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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운 Dec 30. 2019

광역시급 백제 도시는 왜 100년 만에 사라졌나?

한국의 폼페이 나성리유적 下

2010년 발굴 당시 나성리 유적 전경. 이홍종 교수 제공


나성리 백제시대엔 광역시급?


  백제시대 당시 세종시 나성리 도시 유적의 위상은 어느 수준이었을까. 도로부터 귀족 주거지까지 각종 도시 인프라가 갖춰진 정황을 볼 때 왕성(한성)에 버금가는 규모였다는 게 이홍종 고려대 교수(고고학)의 견해다. 백제가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를 단행할 때 나성리 지배세력 일부가 핵심 집단으로 참여했다는 학설도 이 도시의 위상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이홍종 교수는 “백제시대 나성리는 지금으로 따지면 광역시급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고 말했다.


  행정거점으로서 고대도시는 배후에 식량 생산기지 역할을 하는 농경마을을 거느리기 마련이다. 현대의 메트로폴리탄이 베드타운 기능을 하는 여러 배후도시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 것과 흡사하다. 나성리 도시 유적의 경우 배후에 기능별로 5개 마을과 긴밀히 연결돼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즉 △식량 생산기지 역할을 담당한 송담리·대평리 등 3개 마을 △물류 유통을 맡은 석삼리 마을 △식량 저장기지였던 월산리 황골마을 등이다.

광주 동림동 도시유적. 공간구조가 나성리 유적과 유사하다. 오마이뉴스 제공


  이 중 석삼리 마을의 지배집단이 백제 중앙과 연결고리를 기반으로 도시건설을 주도했을 것이라는 게 발굴단의 추정이다. 이들이 나성리에 도시를 세운 것은 강변에 인접해 수운(水運)을 통한 물류가 가능한 입지조건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2003~2005년 발굴 조사된 광주 동림동 도시유적 구조가 나성리 유적과 닮은 점이 주목된다. 5~6세기 조성된 동림동 도시유적에서는 98개 주거지와 64개 창고시설, 저장 구덩이, 도로, 우물, 수로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도시 중심부에 길이 50m, 너비 12m의 구역을 별도로 획정해 지배층의 거주공간을 마련하였다. 이곳도 나성리 유적처럼 영산강 유역에 자리 잡아 물류 거점으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높다. 학계 일각에서는 나성리와 동림동 유적 모두 백제 중앙이 건설과정에 개입한 지방도시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경북 경주 건천읍 방내리·모량리 일대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 도시유적. 도로에 의해 사각형으로 구획된 공간이 보인다. 연합뉴스 제공


  신라에서도 왕경이 아닌 도시유적의 존재가 2013년에 드러났다. 왕경 바깥인 경주 방내리와 모량리에서 도로와 우물, 담장, 건물터, 제방 등 통일신라시대 도시유적이 발견된 것. 도로에 의해 사각형으로 구획된 방제(坊制)가 신라 왕경 이외의 도시에도 적용된 사실이 처음 확인되었다.


나성리 유적은 왜 사라졌나


  학계는 5세기에 건립된 나성리 도시유적이 약 100년가량 존속한 뒤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6세기 중반 이후의 유물이나 유적이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 쇠락의 원인으로는 고구려의 남진과 자연재해 등이 거론된다. 이홍종은 “인근 곡창지대인 대평리 유적에서 강물이 범람한 흔적이 발견됐다”며 “홍수로 도시의 식량 기반이 사라진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도시가 쇠락한 뒤 나성리는 한동안 고구려의 군사기지로 사용되었다. 이곳 토성에서 고구려의 흔적이 발견된 것. 5세기 고구려가 남진을 본격화하면서 충청권까지 공격한 사실이 나성리 유적에서도 확인된 것이다.


나성리 출토 토기들 가운데로 현존 最古의 장고(요고)가 놓여있다. 이홍종 교수 제공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장고


  나성리 유적에서는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장고(요고)가 나왔다. 흙으로 구운 것인데 5세기대 유물로 추정된다. 인도에서 불교음악을 연주하기 위한 악기로 만들어진 요고는 중국을 거쳐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까지 전해졌다. 백제가 중국 남조를 통해 요고를 들여왔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박순발 충남대 교수의 연구논문에 따르면 나성리 출토 요고는 본래 길이가 45㎝로 가운데가 잘록한 원통형이다. 5세기대 요고 실물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확인된 적이 없다. 앞서 하남 이성산성 등 2곳에서 통일신라시대 요고가 발견되었다. 고려시대 유적에서는 도자기로 만든 요고가 나왔다.


나성리 유적 일대의 현재 모습. 사진 속 금강을 통해 백제시대 목선이 드나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2019 김상운


백제 목선 드나들던 세종시


  이홍종은 1958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일본 규슈대에서 야요이시대 농경유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많은 국내 고고학자들이 ‘삼불 키즈’인 것처럼 이홍종도 삼불 김원룡 서울대 교수의 영향으로 고고학도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고교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린 삼불의 글(‘한국의 미를 찾아서’)을 읽고 고고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고고 발굴현장에 발을 들인 것은 군 제대 직후 복학생 신분으로 참여한 충주댐 수몰지구 발굴이었다. 마을회관 바닥에 라면박스를 깔고 자면서 온종일 발굴에 매달렸다. 이홍종은 “2주 정도 지나고 학부생 7명 중 나만 현장에 남았다. 발굴 작업은 고됐지만 적성에 맞았고 무엇보다 재미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학부를 마친 뒤 처음엔 일본 게이오대로 유학을 갔지만 한일 농경문화 비교 연구에 매력을 느끼고 이 분야 권위자인 오카자키 케이 교수를 찾아 1985년 규슈대로 옮겼다. 이후 그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논농사 유적인 이타즈케(板付)를 직접 발굴하면서 한일 농경유적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나성리 발굴에서 아쉬운 점을 묻자 그는 “발굴현장에서 50m만 더 나가면 백제시대 선착장 유적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당시 발굴 중인 유적이 강가로 연장되는 양상이었는데 발굴허가 범위를 넘어 추가로 조사하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지금은 행정도시가 된 세종시에 1600년 전 백제 목선들이 금강을 통해 드나들며 사람과 물자를 활발히 실어 나른 셈이다.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에서 고고 유적 발굴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nWqng3MswATmWIBUDTWdB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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