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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서린의 뜰 Oct 30. 2024

초등 한 달 살기 5개년 계획

쇄국주의자 남편에 맞서다 - 아동수당, 유치원비, 학원비 영끌하기


시간을 거슬러 코로나가 우리를 습격하기 5년 전, 어느 날 저녁 뉴스를 보다 남편은,

“이것 봐, 우리나라 가계 부채가 1500조를 넘는데 너도 나도 해외여행을 가느라 혈안이야”라며 한소리 한다.

남편의 생각에 어느 정도 동조를 표하다 말미에,

“그래도 우린 적어도 빚은 없으니까 가도 되지 않겠어?(즉, 나도 가고 싶다)”라고 조심스레 물었더니,

“우린 여행 갈 돈은 없잖아”라고 깔끔하게 대화의 맥을 끊어버리는 그.


그렇다. 금융권, IT, 대기업에 종사하지 않은 공무원 남편의 외벌이 월급으로 네 식구 한 달 살기도 빠듯하다. 매달 고정 지출을 빼고 남은 돈이라도 모아 둘째 돌 무렵에 제주도라도 가자는 소박한 계획을 세웠지만, 지난 2년간 모인 돈은 50만 원이 채 되지 않더라.


그날 밤, 자려고 누웠는데 ‘우린 여행 갈 돈이 없잖아‘ 란 남편의 말이

’우린 앞으로도 영영 해외여행 같은건 갈 수 없을 거야’

라는 말처럼 들려와 답답한 내 마음을 두터운 솜이불로 짓누르는 것 같았다.  


K-군인으로 반평생 살아온 남편, 그에게 K-한반도는 따뜻한 어머니의 품이자, 수호해야 할 땅이었다. 반면 전업주부가 되기 전 해외 영업에 종사했던 나, 세상은 넓고 가보고 싶은 곳도 많았다. 그런 나에게 한반도는 20평 군인 관사처럼 좁고 갑갑하게 느껴졌다. 새장에 갇힌 어미 새처럼 살아가는 내가 애달프다. 그럼에도 그런 그에게 연1회 해외여행을 제안하고 설득하는 건 개화파와 척사파의 정쟁만큼이나 팽팽한 대립각을 세워야 하는 일이다. 생각만으로도 피곤하고 지친다. 애꿎은 홑이불을 몇 차례 발로 차고 돌돌 말아 다리 사이에 끼워 넣으며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결심했다. 내 아이들을 이 나라에만 가둬두고 키울 수는 없다고. 넓고 넓은 세상에 갈 곳도, 할 일도 많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따로 여행 경비를 모으리라.


이제 돌 지난 아이를 두고 여행 자금을 모으기 위해 돈을 벌러 나간다면 그건 퍽 우스운 일이겠지. 그렇다고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나를 불러줄 곳은 없었으니 일단 모을 수 있는 자금은 긁어모아야 겠다. 우선 매달 들어오는 두 아이의 아동수당 20만 원과 아직 기관에 맡기지 않은 둘째의 양육수당 10만 원을 합쳐 월 30만원씩 36개월 정기 적금을 들었다. 적금은 큰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만기지만, 묵혀두었다 둘째 초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 오면 남반구 호주에서 따뜻한 여름을 보내리란 흐뭇한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계획을 세워놓고 보니 욕심이 생겼다. 시간이 많은 초등시기, 아이들이 조금만 더 크면 같이 여행을 가지 않으려 한다는 선배 엄마들의 조언을 익히 들어왔던 터라 초등 5년 동안은 1년에 한 나라씩 꼭 가 보자고, 시간도 많으니 이왕 가는 거 한 달씩 머물다 오자라는 오기도 생겼다.


핸드폰 메모장을 열어 작성했다 <초등 한 달 살기 5개년 계획>


1. 초등 1학년 겨울방학: 사이판(아이 둘과 첫 해외여행이니 만큼 무난한 곳. 미국보다 물가가 저렴하고 영어권 국가라 아이들이 앞으로 영어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겠지)

2. 초등 2학년 겨울방학: 인도네시아, 발리 (한 달 살기란 말이 유행하기도 전부터 아이와 방학 내내 발리에서 지냈다는 지인의 추천이 있었으니)

3. 초등 3학년 겨울방학: 캐나다, 밴쿠버(오래전 출장으로 다녀온 적이 있어 우선순위는 아니지만 친한 지인이 살고 있어 방문도 겸하고자. 미국에 가보고 싶지만 그 나란 여러모로 부담스러우니까)

4. 초등 4학년 겨울방학: 호주, 시드니(북반구와 남반구의 지리, 지형적 차이를 느꼈으면 하는 바람으로)

5. 초등 5학년 겨울방학: 포르투갈, 포르투 (그냥 내가 가고 싶은 곳, 변경 가능)


자, 계획을 세웠으니 이제 착실히 돈만 모으면 된다.


코로나로 너도 나도 해외여행을 갈 수 없는 시기를 보내는 동안, 적금은 소리 없이 소복이 쌓여 갔고 만기를 다 채웠다. 호주 시드니는 절반의 성공. 큰 아이의 학령기에 접어들면서 사교육비를 남은 여행경비로 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서 한글, 덧셈과 뺄셈은 엄마가 아닌 학습지 선생님에게 배워야 한다고 만류했지만 괘념치 않았다. 나에겐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새장을 탈출하겠다는 대의의 실현이 더 간절했으니. 영어학원 대신 넷플릭스를 틀어주고, 어색한 발음으로 떠듬떠듬 영어책도 읽어 줬다. 여러 나라를 여행을 하다 보면 엄마처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의 영어도 듣고 이해해야 한다는 걸 아이도 알아야 하니까. 우리 동네 기준으로 초등 영어 수업 월 수강료가 약 30만 원이니 연간 300만 원이 넘는 사교육비를 절약할 수 있었고, 이는 고스란히 큰 아이의 여행 경비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둘째는 (애초부터 백만 원 단위인 영어 유치원은 우리의 선택지에 없었고) 월평균 20~30만 원의 사립 유치원 대신 원비가 무료인 국공립 유치원을 선택했다. 등하원 차량이 없는 게 살짝 아쉽긴 했지만, 매일 아침 두 손 잡고 여유롭게 걷는 시간이 작지만 행복한 여행처럼 느껴졌다. 정신승리.


지난한 목돈 마련의 시기를 보내고 큰 아이의 초등 1 학년 겨울 방학을 앞둔 연말, 계획 대로라면 우리는 그즈음 여행 짐을 싸야 했지만 이삿 짐을 싸게 되었다. 얄궂다.


두근두근 한 달 살기를 실행으로 옮길 즈음, 갑작스레 남편 발령 소식을 받았다. 우리가 이사할 낡고 오래된 아파트는 리모델링이 시급했고, 우린 급전이 필요했다. 코로나로 자재값과 인건비가 모두 올라 리모델링 비용은 남편의 예상을 웃돌았고, 당연히 남편 앞에서 한 달 살기의 히읗도 꺼낼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결혼 전 마련한 비상금 통장 중 하나를 깨야만 했다. 부끄럽지만 미혼의 직장인이었을 때 긴 휴가를 꿈꾸며 통장에 이름을 붙여주곤 했는데 그의 이름은 스페인, 산티아고였다. (아, 이 돈은 먼 훗날 우리 아들이 제대하면 같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려고 숨겨 둔 것이었는데… 이제 내게 남은 건 ’ 쿠바, 아바나‘  하나뿐이다. 이건 우리 딸이 대학 가면 아바나에서 같이 모히또 한 잔 하려고 숨겨둔 퇴직금 통장인데 그때까지 그녀를 무사히 지켜낼 수 있을까.) 내 산티아고의 존재를 알 턱이 없는 남편은 큰돈은 아니지만 리모델링 비용에 보태 쓰라며 장인 어르신이 주신 봉투를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넙죽 받더라. (산티아고가 그간 착실히 쌓은 이자로) 장인어른이 한 턱 낸 참치회를 배 터지게 먹으며.


그 해 겨울, 연중 온화하다는 사이판에서의 나른한 휴식 대신 우린 추위 속에서 서둘러 이사를 마쳤다. 우리의 첫 번째 한 달 살기는 이듬해 겨울로 미뤄둔 채.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아직 비행기를 타보지 않은 둘째를 위해 시범 비행 차 부산으로 향했다. 비행기 예절을 사전에 경험에 보는 것도, 이 두 녀석들이 트레블 메이트로서 나와 동행할 만 한지 점검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은 인생. 어이없게도 부산 광복동 어느 노점 떡볶이와 고구마튀김이 너무도 맛있어서 그 순간 사이판따윈 생각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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