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긴 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다. 6일 만에 만난 고양이들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서운한 듯 야옹거리며 나를 쫓아다닌다. 이제는 체력이 새벽비행을 못 따르는 탓에 어제는 하루 종일 누워서만 지냈다. 누워있으니 금세 고양이들이 내 옆구리를 파고든다. 아, 행복하다. 집에 오니 행복하다. 옆구리에 보드라운 털복숭이들을 끼고 그 순간의 행복을 만끽한다.
집에 돌아와서 행복하다니. 생경한 느낌이다. 나는 늘 집밖으로 나돌고만 싶었는데 말이다. 긴 여행을 떠나서 한동안 집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었는데, 옆구리에 닿은 이 복실복실한 존재들의 영향력이 어마무시하다.
나는 늘 한국을 떠나고 싶었다. 어딜 가나 똑같은 스타일의 똑같은 말투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지겨웠고, 그게 지겹다면서도, 나도 그 스타일에 끼지 않으면 루저 취급을 받을 것만 같아 어영부영 맞지 않는 틀에 끼워 맞추는 게 혐오스러웠다. 싫으면서도 따르는 것. 그것만큼 자기 자신을 배반하는 일이 또 있을까. 한국에서의 삶은 나 자신을 배반하지 않으면 숨통을 끊어버릴 것 같이 아슬아슬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바깥에서의 삶은 좋았냐, 그것도 아니다. 돈은 개뿔도 없는데, 쓸 데는 많고, 믿을 구석이 있지도 않았다. 어눌한 말투로 카페에서 손님의 주문을 받다가 놀림당하고, 라떼를 시킨 손님이 아시안인 내 얼굴을 보고 다른 사람에게 만들어 달라며 주문을 다시 한 적도 있다. 아시안인 내 얼굴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내 말투는 숨겨보려 해도 숨길 수가 없는 것들인데, 그것들 때문에 내가 취약해진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학교가 끝나면, 알바가 끝나면, 나는 철저히 익명의 존재가 될 수 있었다. 무한한 듯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 없는 듯 존재하는 익명의 사람. 그 무게가 날아갈 듯 가벼워서 홀가분했다. 길을 걸으며 아는 사람을 만날 일도, 눈길을 받을 일도 그다지 없다. 내가 누구의 딸이고, 누구의 언니이고, 누구의 친구일 일이 없는, 그냥 아무도 아닌 존재. 하루아침에 없어져도 모를 법한 그런 무게의 사람이 되는 일이 그저 가벼웠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나는 그야말로 전력질주를 했다. 엄마가 직장을 잃어 생계가 어려웠고, 빨리 취직을 해야 했다. 그래서 들어간 게 ‘고작’ 인권단체였던 게 웃기지만, 시민들이 한 푼 두 푼 모아 주시는 월급을 받게 된 만큼 허투루 일할 수는 없었다. 일은 너무 어렵고 힘들었는데, 그걸 돌파하고 싶어서 퇴근시간이 지나면 퇴근 도장을 찍고 책상 앞에 도로 앉아 나머지 공부를 했고, 온갖 세미나와 공부모임을 다녔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결혼생활 자체가 도전이었다. 눈에 불을 켜고 청약 당첨에 목을 매는 전 파트너를 이해하고 따르는 것이 고역이었고, 내가 그보다 더 적게 번다는 이유로 집안일에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욕을 하고 물건을 던져서 다행이지, 그렇게 가시적인 폭력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그런 삶에 익숙해지려 노력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혼 후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침대에 누워 가만히 생각했다.
‘한국을 떠나고 싶다. 한국이 너무 싫다. 제발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
모두가 부대끼며 살던 봉천동 언덕동네에선 ‘공부방 하니샘 네, 그 아빠 없는 집 딸’. 누구도 나를 그렇게 부르진 않았지만, 어딘가 나사 하나 빠져버린 것 같은 삶을 아껴주느라 애를 먹었다. 그 꼬리표가 나를 평생 따라다녔는데 이제는 이혼녀 꼬리표까지 달아버린 것이다. 그것도 가정폭력으로. 인권운동 한다는 년이 가정폭력범 하나 못 이겼네 싶어서 내가 싫었고, 어디 가서 활동한다고 나를 소개하기도 싫었다. 내 현실이 시궁창 같은데 어디 가서 마이크 잡고 다른 이들의 현실을 말하기도 싫었고, 그렇다고 일을 대충 하고 싶지도 않은 내가 버거웠다. 그러다 그냥 어느 순간 다 놓고 나를 옭아매고 있는 것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간절하게 바랐다. 익명의 삶을.
이혼을 결정하고 나서는 한 2-3주 동안 미친년처럼 공부를 했다. 돈이 개뿔도 없는데 6만 원짜리 원서를 사서 읽었고, 해외 논문들을 싹 쓸며 컨택해 볼 만한 교수 이름들을 모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얼른 박사를 가자 싶었다. 그러나 그런 정신머리로 제대로 된 프로포절을 쓸 수 있을 리는 만무했고, 이혼소송이 시작돼 논문을 읽는 대신 녹음해 둔 전파트너의 쌍욕들을 들으며 녹취록을 체크해야 했다. 이혼이 마무리될 때 까진 전세금도 묶여있으니 당장의 생계가 어려웠다. 떠나는 대신 선택한 이직. 그것도 여의치는 않았다.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컴퓨터 앞에 앉아 해외 사는 유튜버들의 브이로그를 봤다. 하염없이 보다가 워홀 비자를 알아보길 여러 번. 나이제한 때문에 떠나려면 당장 떠나야 했다. 고양이들의 출입국 수속을 알아보다, 비행기에 태울 수는 있지만 승객당 한 명만 데려갈 수 있다는 말에 동생을 동반할까 어쩔까 온갖 수를 머릿속에 그려보다 이내 마음을 내려놓는다. 그렇게 큰 사고를 치기엔 이미 에너지를 써버릴대로 써버린 거다. 직업도 없이 고양이들을 데리고 낯선 곳에 정박한다는 건, 겁 없는 나에게조차 너무 무모해 보였으니 말이다.
결국 도망가지 못하게 나를 잡아둔 건 고양이들이다. 나는 아직도 고양이만 없었다면 바로 세계일주를 떠나거나 워홀을 갔을 거라고 생각한다. 원망하는 마음이 있는 건 아니다. 고양이가 없는 삶은 죽기보다 싫었고, 결혼을 관둔 후엔 고양이를 지키는 게 내 삶의 최대 목표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고 여린 존재들에게 내 삶의 제일 큰 부분을 내어줄 수 있다는 게 놀랍다.
나는 여전히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며 산다. 언제까지 이 마음을 참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직까진 도망이 더 힘들 것 같아 꾹꾹 누른다. 삶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고, 당장 알 수 있는 건 단지 내 손에 쥔 소중한 것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방.
드넓은 세상 한켠에 자기만의 방을 부리기 위해, 고군분투를 한다. 고양이들이 자고 있는 자기만의 방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밖으로 나돌아야 하는 건지, 가끔은 한숨이 나온다. 온종일 길바닥을 돌아다니며 데모를 하다가 자정이 넘어 내 집에 돌아올 때면 나를 감싸는 오롯한 느낌을 아직은 많이 아껴주고 싶다.
그토록 바랐던 익명의 삶은 오롯이 내가 되는 법을 알기 위한 바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새하얀 도화지에 아끼는 걸로만 채워보고 싶은 마음. 아빠 없이 자란 여자애, 달동네 출신, 이런 꼬리표 말고, 청약이나 출산 같은 말들로 내 욕망을 속이는 짓들도 말고, 오롯한 내 삶을 짓고 싶은 마음. 그 마음들을 어루만져 본다. 내 삶이 뭔지 몰라 두려울 때면 고양이들을 껴안고 일기장을 편다. 일기장을 도화지 삼아 그려본다. 마음속 깊이 바라는 삶의 모양을 찾아서, 조금씩 조금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