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비지원 호주 한 달 살기

by 캐서린의 뜰


국비지원 무료교육 플래카드를 볼 때마다 저건 누가 어떻게 받는 혜택일지 궁금했다. 취업을 준비 중인 혹은 이직을 준비 중인 청년들이겠지, 경력단절 n년차인 나에겐 해당 사항이 없겠지, 국가에 세금은 꼬박꼬박 내고 있지만 국가가 소수에게 지원하는 혜택은 찾아서 써 본 적이 없던 나는 바람에 파닥거리는 플래카드에 걸쳐둔 시선을 이내 거두었다. 퇴직 후 그 흔한 실업급여조차 탈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국비지원 교육은 무슨.


그런데 양육수당에 이어 등장한 아동수당은 대한민국 국적을 갖는 모든 아동이라면 받는 제도였기에 관공서를 들락날락해야 하는 노력 없이도 통장에 매월 십만 원이 꼬박꼬박 들어왔다. 물론 친권자인 남편 명의의 생활비 통장에 들어왔던 터라 애호박이나 콩나물 같은 식재료를 사는 데 썼을 수도 있고, 어떤 달은 큰 아이 유치원 원비에, 또 어떤 달은 중화요리 외식비에 야금야금 들어갔을 수도 있었겠다. 그러다 작은 아이의 양육수당과 아동수당이 함께 들어오면서 어느 날 문득 이 돈을 이렇게 쓰면 안 되겠단 생각이 스쳤다.


캐나다에서 우리 아이와 같은 나이, 같은 성별의 두 아이를 키우는 후배와 어느 날 우리 5년 후엔 애들 데리고 호주에서 만나자는 지키지 못할 것 같은 약속을 하고, 매달 각자 5만 원씩 비행기 값을 모으기 시작한 지 1년쯤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실현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그렇게 꿈이라도 꿔야 지난한 육아의 시간을 버텨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5만 원씩 5년이면 비행기값 300만 원은 모이는데, 막상 여타 경비가 없으니 아이들 양육수당과 아동수당을 합친 30만 원을 3년간 모아 천만원을 만들자는 생각을 그때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나와 아이들의 한 달 살기의 단초를 마련했다.


국가 지원금이 쌓이는 동안 구체적으로 한 달 살기를 꿈꿔보거나 아이와 호주에 있는 나를 그려보는 일은 없었다. 너무도 아득한 미래였고, 막연한 동경이었다. 많은 경우 삶은 내 의지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기에 기대하는 바가 크지 않았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내가 전심으로 바라는 일일수록 늘 어긋나거나 종국엔 번번이 실망하곤 해서 굳이 손꼽아 기다리지 않았다. 다만 매달 30만 원이나 되는 국가 지원금을, 육아가 힘에 부쳐 그날그날 테이크아웃 커피 한 잔을 사 마시는 낙으로 버티는 데 쓰고 싶지 않았을 뿐. 잡히지 않는 꿈을 멀찌감치 떨어트려 둔 채로, 그래도 언젠가 가 닿을 수 있으리란 여린 희망 하나를 품고서 근근이 살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그때의 나는 그랬다.


그로부터 7년 후,


시작부터 심란스러웠던 10시간 반의 인천-시드니행 비행기에 두 아이와 나는 몸을 실었다. 연착으로 악명 높은 저가 항공사인데 정시에 출발하고 순항해 심지어는 한 시간 먼저 도착했다. 이착륙이 너무 매끄러워 나와 아이들은 기장님의 실력을 찬탄해 마지않으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시드니-멜버른까지 한 시간 반의 국내선 비행이 더해져, 24시간에 가까운 길 위에서의 시간이 무탈하게, 생각보다 순조롭게 이어졌다.


공교롭게 우리가 한국을 떠나는 날이 12월 29일이었다. 활주로 위에서 허망하게 생을 마감한 그분들을 위해 짧지만 깊게 애도하며 집을 나섰기에, 꼬박 하루 동안 몸을 뉘이질 못한 채 멜버른의 어느 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고 다리를 뻗어보는 12월 30일 저녁이 그래서 몹시도 감사했다.


오기 전부터 세관 신고 물품 작성에, 비싼 숙박료와 물가 걱정에 들뜨지 않고 내 마음은 마냥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림 일기장에 캥거루와 코알라를 그리고 호주가 어떤 설렘을 펼쳐줄지 기대가 된다는 글을 남긴채 곤한 잠에 빠진 작은 아이처럼, 나 역시 그저 내일은 멜버른의 거리와 골목이 날 어디로 이끌지, 우리에게 무엇을 선사할지, 너무 오랜동안 간직해 꼬깃해진 마음을 보물지도를 펼치듯 조심스레 펼쳐 보아야겠다며 단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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