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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뭉치 Jul 21. 2024

잠들지 못하는 밤의 이름은

고백건대 나는 도망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풀어야 하는 어려운 문제가 있다거나, 골치 아프게 하는 고민이 있다거나 할 때, 나는 정말이지 도망가고 싶다. 가장 도망가기 좋은 곳은 잠이다. 제일 값싸고 효율이 좋달까. 자는 시간 동안은 현실세계의 고통으로부터 회피할 수 있으니, 회피형 인간에게 잠이라는 도피처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특히 언제 어디서나 잘 잘 수 있는 나에겐 더더욱. 그런데 30대에 접어들며, 나는 이 달콤한 회피에 좀처럼 들지 못한다. 생체리듬이 변해버려서 수면 호르몬이 잘 나오지 않는 걸까 생각했었는데, 침대에 누워 있는 내 꼬라지를 보면, 그게 단순히 호르몬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


자야 할 밤이 찾아오면 나는 잠에 빠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잠이라는 도피처를 사랑해 마지않으면서도 잠을 자지 않으려는 게 어이가 없지만, 무튼 나는 잠에 들기가 싫다. 내일이 오는 게 싫어서. 이제야 겨우 고요하게 머물 수 있는 나의 공간에 돌아왔는데, 잠을 자고 나면 내일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나는 왠지 견딜 수가 없다. 이 또한 일종의 도피다. 내일로부터의 도피.


어렸을 때도 비슷한 소망을 가진 적이 있었다. 친구들과 깔깔대며 미친 듯이 신나는 하루를 보내고 난 밤들이었다. 그때도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나사 반쯤 빼놓고 깔깔대던 오늘이 어제가 되지 않았으면 했다. 나를 웃게 하고, 외롭지 않게 하던 친구들과의 하루가 지나면 내일부터는 사무치는 외로움에 시달릴 테니까. 그런 날이면 종일 깔깔 웃다가도, 집에 돌아오면 혼자 방에 처박혀 홀로 맥주를 마시곤 했다. 그리고 빌었다. 내일이 오지 않게 해달라고.


그렇게 홀로 남겨진 밤이 두려울 때가 있었는데, 지금의 나는 홀로 된 밤이 아까워서 잠을 자지 못한다. 내일이 찾아오면 나는 또 아침 러닝, 영어공부 한 시간, 출근길 걷기를 거쳐 일터에 도착하고, 정신없이 마감들을 쳐내다가, 간신히 퇴근해 취미생활로 하는 단체 활동에 또 내 모든 걸 쏟아내겠지. 집에 오면 분명 11시, 12시가 될 테고, 고양이들을 돌본 후 지금처럼 녹초가 된 상태로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거다. 내 세계는 자정이 넘어서야 겨우 시작이 되는데, 지금 자면 내 세계가 영영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그 세계를 꼭 붙잡고 늘어지며 쏟아지는 잠을 참아내고만 있다.


내 세계가 자정이 넘어서 시작이 된다니 뭔가 거창한 걸 할 것만 같지만, 그 세계에서 나는 정. 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종일 분노만 하다가 힘을 모조리 다 써버려서 이제는 더 이상 화를 낼  힘도, 의지도 없이 집에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겨우 거실 바닥에 누워서 (침대에 누우면 바로 자버리고 말 테니까) 고양이들 옆에서 핸드폰이나 만지작만지작 거리는 것이다. 의미 없는 쇼츠와 릴스들의 향연이 끝나면 나는 분명 다시 분노하고 말 테니까, 남들이 키우는 고양이 얘기나, 두바이 초콜렛 만드는 장면 같은, 걱정거리라고는 영영 존재하지 않은 것만 같은 세상에 간신히 내 의식을 걸쳐두고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다 이제 정말 자야 할 시간이 오면, 왠지 나는 울 것만 같은 기분이 되고 만다. 꿈에선 분명 전 남편이 진상을 부리거나, 폭격이 떨어져 몸을 피하거나, 산더미 같은 업무를 쳐내고 있을 텐데, 정말이지 이제는 그 세계로 들어가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잠이라는 도피처도 유효하지 않게 되어버려서, 이제는 정말 숨을 곳이 더 남아있지 않은 벼랑 끝에 선 것만 같다.


어제는 아끼는 친구가 나에 대해 이렇게 말을 했다.


“뭉치가 정말 매력 있을 때는 분노했을 때야.”


그 말을 듣고 나는 애정 섞은 욕으로 답하며 깔깔 웃었지만, 속으로는 약간 놀랐다. 내가 그렇게 평소에도 화가 많은 사람이었나. 나는 분명 속으로만 화를 낸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분노가 없으면 반전운동 하는 활동가가 됐을 리도 없겠지만, 밥 벌어먹는 직업으로 그 일을 하려면 분노 그 자체로만은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마이크 잡고 쌍욕만 하면 누가 나에게 월급을 준단 말인가. 무엇보다, 진짜 화만 내고 있다가는 모두가 내 곁에서 도망가버리고 말 테니까 말이다.


빡치고 두려운 것들을 꾹꾹 눌러 글로 쓰고, 심호흡하며 구호를 외치고, 긴 회의 끝에 여러 번 목표와 계획을 수정하고, 집회를 기획하고, 가끔 웃으며 노래하고 춤추기도 하는 게 내 일인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빡친 게 보였나 싶어서 약간 부끄러워졌다. 친구는 내 분노가 매력적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 분노를 이보다 더 어떻게 다룰 수 있나 싶어서 안절부절이다. 현실세계에서 모든 걸 하얗게 다 태워버려서, 쇼츠 보는 것 밖에는 다른 걸 할 힘을 남겨놓지 못하고, 꿈속에서조차 내 도피처를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만 것 같은 느낌이다.


너무 화를 내서 몸도 망가져버린 걸까. 생리가 1년 반 가까이 멈춰버렸는데도 원인을 찾지 못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유명하다는 한의원에 가보았다. 선생님은 맥을 짚고 내 머리통 여기저기를 막 만져보더니, 머릿속에 극단적인 평화주의가 있어서 심장이 망가진 거라고 말했다. 내 백그라운드도 모른 채 그런 말을 건넨 게 너무 놀라워서 오히려 돌팔이가 아닌가 지금까지 의심을 하긴 하지만, 십몇 년 동안 진한 분노가 내 삶을 지배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뭐라고 반박할 말을 찾기가 힘들었다.


일주일 전 새로 찾은 큰 병원에서야 내 병명을 알 수 있었다. 갑상선 자가면역질환. 외부의 세균이나 바이러스와 싸워야 할 내 면역체계가 내 갑상선 세포와 싸우고 있다고 한다. 나는 싸우다 싸우다 이제 내 갑상선이랑도 싸우는 건가. 이런 삶이 이제는 너무 피곤하고 지긋지긋한데 달리 다르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몰라 마룻바닥에 널부러져만 있다. 눈에는 분노 대신 사랑이 그득하고 입에는 쌍욕 대신 예쁜 말이 방울방울 맺히는 인스타 속 친구들처럼 살아보고 싶은데, 화를 안내는 방법을 전혀 알 수가 없다.


얼마 전엔 엄마가 전화를 했다. 대안학교에서 일하는 엄마의 동료 선생님 학생이 NGO 활동에 관심이 있어 내가 만나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예전 같았으면 너무 반갑게 당장이라도 만나겠다며, 꼬리에 프로펠러 단 강아지처럼 신나 했을 테지만, 지금의 나는 약간 주저하게 된다.


“엄마, 나 너무 엉망인데. 그분에게 NGO 활동 권해도 되는 걸까. 나 너무 힘들어.”


나는 왜 힘들다는 말이 엄마한테만 나오는 걸까. 아직 철이 한참 안 든 걸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엄마에게 힘들다고 말한 걸 약간 후회하고 있는데 생각하지 못한 답이 돌아왔다. 엄마는 말했다.


“너 같은 친구가 더 많아져야 네가 덜 힘든 거 아니겠니?”


나는 엄마가 당장 일을 때려치우라고 할 줄 알았는데, 나에게 더 많은 친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엄마의 말에 마음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나를 하얗게 불태우는 이 감정이 사실은 분노가 아니라 외로움이었다고, 허허벌판에 홀로 서서 메아리조차도 없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는 느낌이었다고, 그제서야 알아차린다. 화를 그만 내기 보다도, 같이 화낼 친구들을 나는 사무치게 바라고 있었던 거다. 입에서 예쁜 말이 방울방울 맺히는 친구가 아닌, 확성기에 대고 쌍욕을 퍼붓고 싶은 심정인, 그런 친구들을 말이다. 그런 친구들이 옆에 있으면 저절로 화가 좀 누그러질 것 같았다. 모두가 죽어가는 세상에서 미치지 않는 게 미친 거라고, 누군가 나에게 그렇게 말해준다면, 뼛속 깊이 파고든 이 외로움이 달래 지려나.


무월경의 원인이 된 질병을 알기까지 꼬박 1년 반이 걸렸다. 병원을, 과장 조금 보태 열 번을 옮겨 다녀도 찾지 못한 병을 이제야 찾았다. 잠들지 못하는 밤들의 원인을 찾기까지는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방바닥에 누워서 손가락으로 까딱까딱 쇼츠 내리기만 백만 번, 그러다 현실에 돌아오면 메모장에 온갖 쌍욕을 끄적이길 반복했다. 이제야, 잠들지 못하는 숱한 밤들에 제대로 된 이름표를 붙여줄 수 있다. 분노인 줄만 알았던 무기력은 사실 사무치는 외로움이었음을, 이 글을 쓰며 알았다. 병명을 알았으니, 이제는 잠들지 못하는 밤에 대한 약도 좀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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