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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곤 Mar 10. 2018

어느 수위의 성희롱부터 거절해도 되나요?

내가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이유

고등학교 때는 새벽 6시 반에 통학버스를 타고 여고로 등교하여 밤 10시가 넘어 다시 통학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생활이었다. 선생님이나 여고 앞에 종종 나타난다는 바바리맨 외에는 남자를 접할 일이 없었다. 대학생 때부터 남녀가 섞여 있는 보통의 사회로 들어오면서 나에게도 불쾌한 경험이 여러 번 생겼다. 사당에서 빨간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던 길, 졸다가 뭔가 이상해서 깨어났더니 옆자리 아저씨가 내 허벅지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 아저씨는 심지어 나를 따라 내려 술 한잔 하자며 (다행히) 느린 걸음으로 쫓아왔다. 어느 영화관에서는 옆자리 아저씨가 다리 사이에 손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손을 탁 쳐서 치웠지만 잠시 후에 또 내 다리 사이로 손이 뻗어왔다. 불쾌한 것은 물론이지만 그보다 어이가 없어서 아예 몸을 돌려 쳐다보자 그제야 그는 자리를 떴다. '주인님'이라고 불러 달라는 이상한 익명의 전화를 받은 적도 있다(같은 학과 사람이 틀림없었다). 당시 남자친구에게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이상하게 변태가 많이 꼬인다고 생각하면서도, 남자친구가 그 원인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미투를 굳이 나까지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던 이유는 내가 알기에도 내 주변에 기분 나쁜 성희롱부터 성폭행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 경우가 더 드물기 때문이었다. 불쾌한 일을 겪어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를 꺼내보면 각각의 경험은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누구의 연애, 누구의 회사에서 생긴 일은 뉴스에도 나왔다더라 할 만큼 더 심한 일이 줄줄이 나왔다. 나보다 더한 사람이 많은데, 내가 겪은 일들 정도는 우스운 피해자 코스프레처럼 보일 것 같아 차라리 나 스스로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려고 했다. 남들이 '뭘 그 정도로 피해자래?'라고 하면 상처받을 것 같으니까. 연예계, 정치계의 미투 운동이 연이어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주고 있지만 실제로 일반 기업에서의 성희롱, 성추행은 아직 이슈조차 되지 못하고 있는 사례가 많을 것이다. 


나로서는 원치 않은 신체 접촉을 당한 것보다 더 충격적인 일은 따로 있었다. 회사 상사가 굳이 저녁에 밥을 사주겠다고 했고, 그 전에도 워낙 소규모 술자리가 많은 회사였던 탓에 별 생각 없이 그 자리에 나갔다. 그는 유부남이었지만 유부남이라고 표현하기도 어쩐지 민망한, 아빠뻘 되는 나이였다. 일 얘기를 적당히 섞어 가며 식사를 마쳤는데 얘기가 좀 이상하게 흘러갔다.


"남편이랑도 술 한잔씩 하고 그래?"

"네, 뭐……."

"술 한잔 하면 분위기도 좋아지고?"

"네? 뭐……."

"남편이 잠자리는 만족시켜 주나?" 

"……?"


네? 귀를 의심했지만 그 뒤로 '나는 결혼은 그냥 의리로 사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 한다', '선을 넘지 않으면 한정된 경험만 하게 된다'는 기묘한 설득이 이어졌다. 선을 넘지 않는다는 질책과 선을 넘어보지 않겠느냐는 권유가 무슨 뜻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못 알아들은 척하며 애써 말을 돌리고 남편에게 밥을 해줘야 한다는 이상한 핑계를(조강지처처럼 보이고 싶었나 보다) 대며 그 자리를 빠져나와 버스에 올랐을 때, 그제서야 이유 모를 눈물이 터져나왔다. 


왜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까. '나랑 잘래?'라는 노골적인 표현이 아니라서 그랬다. 나의 거절이 '왜 혼자 이상하게 생각하고 오버해?'라는 핀잔으로 돌아올까봐 그랬다. 내가 그에게 불쾌감을 표했을 때 앞으로 회사에서의 껄끄러움이 걱정되어 그랬다. 신체적 접촉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그만큼 나 스스로 만든 거절의 기준이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가끔은 심지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면전에서 즉시 비난을 가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결국 회사는 그만뒀지만. 


돌이켜보면 이성적인 관계에서 곤란했던 많은 상황이 비슷했다. '왜 혼자 앞서가?', '왜 오버하고 그래?', '난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거절의 순간을 최대한 미루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불쾌한 순간을 참아 넘겼던 많은 이들에게도 '이 정도는……' 하고 피해의 정도를 스스로 검열하는 마음이 없었으리라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미투 운동이 지난 피해를 고발하는 것뿐 아니라 옳지 않은 순간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전환점이 되기를 또한 바란다.  


더불어 미투 운동으로 많은 남성들이 펜스 룰을 내세우고 있다. 매우 정당한 방어를 할 뿐이라는 기세로 또 다른 남녀 차별을 견고히 하려는 것 같다. 여성을 그저 사람으로 대해주면 되는데, 그게 아예 접촉을 차단해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일까 싶어 씁쓸하다. 미투 운동이 왜 남녀의 갈등이 되어야 할까. 그것은 남성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성범죄자를 고발하는 것인데. 엄마, 누나, 여동생, 아내가 있다면 그들이 치마를 입고도 평범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택배 초인종이 울렸을 때 집에서 숨죽이고 있지 않아도 되도록, 한밤중에도 전화통화를 하지 않고 골목길을 걸을 수 있도록, 남성들이 지금도 누리고 있는 자유로운 일상을 살 수 있도록 오히려 힘을 실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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