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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캣테일 Aug 17. 2019

<감히>의 캐릭터 언어학

가상의 부잣집 어머님들은 왜 <감히>라는 말을 쓸까


강렬한 <부잣집 어머님> 캐릭터

 요즘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2000년도 초반만 하더라도 드라마는 매우 뻔한 스토리 구조를 지녔다.

  특히나 MBC나 KBS에서 저녁 시간에 방영했던 연속극은 드라마 제목이나 배경, 등장 배우와 초반 스토리만 바뀌었을 뿐 중후반부를 가면 어쩜 약속이나 한 듯 비슷한 스토리가 이어졌다. 같은 작가가 쓴 드라마도 아니건만 이런 스토리가 이어질 수밖에 없던 것은, 장기화에 따른 소재 고갈과 빡빡한 스케줄, 배우나 스텝 그리고 어른들의 사정(?)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걸 보면 드라마 관계자 분들도 참 고생이 많다 싶다.

  으레 이런 드라마에는 부잣집 아들이나 딸, 그리고 평범한 중산층의 아들이나 딸이 사랑에 빠지고 양가 부모님이 그 결혼을 반대하는 장면이 참 많이 나오곤 했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인상을 확 사로잡았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부잣집 자제의 어머님 캐릭터이다. 부잣집 어머님들은 약속이나 한 듯 결혼을 반대하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이렇게 소리치곤 한다.


"감히 우리 아들/딸을 만나? 당장 헤어져!"

"네가 감히 엄마한테...!"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아이고... 아이고...!"


  이런 말을 하면서 뒷목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부잣집 어머님이라는 캐릭터는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대사뿐 아니라 그 용모나 집안 풍경도 쉬이 상상할 수 있다. 집인데도 늘 화려한 옷을 입고 있으며, 겨울이라면 긴 모피 코트와 선글라스를 쓰고 하이힐을 신고 외출하기도 한다. 하늘하늘거리는 화려한 레이스 잠옷을 입고 편두통에 머리를 보여잡으며 늘 물통이 구비되어 있는 1층 부엌에 내려와 약을 먹는다. 오죽하면 2009년경 MBC의 <무한도전>에서 방영했던 <쪽대본 드라마 특집>에서도, 부잣집 어머님 역할을 맡은 정준하 씨가 진한 화장을 하고 모피코트를 걸친 상태에서 "가난한 서민 주제에, 감히 우리 아들을...!"이라는 말을 한다. 예능인지라 다소 과장된 측면도 있지만, 전반적인 이미지는 드라마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2019년 현재는 넷플릭스를 비롯한 플랫폼의 다양성과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의 등장으로 차별화된 드라마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오는터라 이렇게 고전적인 구조를 지닌 드라마를 도리어 많이 보지 못하므로 고개를 갸우뚱하는 독자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잣집 어머님>에 대한 이미지는 어렴풋이나마 우리 기억 속에 남아있으며 대다수가 공유하고 있다. 짧은 시간에 <부잣집 어머님> 캐릭터를 그려내라고 한다면, 대부분이 저런 고정관념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설령 이러한 고정관념, 즉 스테레오 타입(stereotype)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처음에 떠오른 저러한 이미지를 떨쳐버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캐릭터를 구성하려 노력할 것이다. 이처럼 캐릭터는 우리의 사고방식에 강력하게 각인되어 있다.


캐릭터를 나타내는 말투, <역할어 (Role Language)>

  이처럼 특정 캐릭터는, 용모와 말투가 합쳐져 우리 머릿속에서 하나의 탬플릿처럼 구비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말투, 즉 언어 측면을 뚝 떼어서 말한 저명한 학자가 일본 오사카 대학의 긴스이 사토시 교수이다. 긴스이는, 소설이나 영화, 만화, 드라마와 같은 가상의 세계는 현실과는 다른 언어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각 언어 요소는 특정 인물(캐릭터)을 나타내는데 특화되어있는 경우가 많다고 하며 이를 <역할어(Role Language)>라는 용어로 정의하였다. 말투만 들어도 어떤 역할을 하는 인물일지, 성격은 어떨지, 또 대략적으로 어떤 용모를 하고 있을지를 잘 떠올릴 수 있다면 그 말투는 <역할어> 도수가 높은 말투라고 할 수 있다. <역할어>는 일본어에 특화되어 있으며 이것은 일본이 캐릭터 강국이라는 이야기와 이어지지만, 영어나 한국어에도 약하게나마 역할어가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모두에 말한 부잣집 어머님 캐릭터이다.


<감히>라는 단어가 나타내는 캐릭터

  부잣집 어머님 캐릭터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투는, 물론 교양 있고 나긋나긋한 말투도 있겠지만, 이내 카랑카랑하게 소리치는 <감히>라는 단어에 있다고 생각한다. 대게 자녀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때, 혹은 자녀와 결혼하려는 건방진(주제넘은) 인물에게 사용하는 이 단어 하나에, 우리가 아는 <부잣집 어머님>의 중심적인 성격이 들어있다고 하면 어떨까?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려 있는 <감히>의 정의를 보도록 하자.


1. 두려움이나 송구함을 무릅쓰고

2. 말이나 행동이 주제넘게


  보통 <부잣집 어머님>들이 쓰는 <감히>는 두 번째 의미와 상통한다. 주제를 넘는다는 말은 즉 상대가 당연히 자신의 아래에 있으며 통제하에 있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동등한 사람에게 <네 분수를 알아야지>라는 말을 들으면 울컥하게 되는 이유도, 저 말에는 <난 내 분수를 알고 있는데 넌 주제넘게 그게 뭐니?>라는, 다소 상대를 얕보는 뉘앙스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설령 그 말을 한 사람에게 의도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 말을 입에 담은 순간 그런 의도가 청자에게 전달되게 된다.

  이처럼 <감히>는 <상위-하위>라는 권력관계를 구성하게 되고, 이걸 <부잣집 어머님>에게 대입해본다면, <부잣집 어머님>은 자녀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며 당연히 자신의 통제하에 있어야 하는 존재로써 여기고 있는, 다소 이기적이고 자존심 강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설명할 수 있다. <감히>는 수직적 권력 구조가 현저하게 드러나는 경우에는 화자의 권력이나 실세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지만, 부모-자식 간의, 수직적 관계로 파악하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는 관계에서 드러나게 되면 화자의 오만함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감히>는 사극에서도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이며 특히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 화를 낼 때 많이 사용하곤 한다. "감히 내 명령을 거역하느냐!"란 말을 하는 인물에게는 일정 수준의 신분이 있으며 권력을 휘두르는 경향이 있는 캐릭터가 자동으로 연결되게 된다. 이처럼 <감히>는 기본적으로 상위-하위라는 권력 구조가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첫 번째 의미, <두려움이나 송구함을 무릅쓰고>는 그 의미에서부터 <상위-> 하위>라는 구조라고 하기엔 다소 어색한 뜻이 부여되어 있다. 다시 사극을 예로 들자면, "전하, 제가 감히 말씀 드리 거 온데..."라는 대사가 있을 것이다. 본디 말이나 행동의 강제력은 상위자-> 하위자로 흘러내려가게 되며 하위자가 상위자에게 명령을 하거나 하사된 명을 거역하는 것은 하극상이라는 죄(?)로 치부되곤 한다. 사극 등에서 저런 대사는 하위자가 목숨을 걸고 의견을 피력할 때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본래는 하위자로써 당신의 위에 서면 안 되지만 제 목숨을 걸고 제가 감히 당신에게 명령을 하겠습니다>라는 강한 의지 표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즉, <감히>의 첫 번째 의미도 결국 힘의 방향이 달라질 뿐 내포되어 있는 <권력이나 힘의 차이>와 <강제력>은 동일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실>과 <가상>의 분리

  이것들을 종합하면, <부잣집 어머님>은 오만하고 자존심이 강하며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캐릭터이며 그것은 <감히>라는 단어를 통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감히>는 사극 등에서도 권위를 드러내는 말로 쓰이곤 하는데, 그것이 부잣집 어머님의 중심적 성격과 일맥상통하는 경우가 많다. 자존심이 강하고 오만한 성격은 언어 외적 요소로도 나타나곤 하는데, 보통 명품을 들거나 상대방의 얼굴에 물을 뿌리는 등, 어떻게 해서든 상대를 깎아내리려는 행동으로 드러나곤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상 세계>에서의 이미지일 뿐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늘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캐릭터는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일종의 고정관념과 연결되어 나타나곤 하는데, 이것이 그러한 특성을 가진 현실의 사람들을 판단하는 잣대로 이용되지 않도록 늘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역할어> 정의에서 <현실과 가상의 말투가 다르다>는 점을 굳이 말한 것도, 이러한 부작용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부잣집 어머님이 저런 성격이나 말투를 사용하진 않는다. <부잣집 어머님>이 아닌 우리 주변만 보더라도, 모든 친구들이나 상사, 동료, 선생님들의 성격은 전부 제각각이며 개성이 있다. 평소 까불거리던 친구가 선생님이 된다고 어느 순간 갑자기 엄격해지는 것도 아니며 나이가 든다고 상사처럼 권위 있는 말투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일률적인 인물 판단은 드라마나 애니메이션, 게임, 만화를 비롯한 <가상 세계>에서, 재빠르게 캐릭터를 구축하게 판단하게 하려는 탬플릿으로 이용될 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현실에서 <감히>라는 말을 쓰면 어떨까? 현실과 가상이 다르니, <감히>라는 말을 통해 드러나는 캐릭터도 달라질까? 이런 의문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우리가 생활에서 <감히>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당장 어제, 그제, 오늘, 지난주 <감히>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이 있는가? 사용하더라도 말투마다 쓴 적이 있는가? 많지 않을 것이다. 만일 썼다고 하면 특이한 상황이거나, 혹은 그 말을 들었다면 그 말을 한 사람이 상당히 특이한 인물로서 각인되어있을 것이다. 이처럼, 현실과 가상의 언어 양상은 다르다. 그러니, 우리도 <가상>과 <현실>을 분리하여 파악하고 그 스테레오 타입이 현실로 흘러나오지 않게끔 노력해야 한다. 반대로 당신이 <가상>에서 오만하고 권위적인 캐릭터를 표현하고 싶다면, 그 혹은 그녀에겐 <감히>라는 말을 사용하게 만들어보면 어떨까. 그 단어를 말하게 한 것 만으로 <오만>과 <자만>이라는 성격이 붙기 쉬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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