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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Jul 18. 2024

나는 내가 소망하는 것을 금지한다

제시카 앤드루스의 소설 '젖니를 뽑다'

나는 내 몸이 억지로 쑤셔 넣어졌던 너무 작은 그 모든 공간들,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나를 더듬던 그 손길과 내게 머물던 그 눈길들을 떠올리며 침묵한다. 구슬 목걸이의 알처럼 진부하고 특별할 것 없는 이 조그마한 폭력의 파편들이 쌓여서, 내 목구멍에 단단히 감겨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긍금해진다. p.125    

  

‘몸’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나는 노동하는 육체나 갖가지 질병을 앓고 있는 육체가 떠오른다. 하지만 ‘몸’에 ‘여자’라는 나의 성별을 겹쳐보면, 꽤 오래전이지만 아직도 생생한 몇 가지 기억이 자연스레 따라 나온다. 따가운 햇빛 아래,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100m 달리기를 하던 여학생들. 운동장 계단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던 나머지는 누가 잘 뛰고 못 뛰는지를 대놓고 수군거렸다. 그 무해한 수다 속에는 이따금 부끄러운 줄 모르고 터져 나오던 폭력적 언어가 있었다. “쟤 가슴 출렁이는 것 좀 봐, 존나 크다.” 헐렁한 체육복 속에 몸을 숨길 수 있었던 나는 안도감을 느꼈지만, 명확히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여학생은 본인에게 꽂히던 시선과 말을 충분히 인식했다. 그는 평소 등과 어깨를 구부리고 다니던 아이였다. 그리고 그날, 그는 자신이 달릴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느리게 달렸다. 어느 날 사촌 언니가 집에 놀러 왔다. 이미 어른이었던 그와 학생이었던 나는 함께 바닥에 엎드린 채 잡지를 읽었다. 문득 일어나 찌뿌둥해진 몸에 기지개를 켰다. 일어선 날 밑에서 유심히 지켜보던 언니는 말했다. “와, 너 가슴 커졌다.” 나는 그 즉시 수치스러워졌다. 내 몸의 변화를 다른 사람이 알아차릴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갑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슴이 커지는 걸 원치 않았다. 큰 가슴은 내가 지금처럼 힘껏 달릴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 공포는 그 후 시작된 다이어트(갈비뼈가 보이고 1년간 무월경 증상을 겪고 결국 대상포진에 걸릴 만큼 혹독했던)의 전조 증상이었을까.


그러나 캐럴라인 냅의 <욕구들>이 내게 알려준 것은, 식욕의 억제가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나 단 하나의 이유로 촉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이 자신의 쾌락을 억누르고 작아지기로 결심하는 데에는 여러 요소가 작용한다. 먼저 그가 타고난 문화가 여성의 아름다움에 관해 정형적인 이미지를 살포하고 주입한다. 여성이라는 젠더에 따라붙는 공통의 경험들-외모와 행동거지에 관한 품평, 그리고 추행-은 그의 행동반경에 제약을 건다. 여기에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서 발생하는 인생의 역사적 사건들까지. <욕구들>을 읽고 나서야 나는 잘 먹지 못하는 기이한 증상이 내 일생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잘 못 웃고, 잘 못 즐기는 면면이 어린 시절부터 상처받지 않기 위해 부단히 쌓아 올린 장벽의 결과라는 사실까지도. 다시 말해 짜증과 고성으로 가득 찬 아침 식사가 20여 년에 걸쳐 이어지면, 충분한 돈이 없어서 원하는 걸 마음껏 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는 세월이 20여 년이 넘어가다 보면, 더불어 간헐적으로 원치 않는 성적 접촉과 여자로서의 가치에 대한 품평을 받다 보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편하게 말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리고 그 금욕적인 면은 어느새 나라는 사람을 규정하는 무언가가 되어버려서 나중에는 그 일면을 깨뜨리기가 어려워진다. 제시카 앤드루스의 소설 <젖니를 뽑다>를 읽는 내내, 나는 다시, 벽을 쌓던 과거의 나와 이제는 어떻게 그 벽을 허물면 좋을지 고민하는 현재의 나 사이를 거듭 오가게 되었다.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젖니를 뽑다>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인생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 젊은 여성 ‘나’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또 본인이 그걸 누릴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거듭한다.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젖니를 뽑다>는 알랭 드 보통의 소설처럼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의 심리나 관계에 대한 성찰을 다루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연애는 주인공의 정신적 방황과 공명할 뿐, 혹은 주인공의 서사가 진행되는 틀로 기능할 뿐 고유한 사건은 아니다. 그보다 이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여성의 몸에 누적된 억압의 역사가 어떻게 여성을 작아지게 만드는 가이다. 제시카 앤드루스가 주인공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은 까닭이다. ‘나’로만 제시되는 화자의 이야기는 사회가 여성의 몸에 공통으로 각인시킨 기억을 여전히 지니고 있으며, 그 기억의 결과를 인식하는 누구나 자신을 대입할 수 있다. 소설의 시점은 과거와 현재를 무수히 오간다. 과거에는 여성인 나의 몸에 기입된 부끄럽고 자잘한, 그러나 틀림없이 폭력적인 기억들이, 그리고 현재에는 연인은 물론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금욕적인 주저함의 순간들이 파편처럼 기술되어 있다. 이 명확한 인과 관계가 선형적 시간의 흐름을 벗어나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은, 이전의 기억들이 과거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의식 속에 선명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뚜렷한 기억은 다음과 같이 고통스러울 만큼 넘쳐흐르는 자의식의 형태로 표출된다.     


물속에서 더위를 싶었지만, 그러면 몸에 뿌린 태닝 제품이 씻겨 나가서, 사람들이 내가 겉보기에만 그럴싸하다는 것, 내 몸을 편하게 느끼지 않는다는 것, 추운 곳에서 왔다는 것, 햇살에 무화과가 쪼개지는 것을 본 적이 없으며 내 욕망이 아주 기분 좋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그들은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원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조차 없다는 것, 눈길을 끌고 싶지만 너무 무서워서 눈길을 돌려주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될 터였다. p.122     


‘나’가 내보이는 자의식은 답답하지만 한편으로는 공감과 연민을 자아낸다. 가정을 버린 아버지, 나를 책임진 엄마를 향한 죄책감, 텅 빈 주머니, 사회에 먼저 자리 잡은 친구를 보며 느끼는 초라함, 그리고 좀처럼 편해질 수 없는, 어떻게 대해줘야 할지 모르겠는, 내 모든 욕구의 근원이자 욕망과 조롱의 대상이 되는 내 몸! 나는 ‘나’의 삶에 이입하며 다음의 긴 대목을 읽고 또 읽었다.     


부러웠다. 그들은 자기 욕구를 충족시킬 수단이 있어서, 그 욕구를 억누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행동했다.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고, 도시를 내 어깨에 느슨하게 걸치고 모든 좋은 것을 손에 쥐고 싶었지만, 내 안에는 그들을 괘씸하게 생각하는 완고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들의 삶은 피와 연골이 제거된 채 겉만 번드르르한 플라스틱으로 덮여 있으며 고군분투하는 내 삶의 방식이 더 현실적이라고 나 자신을 타일렀지만, 결코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나는 늘 걸림돌에 걸려 넘어져, 무릎은 까만 멍투성이였고, 머리카락은 잔가지와 나뭇잎 범벅이었다.

나는 방세, 지하철 요금, 식료품비, 혹은 망가진 물건을 교체할 돈 등등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할 만큼의 돈이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은 내가 태어난 곳보다 더 크고, 내 생각에 내가 마땅히 누릴 만한 것보다 더 큰 것이었다. 나는 끼니를 거르고 절약한 돈으로, 어둡고 끈적끈적한 바에서 일렉트릭 피플과 와인 잔을 기울이거나, 특별한 목적지도 없이 밤에 버스를 타고 위층에 앉아 휘황찬란하게 약동하는 건물들을 구경하며 도시를 돌아다녔다. 마치 그 눈부신 광채가 모두 내 것인 양 말이다. 처음에는 그런 절충이 그만한 가치가 있었지만, 새 친구들이 원하는 것을 즐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불공평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허기를 느끼며 손가락을 빨다가도 곧 그 허기를 질릴 만큼 실컷 채운 반면, 나는 항상 그저 원하기만 했을 뿐이다. 

가장자리의 가시 돋친 공간이 나의 안식처가 되었고, 그로 인해 내가 스스로에게 가지고 있던, 다른 사람들만큼 많이 누릴 자격이 없고 가능한 한 적게 차지해야 한다는 믿음이 입증되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맞은편으로 갈 수 있는지, 언제나 모든 것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지, 안전하고 따뜻하며 배부르게 살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p.180-181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다이애나의 전기영화 <스펜서>(파블로 라라인)는 섭식장애와 자해 등 다이애나가 앓았던 증상들을 보여줄 뿐 병증의 원인이 되는 순간들을 콕 집어 재현하지 않는다. 그 때문인지 관객 중 일부는 다이애나에게 이입하는 것이 힘들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의 생애를 알고 있을지라도 스크린 속 스펜서는 지나치게 위축되고 흔들리는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그런 관객 중 하나였다. 영화가 너무 감정적인 건 아닌지, 다이애나를 너무 나약하게, 그래서 몰입하기 힘든 인물로 그린 건 아닌지 싶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떠올려 보면 영화는 다이애나의 병증이 특정한 사건의 결과로 표현될 수 없다는 걸 알았던 것 같다. 그가 스스로에게서 쾌락을 금하고 대신 고통을 선사하기로 한 건 영화의 시간으로는 미처 다룰 수 없는 겹겹이 쌓인 세월의 결과였을 것이다. 영화는 그 억압의 두께를 헤아리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라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이름 모를 ‘나’의 이야기를 읽으며 문득 <스펜서>가 떠오른 이유는 두 주인공이 특히 몸에 얽매인 여자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만, 두 작품이 궁극적으로 운명론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극이라고 평가되는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게 <스펜서>는 끝내 치즈버거를 한 입 베어 무는 다이애나의 모습으로 영화를 마무리하며 그에게 새로운 앞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희망을 준다. 다이애나는 싸우려 했고, 싸웠다. 결국 중요한 건 그것이다. <젖니를 뽑다>의 ‘나’ 또한 변화를 맞이한다. 그는 홀로서기를 시도하고 얼마간 유효한 경험을 하게 된다. 흔들리는 유치를 뽑은 건 그녀 자신일까, 아니면 타인일까. 분명한 건 유치가 뽑혀 나간 자리에 더 단단한 치아가 솟아나리란 사실이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인생의 도약 따위 없어도 괜찮다. 그저 다음과 같은 진실을 깨닫기만 한다 해도 '희망은 있는 것이다!'라고 소리칠 수 있지 않을까. “햇볕에 타는 듯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가슴속 심장이 터질 듯 마구 쿵쾅대고 반바지의 허리춤 위로 엉덩이 살이 비어져 나오는 것을 느낀다. 내 몸은 끊임없이 욕구로 욱신거리는 필사적인 동물이지만, 어쩌면 나는 욕구와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삶의 방식으로 보는 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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