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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는 사랑>과 <괴물들>

충돌하는 페미니스트/팬/윤리적 소비자 정체성

by 이희구


페미니즘이라는 용어 아래 요즘 가장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화두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당신은 필히 X 사용자여야 할 것이다. 그곳에 가면 늘 무언가가, 뉴스에 등장한 여성 대상 범죄부터 여성 소비자 입장에 따른 문화 비평에 이르기까지, 쓰까와 터프들의 시끌벅적한 목소리들로 논의되고 있다. 280 여자에 불과한 의견은 신랄하지만 공감할만하고, 그래서 지식과 위로, 더 나아가 얼마간의 정의감을 선물한다. 하지만 모든 생각에 동의할 수 있는 건 아니어서 X에 한참 머무른 뒤 따라오는 피로감은 떼래야 뗄 수 없는 부작용이다. 교차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나의 경우, X에 올라오는 페미니즘 논제는 조금 무섭고 벅차다. 나는 화장을 하지 않지만 숏컷은 하지 않았다. 나는 연애를 하지 않지만, 여전히 남자 아이돌의 빠순이다. <캡틴 마블>보다 <원더우먼>이 재밌었고, <캡틴 마블>의 페미니스트적 미덕이라고 하는 요인들에 전혀 매료되지 못했다. X에서 강경하게 소리 내는 페미니스트들의 기준에 따르면 나는 약간 모자란 인간이고, 한마디로 “나쁜 페미니스트”다(록산 게이, <나쁜 페미니스트>). 스스로 부여한 낙인 때문이었을까. 언젠가부터 나는 SNS에 #페미니즘이 트렌딩 하고 있어도 부러 외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올해 초 영화 <검은 수녀들>을 둘러싸고 벌어진 여혐 논란은 나를 ‘여성 서사란 무엇인가’란 고루하고도 피 터지는 인터넷 설전 속으로 다시 이끌었다. 유니아는 왜 악마를 자신의 자궁에 가두는가? 영화를 본 지 1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주인공의 심리라던가 동기는 전혀 기억나는 바가 없다. 하지만 어째서 영화가 그런 기이한 결단을 그렸는지는 이해가 간다. 남편과 이웃들에 의해 악마의 제물이 되었던 로즈메리의 희생과 체념을(영화 <악마의 씨>), <검은 수녀들>은 뒤집어 순교와 저항으로 바꾸고 싶었던 것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일부 여성 소비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남자라면 하지 않았을 일을, 단지 여자가 여자의 몸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행하는 것에 대해, 일부 한국 페미니스트들은 절대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여자 주인공의 순교를 가장한 자살이라는 처연한 스토리, 남자 감독의 연출, 그리고 논란 있는 남자 배우의 출연. 이 모든 것은 그들에게 영화를 소비하면 안 되는 이유였고, 일각에서는 ‘불매해서 이런 걸 여성서사라고 파는 걸 더 이상 못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펼쳐졌다. 나는 이 주장이 점차 탄력을 받아 몸집을 불려 가는 광경을 황망하게, 반대 의견을 펼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어떡해, 어떡해’ 하며 지켜보았다. <가을동화> 시절부터 송혜교는 나의 여신이었다. 나는 지지를 철회하지 않고도 그에 대한 공격을 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만큼 송혜교 배우를 깊이 애정해 왔고 지금도 그렇다. 그리하여 개봉 전부터 영화를 보지 않고 불매를 말하는 이들을 향해 외칠 수밖에 없었다. 소비자 윤리? 여성 서사? 그러니까 그게 뭔데!!!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팬들은 윤리적 소비자라는 위치에 더 예민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더 자주 고민에 빠진다. 스스로 ‘나쁜’ 페미니스트라 고백한 록산 게이는 그러나 잘못을 저지른 예술가의 작품은 굳이 소비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해자들이나 억울해하는 남자들의 작품을 무시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해자들의 유산을 두고 괴로워한다는 건 좋은 작품을 위해서라면 피해자들이 어느 정도는 대가를 치러도 된다는 뜻이므로(<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 p.281-282).” 가해자 편에 서지 않고 피해자와 연대하기 위해, 혹은 지금까지 여성을 부당하게 그린 문화적 서사에 저항하기 위해 페미니스트/팬/소비자는 자신이 보고 듣는 모든 것에 경계 태세를 취한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빼앗겨버린, 혹은 내 인생을 저당 잡힌 대상에 대한 마음을 한순간에 거둬들이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적어도 내겐 그렇지 않았다. 청소년 시절 내 방 한편에 포스터로 자리했던 H는 나의 첫 덕질 대상이었다. 그의 모든 앨범을 소장했고 트랙리스트 순서는 물론 전곡의 가사를 줄줄 외웠다. 일부러 암기한 게 아니라 너무 많이 들어서 저절로 외워졌다. 그 덕분에 타인을 보고 심장이 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고 팬이 느끼는 자부심이 무언지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범죄를 저질렀고, 내가 용납할 수 없는 윤리적 결함을 보여주었으며, 현재는 고인이 되었다. 나는 그를 버리겠다고 맹세했지만 그의 음악은 세상에 남아버렸다. 손 닿는 곳에 자리한 추억이었기에 나는 이따금 지나간 사랑을 들었다. 그리고 두려워했다. 내가 감히 이걸 들어도 되는 걸까. 추억에 잠겨도 되는 걸까. 무엇보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해도 되는 걸까.


안희제 작가의 <망설이는 사랑>은 스타를 향한 덕후들의 실패한 사랑의 미련을 조망한 책이다. 페미니스트/팬/윤리적 소비자로서 우리는 종종 잘못을 저지르거나 저질렀다고 알려진 공적 대상은 곧장 외면해야 옳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상과 다르게 우리는 사랑이 많은 동물이고, 그래서 애정이 솟아난 마음의 자리를 쉽게 비우지 못한다. 안희제 작가가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이 어려움, 곧장 떠나지 못해 죄인(혹은 오염된 예술 작품) 곁을 맴돌며 함께 개념 없는 인간으로 낙인찍히고야 마는 망설임이다. 그가 보기에 이 주저함은 오늘날 내칠 것이 아닌 오히려 활발히 논의되어야 할 대상이다. 크게 두 가지 면에서 그러한데, 첫째는 여론 재판이 이뤄지는 SNS 공론장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심 때문이고 둘째는 논란의 인물을 사회적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반성과 구원보다 더 나은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단편적인 일화로는 온전한 판단이 어려운 인성 논란과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십 년 이상의 시간이 흘러 오롯이 피해자의 증언에 기대야 하는 학폭 사건 등이 터졌을 때 여론 재판에 다급히 참여하는 건 사이버렉카에 선동된 대중뿐만이 아니다. 오늘날 자신의 SNS 계정을 통해 윤리적 공론장 형성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페미니스트들 또한 ‘속도전’을 펼친다. 페미니즘 리부트와 미투 시대를 지나며 페미니스트들은 피해자와 연대하는 방법으로 그의 말과 행동을 기다리기보다 그를 대신해 싸우는 법을 익혔다. 오랜 시간 홀로 고통에 시달렸을 피해자를 위해, 그리고 사법 체계의 부조리함으로 인해 그들은 몸소 가해자에게 사회적 낙인을 찍고 공적 영역에서 내쫓아버리는 방식으로 그에 대한 사회적 처형식을 수행했다. 팬덤이 모인 공론장에서도 다르지 않다. 특히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 페미니스트-팬들은 곧장 가해자로 지목된 연예인에 대한 캔슬을 외친다. 타인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진심으로 반성한 적 없는 사람이 사람들에게 애정을 갈구하고 부와 명성을 얻는 것은 분명 이상하고 또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의 말은 100%의 진실을 담보하고 있는가? 일부 팬들은 이 의문이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될 것을 우려해 가해자로 추정되는 연예인에 대한 손절을 즉각 실천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팬들을 비도덕적이면서 무지성한 존재로 몰아간다. 그러나 안희제가 보기에 “좀 더 나은 근거를 찾고, 판단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하고 ‘팩트’들을 중심으로 진실을 구성해 나가는” 일부 팬들의 모습은 어리석기보다 “합리적”이다(173). 왜 그렇지 않겠는가? 모두의 일상이 전시되는 시대, 우리는 누군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의 이전 행태들을 파묘해서 색안경을 낀 채 그의 생애를 다시 보고, 저 모습이야말로 그에 대한 진실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믿음일 뿐, 그에 대해 확인된 사실이 아니다. 고로 “폭로 자체의 진실성보다 폭로에 뒤따르는 것들”(136)에 치중되어 있는 스타에 대한 여론 재판은 지금의 형태가 최선일지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안희제가 조명하는 팬들의 기다림이 논란이 있는 스타에게 면죄부를 주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안희제는 무지성이라 낙인찍힌 채 망설이는 팬들이야말로 이성적이고 우리는 연예인에 대한 사법적 판단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공론장 밖으로 쫓겨난 스타를 계속해서 그리워하는 팬들의 모습에서 안희제는 공론장이 “비난”과 “퇴출”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닌, 변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믿음을 발견하는 장소가 될 수도 있음을 확인한다(125). 작가와 인터뷰에 응한 어느 팬은 다음처럼 말한다. “저는 사람은 누구나 변하고 본인들도 기회를 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게 피드백하거나 개선할 기회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왜 본인들은 정작 본인이 좋아하는 어떤 아티스트에 대해 그런 기회를 주거나 기다리지 못하는가. .... 실수했는데 그게 맨날 내 앞에 따라붙으면 낙인이잖아요.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람들한테 낙인 붙이는 걸 좋아하는 거 아닌가(195)?” 일부 팬들이 공유하는 ‘변화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전제는 “누군가를 변화할 수 없는 존재로, 즉 누군가에게서 시간이 지나며 변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박탈함으로써 잘못한 타인에 대해 빠르게 판단을 마치고 어떤 벌을 ‘선고’하는 분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196). 안희제는 “가속된 판단은 숙고 없는 선고”가 되고 “판단이 선고가 될 때, 도덕은 폭력”이 된다며 페미니스트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의 말을 다음처럼 인용한다. 선고는 “비난당하는 자의 윤리적 능력을 파괴하고, 나아가 윤리적 삶에서 필수적인 자기 성찰과 사회적 인정을 위해 메시지를 전달받아야 하는 주체의 능력이라는 조건을 크게 훼손”한다(197). 요컨대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도덕적 결함이 있는 모든 인물과 문화 상품이 사회에서 쫓겨나고 지워지면, 변화는 어디에서부터 올 수 있는가? 논란과 사회적 처벌, 그리고 이후 영원한 죽음은 우리 사회의 관성으로 자리 잡아도 되는 것인가?


영화 <검은 수녀들>을 암적 존재로 규정하고 이 영화에 대한 소비자들까지 모자란 사람으로 취급하는 몇 차례의 SNS 설전을 지켜볼 때 나는 이 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H의 죽음을 뉴스로 접했으며, 그를 안타까워하는 이들에게 생전 그의 죄를 다시금 상기시키는 사람들의 식지 않은 분노도 보았다.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로 전락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용서를 구하는 건 어떤 걸까. 나는 이 안타까운 질문이 죄를 저지른 모든 스타에게 적용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승리와 정준영이 우리의 눈앞에서 용서를 구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안희제 또한 성폭력 사건을 일으켰던 연예인에 대한 팬들의 기다림은 책에서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용서할 수 없을지언정, H의 노래를 여전히 품고 있는 나의 결함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들이 생각하는 여성 서사의 기준에 한참 미치지 못하더라도 송혜교에 대한 애정 하나만으로 <검은 수녀들>을 관람하는 나에 대해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


클레어 데더러의 <괴물들>은 독소처럼 쌓여 점차 나를 무력하게 하던 불안감을 해소해 주었다. 문화 비평서이자 작가 본인에 대한 회고록이기도 한 이 책은 <망설이는 사랑>에 이어 페미니스트이자 윤리적 소비자이고 싶은 내가 무언가의(혹은 누군가의) 팬인 나를 조금 더 포용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캔슬 컬처를 강경하게 지지하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X에서 이 책은 그 제목 덕에 몇 차례 주목받았지만, 내용은 록산 게이의 주장과 다르다. 데더러는 잘못을 저지른 예술가의 작품에는 평생 ‘얼룩’이 남고, 우리 대중은 그 얼룩을 결코 못 본 척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지워지지 않는 오점을 남김으로써 작품에 대한 우리의 순수한 애정을 훼손한 예술가들은 얼마나 괴물스러운가? 우디 앨런에 대한 성폭행 혐의를 꼬집고 순이 프레빈과의 기괴한 스캔들을 영화 <맨해튼> 스토리와 연결 지으며 책의 첫 장이 열리기 때문에 나는 데더러가 이후에도 ‘안전한’ 페미니스트 비평을 이어갈 거라 예상했다. 데더러 본인 또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내가 아는 페미니즘은 허물을 들춰내는 페미니즘이었다. ‘나는 고발한다’였다. 내가 이해하기로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존재 방식이 있다. 남자들을 괴물이라 부르는 페미니스트 그리고 문제를 무시하는 사람.” 나는 데더러가 남자들을 괴물이라 부르는 페미니스트 비평을 할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세상에 결함을 내비친 예술가 목록에 과연 여성이라고 없었을까. 그는 자기 아이들을 버린 도리스 레싱과 자살한 실비아 플라스 등을 책에 포함시켜 여성 예술가의 집요함과 섬뜩함이 가족에 어떤 상흔을 남겼는지도 다룬다. 동시에 그는 남성 예술가의 괴물성과 여성 예물가의 괴물성이 같은 선상에 올라 논의될 수 있는 것인지 묻는다. 이 질문을 던짐으로써, 데더러는 책의 중후반까지도 남자들의 포악함, 그 괴물성에 대해서만 집요하게 책임을 묻는 것 같은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책 후반부, 글의 흐름은 순식간에 자기 성찰로 전환되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비평할 수 있는 예술인지, 아니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사랑의 예술인지를 묻는다.


일부 (한국) 페미니스트 독자들이 공감할 수 없다고 하는 부분은 바로 여기, 레이먼드 카버에 대해 데더러가 다루면서부터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그가 한때 자기 가족에게 내비쳤던 괴물성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데더러는 자기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도 술에 의존하는 나쁜 습관이 있노라고 말이다. 타인을 향한 도덕적 평가를 시행할 때 우리 마음속에는 양심이 요란하게 굴러다닌다. ‘그렇게 하면 안 돼’라는 말을 할만한 자격이 내게 있는지? 저 사람의 도덕성과 내 도덕성이 정말 크게 다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데더러는 대중들 앞에 괴물성을 드러낸 예술가들을 이야기하다 문득 자신의 결점을 의식하자 그걸 감추는 게 아니라, 그에 대한 성찰을 했다. 내 안에도 자리한 이 도덕적 결함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데더러는 공감과 연대의 가치를 전파한다. 그는 안희제처럼 “나쁜 사람들을 참지 않고 바로 추방해 버리는 분위기”가 더 나은, 깨끗한 사회를 만드는지 의심을 표하며 괴물 같은 도덕적 결함은 사실 전혀 “특별하지 않”아 우리 모두 안에 내재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특별하지 않은 괴물성에 놀라 기겁하는 것이 아니라 저게 바로 인간이라는 복잡함을 이해할 때야말로 우리는 추방이 아닌 회복을 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데더러는 자기반성의 단계를 지나 다시 윤리적 소비자와 예술의 관계를 두 가지 측면에서 다루며 책을 끝맺는다. 먼저 그는 “문제를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것이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라며 윤리적 소비에 대한 강조가 실은 우리를 소비자의 역할에만 가둬둔다는 점을 짚는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소비를 윤리적 선택의 장으로 바라보지만 사실 정답은 이 안에 있지 않다. 우리의 판단은 우리를 더 나은 소비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광경에 갇히게 만든다.” 데더러에 따르면 기실 자본주의 안에서 우리 모두는 괴물이다. 소비자 개인의 선택에 주목함으로써 개개인에 대한 검열을 펼치는 것은 사회 전체의 윤리성을 높이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대중문화계와 사회가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도덕적 기준을 높이고자 한다면 윤리적 소비자 이외의 역할을 고심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 데더러는 결국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감정”, 즉 “사랑”이라 말한다. 당신이 “예술을 소비하는 방식은 당신을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않을 수 있지만 예술은 당신에게 사랑을 알려주고 당신의 세계를 넓힐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예술을 관람하는 자로서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당신은 사랑에 빠진 예술 작품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척하거나 사랑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H의 음악은 나의 예민한 감수성과 호응했고, 그를 좋아했던 감정 때문에 나의 십 대는 어쩌면 덜 외롭고 조금은 더 신났다. 이 추억을 내게서 도려내는 게 누구를 위함일까. 마찬가지로 데더러는 힘주어 말한다. “스티븐 프라이는 바그너를 사랑하고, 나에게 데이비드 보위를 들어도 되냐고 묻는 대학생들은 데이비드 보위를 사랑하고, 나는 폴란스키를 사랑한다. 이 사실들이 이상적이지도 않고 때로는 우울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진실임에는 틀림없다.”


작가의 말은 누군가에게 자기 합리화나 변명처럼 들릴 것이다. 이 글을 처음 읽을 때의 내가 그랬다. 하지만 고故 김새론 배우의 뉴스를 접하고 어쩐지 나는 이 책을 다시 읽게 되었다. 데더러가 이야기한 용서와 회복의 시간을, 그녀는 마땅히 누렸어야 했다. 하지만 불명예와 추방이 공론장의 대세가 되어버린 시점에서 이 어린 여성에게 기회가 다시 주어져야 한다는 목소리들은 너무 작았고, 또 편파적이라는 위험 때문에 일부러 무시되었다. 기회를 말하는 목소리들이 커지기 위해 공론장 한편에서 침묵하고 있던 나는 무얼 해야 했을까. 이에 대해 나는 완벽한 답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하지만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은 적어도, 누군가 버릴 수 없는 사랑을 얘기할 때 함부로 비웃지는 말자는 것이다.


작년 겨울, 광장을 가득 메웠던 응원봉 물결을 보며 들었던 생각이 있다. 저들은 모두 성공한 팬일까. 저 반짝이는 빛의 주인들 중 누군가는 분명 크든 작든 어떤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지는 않을까. 그럼에도 저 빛을 들고 있는 사람들은 그와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 위해 저곳에 나온 게 아닐까. 연대가 무엇인지, 더불어 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정의를 실천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본다. 하나 확실한 건, 정의감과 연대가 반드시 동떨어진 건 아니라는 게 이미 저 광장을 통해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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