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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캣테일 Aug 16. 2019

수능 4등급 박사 과정 유학생

긴 학력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제 강점인걸요

"제 학력은 꽤 긴데... 괜찮으시겠어요?"

  어느 학교를 나왔냐는 질문에 내가 되받아치는 말이다. 상대방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내 학력을 보고 그 범상치 않음(?)에 살짝 미소를 띤다. 참 다사다난한 20년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내 공부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지만 이 자리까지 오는 데에는 정말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에 있는 정규 교육과정을 거의 다 밟았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한다. 유치원을 나온 후 국민학교로 입학하자마자 그 이듬해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뀌었고, 다른 아이들과 다른 중학교로 홀로 배정되었고 그 중학교에서도 친구들과는 다른 고등학교로 배정되었다. 이내 전문대에 들어가 공부를 했고 나라의 부름을 마친 후 전문대를 졸업하여 잠시 일을 하면서 사이버대학을 다녔다. 같은 해 그만두고 다시 편입 시험에 몰두하여 4년제 대학에 들어갔고, 그 이후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후 일본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지금은 일본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꽤나 돌아온 듯한 느낌이 없지 않지만, 이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면 뿌듯하기도 하다.

나는 공부에 크게 관심이 없었고 도리어 공부를 증오(?)했다

  나는 사실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공부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떨었고,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내가 관심 있는 분야에 더 몰두하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참 웃긴 것이, 그럼에도 내가 밤새도록 게임을 하거나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놀러 다니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했던 걸까? 나 스스로도 의문이 들지만, 아무튼 공부와는 일찍이 거리를 두었다는 사실만큼은 명백한 사실이다. 특히나 싫어했던 과목은 수학과 과학이다. 참 웃긴 것이,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는 국어/영어/수학 성적을 기준으로 일반반과 심화반으로 나뉘어 수업을 들었는데, 국어/영어 성적은 좋아서 수학까지 졸지에 심화반용 수업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게 나의 수학 공포증(?)을 더 심화시켰다고 생각한다. 제아무리 들여다봐도 답이 나오지 않거늘, 눈대중으로 선분의 크기를 알아내거나, "수학 문제 답은 -1, 0, 1 중 하나야"라는 말만 믿고 대충 감으로 때려 맞춘 적도 적지 않다. 이렇게 수학을 일찌감치 포기했음에도 모의고사나 수능에서 수학 4등급을 줄곧 유지했던 것을 보면, 참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뿐이다.


  전과목 3~4등급(일본어만큼은 1등급)으로 통학 가능한, 게다가 일본어과가 설치된 대학은 그렇게 많지 않았기에, 나는 수원에 있는 모 전문대에 입학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2년 내내 과 수석을 했고 등록금을 한 번도 내지 않았으며 마지막에도 전체 수석으로 졸업했다. 내가 특히나 좋아하던 일본어였기에 동기부여가 제대로 되었던 모양이다. 그와 동시에 모종의 이유로 편입 공부도 병행했는데, 아버지가 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시고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기에 편입을 단념하게 되었다. 나는 곧바로 일을 구했고 공부에 미련이 남아 방송통신대학교에 편입했다. 하지만 일과 공부 양립은 역시나 힘들었고, 게다가 방송통신대학교는 완벽한 <자율 학습>이 전제조건으로 깔려 있었기에 제아무리 독한 나라고 해도 과제나 수업, 시험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이러한 경험에서 나는 지금도 방송통신대학교를 졸업한 분들을 존경한다. 이 분들은 무엇을 해도 될 분들이다. 아무튼 나는 결국, 같은 해 9월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상담을 한 후 일을 그만두고 간간히 알바를 하면서 다시금 편입 공부에 매진했다. 이듬해 나는 편입에 성공했고 3학년 4학년 내내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서울에 있는 대학원에 입학하여 내 실력을 더 키웠고 한 번의 낙방 끝에 약 17:1의 경쟁률을 뚫고 일본 국비유학생 제도에 합격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공부에 관심이 없던 내가 평생 연구해야 하는 길을 걷게 된 것이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10년 전의 내가 보면, 고개를 갸웃할 것이 분명하다.


나를 공부로 이끈 최고의 사람과 최악의 사람

  고등학교 시절 내내 공부를 잘하던 친구가 있었다. 서울대 법대에 단번에 들어가 많은 글을 남긴 그 친구는 다소 유별난 성격이었지만 선생님들의 지도와 상담, 그리고 나를 비롯한 몇몇 친구들과 함께 지내며 많이 둥글둥글해졌다. 그 친구가 어떤 이유로 입원을 했었던 적이 있었고 나는 한 친구와 함께 그 친구 병문안을 갔다. 반갑게 맞이해주던 그 친구는 학교 이야기가 나오자 진지하게 문득 이런 말을 했다.


"너는 전문대에 머물러 있을 사람이 아니야. 너는 공부를 더 잘할 수 있어. 그러니 열심히 노력해 봐"


  과체중과 눈이 굉장히 좋지 않아 공익근무요원으로 배치된 나는, 그중 가장 악질(?)이라는 한 선임의 놀림감이 되었다. 그 이유인즉슨, 무슨 학교를 다니냐는 말에 내가 학교 이름을 말하기 전에 "수원에 있는..."이라고 덧붙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0년이 지난 이제야 하는 말인데, 당신, 참 아니꼽기 그지없었고 꼰대 그 자체였어. 지금이라면 선후배 따지지 않고 뺨이나 한 방 시원하게 갈겨주고 싶을 정도로 나를 무시하고 비웃었겠다. 그놈, 아니 그 사람이 나이가 많다고 어른이 아니라는 걸 알게 해 준 기념할 만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공부를 잘하던 친구의 격려와 나의 자존심에 흠집을 낸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공부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나는 분노나 복수(?)를 위해서라면 한없이 독해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살면서도 몇 번 느꼈기에, 사실상 후자가 내 공부욕에 기름을 들이부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복수를 위해서라면 말 그대로 <악독해> 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무엇이든지 열심히 했다. 체력을 키우기 위해 헬스를 다니면서 살을 50킬로 가까이 뺐고, 쉬는 시간이나 쉬는 날에는 편입 영어를 중점적으로 공부했다. 공익 근무가 끝나고 이듬해 전문대로 복학하면서, 나의 이중생활(?)은 더욱 가혹해졌다. 아침 5시에 일어나 학교에 도착하면 7시 반이 채 되질 않는데, 도서관에 들어가 편입 인강을 들으며 홀로 편입 문제를 풀었다. 수업 중간중간에도 영어 단어를 체크했고, 점심도 시간이 아까워 샌드위치를 사 먹으며 도서관에서 홀로 영어를 공부했다. 등하굣길 지하철 안에서도 친한 형과 헤어지고 나면 단어를 외우거나 공부했던 내용을 복습했다. 그리고 카페에 앉아 단 음식과 커피를 하나 시켜두고 밤 11시까지 또 인강을 듣고 복습을 하고 다음날 할 내용을 예습했다. 이때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암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해 계셨던 터라, 아버지를 뵙기 위해 병원에 찾아가 줄곧 공부를 하기도 했다.

  공부와 거리가 있던 내가 이렇게 한다는 것 자체가 참 기적적이었는데, 그만큼 내가 절박하기도 했고 자존심에 흠집을 많이 입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1년 가까이하다 보니 운동을 쉬었음에도 살이 쭉쭉 빠졌고 탈모도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들과 맞바꾸어 <공부하는 법>을 체득하게 되었고 공부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공부하는 방법을 아니 더 이상 공부가 괴롭지 않았다. 약 1~2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진정한 공부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나만의 방법을 찾아내었으며 효율을 200%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공부를 잘하니 만사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참 아이러니하게 공부가 모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 세상이, 공부를 잘해야 이런 것들을 깨달을 수 있으며 원하는 꿈을 펼칠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다는 사실에 다소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공부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이유는, 크게 말해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을뿐더러 교육 구조 자체가 암기 위주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나는 어떤 수학 공식이 있으면 그것을 해체하고 그 요소들을 하나하나 이해한 다음 나 나름대로 조립하여 다시 외우는 방식을 선호하는데, 적어도 내가 학교를 다닐 당시에는 그럴 시간을 주지 않았다. 무조건 외우는 것이 선행되었고 그 이론은 아주 짧게만 다루어졌다. 납득도, 이해도 가지 않던 내가 그것을 분해하려 해도 공부해야 할 과목이 하나가 아니었던지라 자꾸만 뒤로 밀려났고, 내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사이에 이미 학교 진도는 저 앞까지 가 있었다. 그것에 따라가지 못하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을 놔버렸다.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어떤 동기가 필요했는데, 당시 사회를 잘 알지 못하던 나는 일본어만 잘하면 이런 것들쯤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굳이 그것을 따라가야 할 동기도 부여되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공부 방법을 체득한 지금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하지만 초반에 말했듯, 저 산전수전이 지금의 나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면, 그 과정이 없이 한 번에 오른 나를 과연 지금의 나와 동일해질 수 있을까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분명 있을 테니까요

  내가 글을 쓰려고 마음먹은 것도, 이 모든 교육과정을 조금씩 겪고 성적도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는 반복 했으며 공부를 잘하느니 못하느니 하는 상반된 평가를 받으며 자라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조금이라도 쉽게, 조금이라도 재미있게 지식을 전파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연구도, 다소 딱딱하거나 난해한 고전 등을 다루기보다는 현대의 문화, 특히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만화 등을 통하여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연구 분야에서 다소 무시를 당했던 이런 자료가 최근 <서브 컬처>라는 카테고리로 묶여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나의 연구도 조금씩은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대학원 입학 당시 이러한 자료들을 쓴다는 사실에 다소 죄책감(?)을 가지기도 했는데, 지금은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


  일본 국비유학생 선발 면접 당시 면접관이 한 질문이 문득 생각이 난다. 전문대를 나오면 교수가 되기 힘들고, 되기 위해서는 정말 기발한 연구 분야를 개척하거나 많은 성과를 올려야 하는데 그래도 괜찮냐는 말을 했다. 예상 질문에는 없던 터라 잠시 당황했지만 나는 숨을 들이쉬고 솔직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나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오만하기도 한데,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하는 것일 테니 나는 이 대답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 실제로 이 대답 이후 면접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진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원서에도 기재되어 있듯 제 학력은 꽤 긴데... 그것이 도리어 강점이 되지 않을까요.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상당히 돌아온 케이스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실력은 떨어질지언정 그 과정에서 얻은 지식이나 지혜는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문학 연구는 단순히 지식만으로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가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보고 느끼고 분석할 것인지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전문대를 나와 많은 교육과정을 거친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저의 오리지널리티가 될 것입니다. 전문대를 나왔다는 이유로 포기하면, 인문학 입장에서는 귀중한 관점 하나를 잃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제가 할 수 있는 연구를 끊임없이 고집할 것이며...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뒤늦게 공부에 눈을 뜬, 혹은 전문대를 나왔다는 이유로 공부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없어질 테니까요."


  가능한 나는 다소 딱딱한 주제의 글을 나의 관점에서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논문에도 반영되고 논문스럽지 않다는 말도 종종 듣곤 하지만 (말을 풀어쓰고 예시를 많이 들다 보니 글이 길어지는 효과도 있다), 그것도 지식에 대한 나의 이러한 관점에서 나온 부산물이라 생각한다. 앞으로 얼마나 다양한 분야의 글을 얼마나 쓸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한 많은 것들을 가능한 쉽게,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생각만큼은 매우 확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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