가의 아버지는 생활비를 온전히 주지 않았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 없던 군자 씨가 밖에 나가 일을 하게 만들었다. 그는 손찌검도 했고, 무엇보다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이 특권을 지닌 백인 남성이며, 자신의 새 부인인 군자 씨의 불평이 단지 ‘조금 미친 것이 아니라’ 진짜 병이 든 결과였음을.
아버지는 인종적 지배가 KKK 백인 테러리스트가 앞마당에서 십자가를 태우는 형태로만 나타나는 게 아님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종차별주의는 당신과 함께 사는 남자, 당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모습일 수도 있다. 자기가 아내를 찾은 곳, 당신이 태어난 나라를 변호하는 남자일 수도, 이 사람들은 한국이 더 이상 제 3세계가 아니라는 걸 모르나? 하지만 아버지가 엄마를 만났던 1960년대의 한국은 – 적어도 아버지의 정의에 따르면 – 제3세계였다.
아버지는 당신이 아시아를 왕래할 수 있었던 기회가 미군과 미군이 점령한 나라 간의 불평등하고 폭력적인 관계에서 왔다는 사실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필리핀, 괌, 오키나와, 한국에서 지낼 수 있었던 건 그곳에 있는 미군 기지 때문이었고, 미군을 지원하는 선원 역할을 하며 군의 일원으로 여겨졌던 아버지에겐 현지 여성을 접할 공식적인 기회를 비롯해 각종 특권이 주어졌다. 우리 엄마 같은 현지 여성 말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나도 이런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p.271-271
그러나 글을 쓰는 동안 그레이스의 목표는 비단 어머니의 삶을 거시적 관점에서 조망하며 이해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기억하는, 작은 방 안에 갇히기 전, 강인했던 어머니의 주체적 모습을 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어머니와의 끈이었던 요리를 통해, 작가는 어머니의 과거(기지촌 여성)에 가려 본인도 바로 기억하지 못했던 군자 씨의 용감했던 영혼을 기억할 수 있었다. 군자 씨는 미국인이 되기 위해 한국 음식을 자제했지만, 때로 자신이 할 줄 아는 이국적 음식을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 딸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미시 정치가적 측면을 지닌 사람이었다. 엄마의 요리 덕에 그는 어쩌면 자신이 겪었을 고초를 덜 겪게 되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짓궂었지만 적어도 엄마의 요리를 맛본 학교 선생님들은, 그레이스가 ‘맛있는 갈비’를 만드는 여성의 딸임을 알았다. 나아가 군자 씨는 마을에 새 한국인 이민자/입양아가 올 때마다 김치를 담그곤 했다. “함 묵자”고 말하면서. 이 행위에 대해 그레이스는 다음처럼 말한다.
삶의 터전을 떠나 낯선 곳에 온 이들을 달래기 위해 엄마는 김치를 담가주었다. 매일같이 먹고 요리하는 일이, 우리가 남겨두고 떠나온 사람들과 장소에 우리를 연결시켜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처음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이는 순간 당신의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엄마는 이들이 잃어버렸거나 이들에게서 지워진 한국의 친족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토록 섬세한 방법으로 엄마는 미국 가정과 미국이라는 국가가 우리의 구세주이고 우리가 이들에게 빚을 졌다는 담론에 구멍을 냈다.
나는 엄마가 저항의 의도로 김치를 담갔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행동에는 엄마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그 무언가가 있었고, 엄마는 이를 통해 살인적인 상황에 맞부딪치며 살아내기 위한 투쟁을 이어갔다. p.165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군자 씨의 음식은, 딸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조현병을 앓고 있는 와중에도, 그 사랑의 크기는 줄어들지 않았다. 작가의 기억 속에 군자 씨는 “미국 대학 사람들이” 딸을 “제대로 먹이기나 했는지 몇 달 동안이나 애를 태우”며, 시애틀 공항에서 딸과 재회할 때면 “인사와 포옹을 하기도, 비행은 괜찮았는지 학교생활은 어땠는지 묻기도 전에” “껍질 벗긴 오렌지를 내밀”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달짝지근한 떡이 든 봉투를 들고” 말하곤 했다. “차에서 먹어도 돼(345).”
<전쟁 같은 맛>은 ‘K-Food’에 대한 자찬과 한식을 맛보고 “Amazing!”을 외치는 외국인 리액션 영상이 넘치는 오늘날 다소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진정, 우리는 먼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우리가 지나온 세월은 그리 오래지 않다. 한식에 대한 외국인의 긍정적 반응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의식하며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갈구하는 것은, 오히려 <전쟁 같은 맛>이 생생히 보여주는 대로, 제국주의에 이리저리 밀쳐지고 짓밟혔던 한국인의 경험이 축적된 결과일 것이다. <전쟁 같은 맛>은 한국인의 정서가 어째서 한(限)이라는 것인지 다시금 일깨운다. 그러나 그 정서마저 계급화되어 가고 있는 오늘날, <전쟁 같은 맛>이 아마도 이 책의 주요 독자층일 사람들에게 일러주는 것은 한국 내부의 위계질서, 그리고 어떤 존재가 더 주변화되고 소수화되는지일 테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전쟁 같은 맛>은 여전히 엄마들이 부엌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가족의 식사를 책임진다는 면에서 현재와 공명한다. “차에서 먹어도 돼”라고 말하는 엄마가 사라진다면 나 역시 쓰러져 울부짖을 것이다. “돌아와줘!”라고 소리 지르며. 그리고 언젠가 김치찌개를 먹으며 엄마의 손맛을 떠올릴 것이다. 아마 그때, 또다시 눈물을 쏟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