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퇴사 이후, 꽤 오랫동안 면접은커녕 일주일에 이력서를 한두 군데 넣을까 말까 하며 예상보다 긴 백수기간을 보내고 있다.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에 압박감을 느끼고 고용센터에 미안함까지 느끼면서도, 퇴사 시에 정한 구직 조건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못하고 있다.
나의 구직 조건은 "주 5일, 일 8시간 근무, 연차 제도이고, 연봉은 최저시급으로 낮추되 업무는 단순사무업무에 국한되어야 한다"이다. 연봉이 높으면 업무는 좀 많아도 괜찮기에 고집하고 있는 조건은 근무시간과 연차 정도겠다.
누군가는 연차를 기본권리로 알고 있겠지만 소기업은 그렇지 않은 회사가 정말 많다. 대외적으로는 연차가 있다고 하면서 빨간 날을 연차로 대체하거나 사정이 있을 때 말하면 조퇴나 외출 등을 허락해주면 된다는 식이다. 이런 회사가 너무 많아서 돈이 아쉬울 때는 연차는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월급과 업무만 보고 입사를 하곤 했다. 취업지원센터에서도 "연차"라는 조건은 맞추기 어렵다고 할 정도다.
몇 곳의 소기업을 거친 지금, 연차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조건으로 편입되었다. 연차가 있는 회사, 연차를 휴일로 대체하는 회사, 그리고 연차 없이 사정에 따라 봐주는 형태의 회사를 모두 다녀본 뒤 세워진 고집이었다.
예전에는, 집순이라서 연차를 써서 여행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 놀아야 할 시간을 낼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개인 사정이 있을 때는 당당히 말씀드리고 쉬거나 조퇴를 하는데 거리끼지 않았기 때문에 연차가 없다 해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연차가 없음에 불편함을 느끼는 직장동료들이 어떤 기분인지는 알 거는 같았지만,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었다.
그랬던 내가 연차가 있는지 여부를 살피게 된 이유는 그것이 고용주가 고용인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 예상해 볼 수 있는 지표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단순하게 내가 느낀 차이를 정리하자면, 연차가 있는 곳은 고용인이 사생활도 있고 체력의 한계도 있고, 여유시간이라는 것이 필요한 살아있는 한 사람임을 인지하고 있다면, 없는 곳은 그저 돈 주고 일꾼 하나 샀다 라는 느낌을 주었다.
친구들이 2박 3일로 놀러 가는데 함께하고 싶어 하루 쉬려는 것을 상사에게 말하기 꺼려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일일이 개인 생활을 공개하고 싶지 않아 하고 아무 이유 없이 몸이 좀 안 좋지만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고 집에서 하루 쉬고 싶을 수도 있는 게 사람이라는 것, 예기치 않은 개인의 사생활이 있을 수 있다는 것 등 사람이라면 의식하지 않아도 당연히 가지고 있는 일상을 인지하고 있느냐를 알아보는 지표가 바로 연차 제도의 여부였다. 쉽게 말해 고용인을 사람으로 보고 있냐를 판단하는 것이다.
연차가 없다고 해서, 그 옛날 노예를 소유물 취급하던 시절의 사고방식을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고용주도 만나긴 했었다.) 회사와 고용인의 계약관계, 즉, 정해진 업무를 정해진 시간 내에 완수하는 조건으로 이 정도 급여를 책정했다는 계약 관계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느냐 아니냐가 연차 여부에서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일이 좀 많으면 한 번씩 초과근무 수당 없이 좀 더 일해 줄 수도 있는 것이고, 옆사람 일도 도울 수는 있다. 이것이 "당연"의 영역이 아니라 "고용인의 배려"의 영역으로 보는지는 구인공고나 면접에서 파악하기는 어렵다. 고용주도 예비 고용인과 마찬가지로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굳이 내 개인 사정을 일일이 얘기하지 않아도 되고, 사람이기에 비정기적인 휴일이 필요한 때에 쓸 수 있는 연차 제도를 당연하게 운영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연차 제도가 있는 곳은 그나마 최소한 감정과 피로를 느낄 줄 아는 사람으로 대접받으며 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구인공고에 연차가 있음이 고지되어 있어도 면접 자리에서 꼭 언급을 해본다. 고용주든 상사든, 연차 질문에는 회사의 분위기가 묻어 나온다. 당연히 써도 된다며 가볍게 넘어가는 곳이 좋은데, 조건을 달거나 언짢은 기색이 보이는 곳은 피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자기 할 일만 다하면 상관없다"라든가 "요즘 애들은 그런 거 잘 챙기는데 참 세상 좋아졌다"라는 등의 사설이 붙으면, 연차가 있어도 쓰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고용주도 상사도 기분이 있고 그날의 컨디션이 있고, 개인 사정이 있고, 개인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일반 직원도 마찬가지다. 인턴이든 수습이든 사원이든 대리든 신입이든 경력이든 사람이라면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개인 사생활이 있고 사정이 있다. 이 사실을 당연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과 일하고 싶은 것이다. 대단한 대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사람으로 대접 받기를 바랄 뿐이다.
회사 사정으로 연차를 인정할 수 없거나 사용 여부에 까다로울 수는 있다. 하지만 공고나 면접에서 그 사실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곳을 만나지 못했기에, 구직자로서 최소한의 보호막으로 기본권리로서의 연차라는 조건을 포기하지 못하지 못하고 있다.
요즘 하루는 이렇다.
커피를 마시면서 지역과 직종으로 구인공고를 조회하고, 주 40시간 근무와 담당업무 그리고 연봉(최저시급 위반 등) 등의 조건으로 한번 더 거른다. 그리고 연차가 있는지 확인하고 잡플래닛에서 평점이 2.8이 넘는지 확인한다.
여기까지하면 남은 목록이 하나도 없는 날이 대부분이라, 한숨 한번 쉬고 공무원 공부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