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화 <포드 v 페라리>를 보면서 9년전 미국 디트로이트의 포드자동차 출장이 떠올랐다. 당시 디트로이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의 대량해고 사태와 겹쳐 공업도시 특유의 블루톤 이미지가 완연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디트로이트 시내로 진입하는 간선도로 주변에는 개인파산 상담을 안내하는 옥외 광고판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근처 트로이에 있는 소머셋 쇼핑몰 앞에선 한 종업원이 "부도 때문에 액세서리 제품을 최대 60%까지 할인해 준다"는 입간판을 들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2010년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공개된 신차(월드 프리미어) 수는 41개로 2009년보다 18% 줄었고, 빅3 중 크라이슬러는 마땅히 소개할 만한 신차가 없어 언론 설명회조차 열지 못했다.
그런데 글로벌 금융위기 때 사실상 파산 위기에 내몰린 GM과 달리 포드는 빅3 중 유일하게 버텨내며 2010년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요란한 신차 출시 이벤트를 벌였다. 포드는 나를 포함한 아시아 각국 기자들을 초청해 생산공장과 R&D 시설을 보여주었다.
그때 흥미로웠던 것은 포드가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을 보여주고 싶어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디트로이트 인근 디어본(Dearborn)의 헨리 포드 저택에 우리를 데려가 집안 곳곳을 안내하였다. 억만장자 포드의 저택답게 내부에는 극장과 더불어 수력발전소가 갖춰져 있어 조금 놀랐다. 당시 전기가 부족했던 디어본 주민들의 요청으로 포드가 자택에 발전소를 지었다고 한다. 일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는 설명.
굴뚝산업 시대, 자동차산업의 위상은 상당했다.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의 포니에 비견될 만한 포드의 '모델 T'는 미국인들의 마이카 시대를 가능케 한 동시에 미국 중산층을 탄생시키는데 일조했다. 이는 비싼 고급차 개발을 요구하는 주주들과 결별하고 편법으로 자신의 회사 지분을 늘리는 모험을 감행한 포드의 저돌적인 경영방식 때문에 가능했다. 영화 <포드 v 페라리>에서 제왕처럼 군림하는 포드 2세와 그에게 아첨하는 임원들의 모습은 이때 축적한 포드家의 높은 지분이 밑바탕되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마이카 시대를 연 포드의 '모델 T'. 위키피디아 제공
영화 <포드 v 페라리>를 보다보면 america first 비슷한 국뽕 느낌이 조금 있다. 헨리 포드 2세가 캐롤 셸비(맷 데이먼 분)를 창가로 데려가 자신의 디트로이트 공장을 가리키면서 내뱉는 말("2차 세계대전 때 저 공장에서 미군 폭격기 5대 중 3대를 만들었어. 자 전쟁을 시작하게!”)이 그렇다. 엔초 페라리의 독설에 가까운 모욕보다 유럽 자동차시장에서 인정받고 싶어한 포드의 개인적 욕구가 르망 24 출전으로 이어졌다는 평가가 있는 걸 보면 이 영화는 미국 vs 유럽 자동차 메이커 간의 자존심 싸움으로 볼 여지도 있는 것 같다.
p.s) 영화에서는 리아이아코카가 1966년 르망24 레이스 출전을 강하게 푸시한 걸로 돼 있다. 그런데 실제로 그는 1960년대부터 포드의 소형차 개발을 강조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엔진출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자동차 레이싱은 소형차 개발과 반대되는 측면이 많다고 할 것이다. 어찌됐건 세월이 흘러 글로벌 금융위기 유탄을 맞은 빅3의 선택은 소형차 개발이었다. 실제로 2010년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포드 측이 내게 시승을 권한 모델은 '퓨전 하이브리드'였다. 당시 포드의 기술개발자가 동승했는데, 그는 내게 시승 소감을 물으면서 “도요타 프리우스와 비교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이 야심차게 내놓은 신차의 경쟁차량이 무엇인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