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환자에게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암이 많이 퍼져서 기존의 치료가 효과가 없어보인다는 것, 진통제 용량은 점차 늘어가고 식이량은 조금씩 줄어들 것이라 때로는 정맥영양제나 수액치료가 필요할 수 있으리라는 것, 가정에서 지낼 수 있는 동안은 통원치료가 가능하겠으나 입원형 호스피스를 방문하여 상담이 필요하고 입원대기를 해놓는 것이 좋으리라는 것.
그리고 침을 꼴깍 삼켰습니다. 의도된 침묵이기도 하지만, 정말 할 말이 없어서이기도 합니다. 환자의 반응을 보아야 합니다. 대개는 충격을 받고 말을 잇지 못하거나, 감정이 격해지기도 합니다. 이런 시간은 말기에 가까워지는 암환자라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려고 입원시킨 것이기도 하지요. 검사를 해서 이미 짐작하고 있는 나빠지는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점점 진행되는 증상을 조절할 계획을 세우기 위한 입원이지만, 한편으로는 기나긴 항암치료의 여정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입원이기도 하였습니다.
환자는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려 애썼지만 혼란스러운 마음이 드러나는 것은 감출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병이 빨리 나빠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말도 털어놓았습니다. 그런 말에 대개 저는 본능적으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치료하신 지 2년이나 되셨잖아요? 그동안은 다행히 조절이 잘 되셨습니다만… 이제는 좀 한계에 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환자가 취한 태도는 사실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 다음 해야 할 일을 헤아리기 시작하였지요.
“선생님 그럼 정리를 해보죠.”
“네?”
“암이 복막, 대장, 뼈에 퍼졌다는 것이고요. 뼈전이에 대한 방사선치료가 계획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네.”
“그럼… 제가 일단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퇴원 후 직장을 정리를 해야 하겠네요. 먹기 힘들면 가정간호 신청을 해서 영양제를 맞을 수 있고요.”
“네.”
“그리고 입원형 호스피스를 알아볼 것이구요. 이후엔 외래를 다니다가, 점점 힘들어지면 입원형 호스피스로 들어가는 것. 그렇게 이해하면 되겠지요?”
“…네. 입원형 호스피스는 대기가 있고 언제 이용하게 될지 모르니까 일단 먼저 알아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네 그럴께요.”
사실 이렇게 빨리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고 이후의 행동방침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환자를 만난 적이 없어서 저는 사실 조금 얼떨떨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역할을 왠지 빼앗긴(!) 느낌이 들기도 하였지요. 보통 환자와의 면담에서는 설명하고, 이해했는지 묻고, 환자에게 이해한 바를 말해보라고 하는 것이 정석이지 않습니까. 대체로는 설명만 하고 환자를 혼돈 속에 휩싸이게 한 뒤 끝내 버려서 문제이지만요.
자신이 제대로 이해했는지를 설명하며 되묻는 말씀을 들으며 저는 속사포같이 ‘설명’을 늘어놓으며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설명의무’라는 것을 충족시키려는 요식행위를 해온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늘 환자들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속으로, 또는 동료들과 불평을 해왔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고속(!)으로 받아들이시는 경우는 너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라면 이런 상황에서 절망스러운 마음을 추스리고 힘겨운 한 걸음을 뗄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두번째로 읽은 아툴 가완디의 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마지막 챕터 8장의 제목은 “용기”입니다. 8장은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온 ‘용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소크라테스와 아테네의 장군들과의 대화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용기란 ‘어떤 지혜나 지식이 전제되지 않아도 성립한다’는 것까지 합의하지만 용기의 정의에 대한 결론을 내지는 못합니다. 아툴가완디는 이 대화를 바탕으로 용기를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지식을 직면할 수 있는 힘’이라고 정의합니다. 즉 지식을 기반으로 지혜로운 판단을 내리거나, 아니면 그 지식을 지닌 것 자체를 용기라고 하기보다는 지식을 마주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용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생애 말기의 용기는 이런 것이라고 말하지요.
“나이들어 병드는 과정에서는 적어도 두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는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다. 이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실을 찾으려는 용기다. 그런 용기를 갖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유로 그 진실을 직면하기를 꺼린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용기가 있다. 바로 우리가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다.”
환자분은 ‘훨씬 더 어려운 용기’를 낸 셈입니다.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용기. 그런 용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아마 하루아침에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분은 아마도 늘 삶을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왔던 분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벼랑 끝에서 부는 칼바람 속에서도 머리를 차갑게 하고 휘둘리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길러내었던 분인 것 같습니다. 일생을 그렇게 살면 생의 마지막에서도 그런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일까요.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단단하게 살아낼 수만은 없기에, 놀라운 용기를 내는 분을 보니 이것이 정말 쉽지 않은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짧은 진료시간에 환자들이 해내기를 바랬던 것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환자들이 용기를 갖게 하기 위해서 내가 어떤 말을 해드려야 할지, 얼마나 기다리고 지켜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이 단단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온 분을 좀더 지켜내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아쉽고 슬픈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