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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Mar 01. 2022

법의 힘

https://n.news.naver.com/article/081/0003257489


<호스피스ㆍ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이하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된 지 벌써 4년째다. 당시 의료현장에서는 기대보다는 우려가 훨씬 더 많았고, 지금도 복잡한 서류작업 때문에 일선 의료진들은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절차적 강제성 때문에 나를 비롯한 의료진들은 이 법의 취지에는 동감하면서도 시행 자체에는 회의적이었고, 시행 후에는 학회 차원에서 수차례 개정을 요구하기도 했었다. 

법 시행 후 4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당시 나는 법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인식과 문화가 바뀌어야 하는 문제라고 여겼지만, 사실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연명의료결정법 이전에도 무의미한 연명치료와 병원에서의 고통스러운 죽음에 대한 문제의식은 폭넓게 퍼져있었고, 그것이 법 제정에의 공감대가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막상 병원에서 만나는 환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병원에서 받는 치료가 자신을 살리고 일상으로 돌려보내줄 것이라는 희망을 쉽게 접지 않았다. 그들에게 다가올 죽음과 치료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였고, 그래서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지 않는 것에 대한 동의서 (Do Not Resuscitate, 통상적으로  DNR 동의서라 부른다)는 대개 가족의 서명만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환자 본인이 DNR 동의서에 서명하는 경우는 연명의료결정법 시행 직전까지도 0%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예전에는 환자들에게 연명의료결정에 대한 설명을 하면 혼란스러운 눈빛만을 보였지만, 이제는 대부분 ‘한번쯤은 들어봤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여전히 어려운 대화이긴 하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훨씬 쉽게 꺼낼 수 있다. 상당수의 환자가 본인의 연명의료계획서에 직접 서명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닥쳐올 죽음에 미리 대비하고 준비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며,  그것이 죽음을 재촉하는 ‘재수없는’ 일이 아니라 바로 내 삶의 온전한 마무리를 위해 필요한 작업이라는 것을 많은 이들이 알게된 것이다. 그 배경에 연명의료결정법의 시행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법은 일부만의 의제였던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그리고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하는 힘이 있다. 인식과 문화가 충분히 무르익어야 법이 제정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법이 제정됨으로써 인식과 문화가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기도 한다. 

차별금지법이 2007년 이후 수차례 국회에서 발의가 되고 입법이 시도되고 있음에도 좀처럼 제정되기 어려웠던 이유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시기상조”라는 우려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  주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조항이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연명의료결정법에서 보듯이, 법은 어느 정도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일단 만들어지면 더 폭넓은 사회의 인식 전환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병원에 살려고 왔는데 왜 죽는다는 얘기부터 하느냐’며 연명의료에 대한 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이들이 왜 없겠는가. 예전에는 훨씬 많았고 지금도 더러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사에게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평화로운 죽음을 미리 준비하고 싶어 한다. 연명의료결정법은 그러한 보편적인 소망을 추구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것임을 나라에서 인정하고 공식화한 것이다. 차별금지법 역시 일부의 동성애 혐오자들까지 설득하기는 어렵겠으나,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누구나 성별, 종교, 성정체성 등에 따라 권리를 제한당하고 폭력에 노출당하지 않을 보편적인 소망을 갖고 있다. 반드시 ‘차별금지법 찬성’이라는 목소리로 가시화 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 소망을 인정하고 공식화하는 것이 먼저일까, 아니면 소수의 혐오자들까지 설득해내야 하는 것이 먼저일까? 

연명의료결정법처럼 차별금지법도 ‘한번쯤은 들어봤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여질 때 우리 사회의 변화는 생각만큼 대단치 않을 가능성이 높다. 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될 때 어떤 이들은 의사들이 살릴 수 있는 환자들도 애써 살리지 않고 DNR동의서를 받을까봐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어떤 이들의 우려처럼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동성애가 범람할 리도 없다. 다만,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지켜낸 연명의료결정법과 마찬가지로 차별금지법 역시 누군가의 생명을 구할 것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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