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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캣테일 Aug 16. 2019

누가 말했어? 왜 그렇다고 생각해?

인문학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을 찾아서

당신이 가진 지식과 정보를 의심해 본 적이 있는가?

  SNS를 하다 보면 온갖 정보와 만나게 된다. 언론 기사를 링크한 것도 있고 그것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인 것도 있으며 어떠한 통계를 가져와 자신의 의견을 논한 것도 있다. 하지만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누군가에게 들은 정보>이다. 이것이 악질적인 것이 정보원을 파악하기 어렵기에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파악하기가 어려울뿐더러 지극히 그 사람의 관점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내용이 자극적일수록 사람들의 반응은 뜨겁고, 트위터로 따지자면 <리트윗>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그 정보가 특정 피해자와 피의자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 피의자는 특정 인물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살면서 들은 것보다 더 많은 험담을 듣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정보는 일방적인 관점에 의한 것이거나 심한 경우 주작(소위 자작극) 일 경우도 있는데, 그렇게 그 정보가 올바르지 않은 것으로 밝혀지면 사람들은 입을 싹 닦고 또 다른 자극적인 정보를 찾아 다른 사람을 힐난한다. 정보가, 혹은 자신이 가진 지식이 올바른지 아닌지 의심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이 아는 사람 (혹은 저명한 사람)이 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스펀지처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으로 정보를 언제 어디서든 가볍게 열람할 수 있게 되면서, 소위 헛똑똑이가 늘어나고 있다는 우려가 많이 나오고 있다. 정보가 정크 푸드처럼 가볍게 소비되면서 그 본질을 이해하지 않고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더 크다) 그 순간의 쾌락을 위해서만 존재하며, 그 사건이 끝나면 그와 그와 관련된 지식을 싹 잊어버린다. 인터넷 상에서 언쟁이 벌어지면 대다수 사람들은 위키나 인터넷을 뒤져 자신의 의견이 얼마나 올바른지 증명하려 한다. 그렇기에 언쟁은 끝이 나지 않고, 결국은 인신공격이나 감정싸움으로 치닫게 된다. 그 누구도 본질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내가 옳다는 것만 증명하려 하기에 일어나는 문제인데, 더 큰 문제는 이게 <인문학의 기본>을 이해하려 하지 않기에 벌어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의 기본은 과연 무엇일까.


다양성과 인문학, 그리고 정보와 관점

인문학이란 사회 과학의 다른 측면으로, 말 그대로 인간과 사회에 관해 연구하고 고찰하는 분야이다. 인문학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관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수학이나 과학이 이상적인 인체 비율이나 색의 조합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면, 인문학은 그것을 마음껏 분해하고 조립하여 자신만의 개성을 표출한다. 인간의 관점을 마음껏 해체한 피카소의 그림을 보라. 상식적으로 인간의 앞모습과 옆모습을 동시에 보기엔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는 그것을 독창적인 표현 기법으로 표현했다. 이처럼, 인문학은 형체가 뚜렷하지 않고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사건을, 손으로 더듬어 가며 독창적인 스타일로 표현하는 학문에 가깝다. 이 말인즉슨, 인문학에는 어떠한 <결과>가 존재하지만 그 결과를 표현하는 기법은 매우 다양하며, 그 결과의 한쪽 측면만 표현하는 것도 가능하다.


  원기둥을 그린다고 생각해 보자. 나는 위에서 바라 보아 원을 그렸고, 친구는 옆을 바라 보아 사각형만 그렸다. 누가 옳다고 할 수 있는가? 원기둥의 모습을 아는 우리가 보았을 때 이 논쟁은 실로 무의미한 것이다. 맹인이 생전 처음 만나는 코끼리의 다리, 몸통, 코만 만지고 코끼리의 모습에 관해 논쟁을 벌이는 우화가 참으로 우습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일부분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오면, 인문학이 참으로 추상적인 학문이라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관점의 다양성은 인문학에 있어서 양날의 칼과 같은데, 즉 일부분을 과장하여 그것이 마치 전체인 것처럼 주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통계를 자신의 입맛대로 혹은 유리하게 바꾸거나 밝혀진 사실의 일부만을 강조하여 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


  인문학의 중요한 또 하나의 덕목은, 이러한 관점의 다양화로 일어나는 폐해를 막기 위한 제동 장치, 즉 <비판적 사고>이다. 하나의 관점으로만 파악하면 반드시 왜곡이 일어난다. 반드시 복수의 관점으로 동시에 바라보아야만 그 사건의 올바른 실체를 파악할 수 있으며, 보다 냉정한 판단이 가능해진다. 위에서 말했던 <원기둥>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원>을 본 사람, <사각형>을 본 사람, 서로 원기둥은 <원> 혹은 <사각형>이라는 말만 주장하면 결론이 나겠는가? <원기둥>의 본질에 다가갈 수조차 없다. 이때 필요한 것은, <원>과 <사각형>을 보고 <왜 같은 사물을 보고 다른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가>를 생각하여, <원기둥>에 가장 근접한 모습을 유추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해진 답이 없는 <인문학>은 현재의 교육 제도와는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인문학적 지식을, 시사 상식이나 암기 과목 정도로 치부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얼마 전 모 대기업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뽑기 위해 젊은 면접관들을 채용하며 <인문학적 지식>이 중요하다고 한 취지의 글을 보았다. 여기서 인문학적 지식이란 철학가의 이름이나 명언, 시사상식의 정의, 책의 내용, 세계정세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저 대기업에 제대로 된 인문학적 소질을 갖춘 사람이 들어갈 확률은 극히 낮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처럼 고정된 지식이나 정답을 추구하는 현재 교육 제도에서 인문학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정답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평가 기준을 세우기가 애매하고, 그렇기에 <모범 답안>이라는 것이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모범 답안>만이 정답으로 치부되어 또 다른 관점이 <다른 것>이 아닌 <틀린 것>이 되었다. 결국 <인문학>은 절대적인 답을 가진 무언가로 변모하게 되었고, 그것이 현재의 세태를 보여주기에 이른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묻는다. 지식과 정보를 의심해 본 적이 있는가?

  인문학엔 결론이 존재할 뿐 그 과정은 상당수 존재한다. 이는 내가 취한 관점에서 바라본 생각이나 지식뿐 아니라 정보가 틀릴 수도 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아이러니하게 이것이 인문학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자 알파와 오메가를 이루는 요소이다. <더닝-크루거 효과>라는 현상이 있다. 특정 지식에 무지한 사람은 자신이 그 분야에 정통하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크고, 특정 지식에 정통한 사람은 자신이 그 분야에서 무지하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크다고 하는 현상이다. 자신의 생각이 무조건 옳고 다른 것은 틀린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든다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 내부를 들여다봐야 할 시간이다. 몇 사람의 정보, 몇 개의 표면적인 정보만으로 구성된 <확신>은 명확한 판단을 방해하고 자신이 그 분야에 정통하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자, 당신이 가진 지식과 정보를 의심해 본 적이 있는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의견을 보고 들으며 그 진정한 모습이 무엇일지 한 번쯤 생각을 해야 할 때이다. 만일 그런 과정을 거쳤다면, 자신이 어떠한 근거로 그러한 지식과 정보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타인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문학적 지식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며, 진정한 자신의 지식이자 정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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