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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제대로 알고 싶어졌다

by 돈냥이

마흔을 앞 둔 어느 날, 그렇게 퇴사를 했다. 흔한 이야기였다. 줄을 잡지 못했고, 특별한 능력은 없이 그 회사에서 높은 연봉을 받고 있었다. 자르지 못해 스스로 나가게 하려는 밀어부침에 밀려나고 말았다.

그렇게 감정적으로 피폐해진 상태에서 재입사를 준비해야 한다.


오랫동안 들여다보지 않았던 구직사이트에 업로드된 내 이력서를 다시 수정해보았다.


토익 점수 만료 / 업무상 영어사용 없음 / 영어회화 가능했지만 10년 넘게 한국말만 사용

엑셀을 능숙하게 다루지만 컴활/MOS 자격증 없음

모든 입출 내역, 매출/매입 내역을 꼼꼼하게 정리하고 1원까지 찾아내지만 회계 업무를 한 적은 없음



마치 성능에는 이상이 없지만 이름없는 제조사의 저가형 제품 같은 스펙이었다. 그게 나였다.

10년 동안 일해왔지만 "영업지원", "단순사무관리"는 그 회사에 있을 때에만 유용한 직원이었고, 이직 시장에서는 무엇 하나 검증되거나 단어 하나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회색빛의 인재였다.

하얀 백지라서 최저시급의 저가 인력도 아니고 까맣게 채워진 전문가라서 회사를 키워 줄 고급 인력도 아닌, 이래저래 쓰기에 참 곤란한 회색인간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나의 단점을 열거하고 무엇을 해야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제 와서 자격증을 취득한다 한들, 최저시급도 괜찮다고 어필한다 한들, 나이 마흔의 신입을 과연 받아들여 줄 것인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무언가에 시간을 들였을 때 그것이 시간낭비가 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해 왔던 모든 게, 현 시점에서는 시간 낭비가 되지 않았던가






문득 내 또래의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인터넷 세상에서는 젊은 피를 수혈했다며 이미 이사나 대표 타이틀을 단 2,30대에 이야기가 빼곡한데 40대들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아파트 투자에 성공하고 주식과 코인으로 돈을 벌어 은퇴한 파이어족으로만 남아있었다.



주변의 중년들의 삶을 찾아보았다. 현실 속에서 그들은 30대 때부터 주욱 지켜온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그 삶 모습 그대로 계속 이어가기 위해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었다.


이미 퇴사해버린 나는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 수 없었다. 이미 모은 재산도 많지 않고 노동 수입 외에는 없었기 때문에 인터넷 세상에서의 40대와 같은 모습을 살 수도 없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혼자 당당하게 설 힘조차 없는 것이 지금의 나였다.



오래 전에 보았던 영화 월-E 오프닝 장면이 떠올랐다.

모두가 떠나고 황폐해진 지구에 남아 쓰레기를 정리하는 임무를 맡은 수많은 월-E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닳아지고 고장나고 배터리가 고갈되어 하나씩 멈추게 된다. 최후에 남은 마지막 월-E가 홀로 자신의 일을 하면서 모래폭풍을 피하여 숨고, 약한 햇볕으로 배터리를 충전해가며, 작은 식물과 옛날 한때를 풍미했던 음악으로 즐거움을 찾는 모습이 나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최신식 모델인 EVA는 2,30대 쯤 될려나...



더이상 업데이트 되지 않는 이력서로 적당한 곳을 찾아 지원하면서, 남은 시간에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무언가 준비하고 도전하고 노력해야 했지만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시도"를 해 볼 의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저 매일 자기개발서건 재테크 서적이건 소설이건 닥치는대로 읽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결과가 남지 않는 하루하루가 또다른 괴로움으로 남지 않게 블로그에 읽은 책 리뷰를 남겼다. 무엇을 해야 할 지 몰랐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자, 여전히 구인시장에서의 응답은 없었지만 내 안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나라는 제품의 품질을 개선하자



성능이 좋으면 이름없는 중소기업의 제품이라도 입소문을 타서 판매량이 올라가는 시대에, 지금 소속없는 구형 모델이라고 해서 이대로 폐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자기개발이라고 해도 자격증을 따고 열심히 일하는 것 외에는 몰랐기에 지금 무엇을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재능 하나도 없는 것 같고, 한가지 꾸준하게 해 온 분야도 없어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를 구형 제품이라고 생각하고 기능을 업그레이드 하거나 리모델링 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내 입장에서 나를 보지 말고, 나라는 인간을 하나의 제품으로 생각해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자기계발의 첫번째 단계라고 말들 하지만, 나에 대해 생각해봤자 온갖 단점들과 부족한 점만이 떠올라 어느 한 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괜히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만 생기고 의욕이 사라졌다. 하지만 나를 제품이라 생각하면 타인의 시점으로 냉정하게 살펴 볼 수 있고 감정이나 느낌없이 그저 가지고 있는 기능과 상태 목록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너무 늦은 듯 하지만 그래도 내일보다는 언제나 빠른 오늘이라고 생각하며 나에 대해 확인하는 시간을 가지로 마음 먹었다. 그렇게 책을 읽고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서 나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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