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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지 May 07. 2023

[검은 창 너머의 세계] 마녀의 계보를  잇다

사일런트메가폰, <발푸르기스의 밤: 한국의 마녀들>

2023년 4월,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사일러트메가폰의 7번째 전시가 열렸다. 5월 7일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 이번 전시는 중부 유럽과 북유럽에서 전해내려오는 민속축제인 ‘발푸르기스의 밤’을 테마로 했다. 발푸르기스의 밤은 1년에 한 번 모든 마녀들이 가장 높은 산인 브로켄 산에 모여 연회를 여는 밤이다. 세상의 순리를 따르지 않고 부조리를 지적한 죄로 핍박받았던 여성들이 높은 산에 모여 춤을 추고 뛰놀며 세상의 족쇄를 벗어나는 순간이다. 사일런트메가폰은 이런 연회를 서울에 옮겨 놓았다. 


이해되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마주하며 사는 여성들은 꽤나 자유롭다 여겨지는 예술의 세계 안에서도 자주 이방인이 된다. 특히 동양인 여성이라면 이중의 벽을 마주하게 된다. 여느 전시를 가도 대상화되지 않은 여성, 여성의 몸과 삶에 대해 왜곡 없이 직시하는 작품, 여성으로서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하는 작품을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애초에 여성 작가들의 작품만을 모아 놓은 전시도 잘 없다. 미술관에 남성 작가들의 작업물이 가득한 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면서도 여성 작가들의 작업물로 채워진 전시는 ‘특별전’으로 치부되기 마련이며 이런 ‘특별’ 취급 또한 잘 받지 못한다. 


애초에 기존 미술관에서 공급되는 전시의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에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을 접하기 위해서는 개인전을 찾아가거나, 규모가 작더라도 여성 작가들이 모여 여는 전시에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서 여성 작가들의 작업은 파편화되어 하나의 선 위에서 기록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일런트메가폰은 이런 문제점에서 착안해 한국의 여성주의 예술사를 정리하고 한 공간에서 즐길 수 있는 전시를 준비했다.


<발푸르기스의 밤: 한국의 마녀들>은 39년생 1세대 여성주의 예술가 윤석남부터 시작해 98년생 4세대 여성주의 예술가 작살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여성주의 예술사를 하나의 전시에서 다루며 동시에 다양한 세대의 여성주의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여성의 몸에 대해 다룬 박상은, 정윤선, 데비 한, 구지언, 작살. 여성의 일상을 담은 박희자, 정이지. 가부장제를 비판하고 전복한 윤석남, 송상희, 노승복, 박영선, 최문선, 박영숙. 여성을 옥죄는 코르셋을 지적한 김민형과 여지. 신화를 전복한 춘희. 이들은 여성을 둘러싼 여러 테마를 넘나들며 여성 자신의 이야기부터 여성을 둘러싼 폭력적인 사회를 지적하는 것에까지 이르며 모든 여성, 특히 한국 여성이라면 스며들듯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선보였다. 


이들은 ‘여성’이라는 공통된 주제 위에서 각자의 감각과 경험을 풀어놓았고, 그들의 개별적인 작품은 한국여성예술사라는 하나의 선 위에서 연결되며 관람객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했다. 시간이 흐르며 변화된 사회상 속에서도 여전히 이어져오는 여성에 대한 억압에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폭력을 직시하고 한편으로는 재생산과 여성성에 대한 여전한 통념을 시원하게 뒤집는 작품을 보며 통쾌한 웃음도 내뱉을 수 있었다. 


이 전시는 말 그대로 여성들을 위한 ‘연회’였다. 한국 여성이라는 공통된 정체성에 설명 없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작품, 한국의 가부장제와 여성혐오를 꼬집고 비웃는 작품도, 사소한 일상이지만 왠지 동감하게 되는 작품도, 폭소를 터뜨리게 하는 작품도, 함께 몸을 흔들고 발을 가볍게 만드는 작품도 모든 작품들이 각각의 매력을 드러냈고 나는 관람객으로서, 한국 여성으로서 그저 그 안에서 즐겁게 전시를 즐길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은 불태웠던 모닥불 위를 가뿐하게 넘나든다.
마녀라는 삶에 얽혀잇던 불안과 아픔은 불길 속으로 타올라
아름다운 불꽃이 되어 가볍게 상승한다.

거세게 솟는 불, 가쁜 호흡, 찰나의 광의.
마침에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자유로이 춤을 춘다.

이곳엔 도취한 자를 관망하는 이방인도 없다.
마녀들의 화합만이 존재할 뿐이다.

- 사일런트메가폰, <버츄얼 브로켄 마운틴>(2023)


사일런트메가폰은 흩어져있던 한국의 마녀들, 한국의 여성 예술가들의 계보를 이어 하나의 전시로 꿰어냈다. 여성의 작업에 의문과 비아냥을 던지는 속세를 벗어나, 이방인의 위치에서 예술을 바라봐야 하는 위치에서 벗어나 여성이기에 매끄럽게 이해되고 순조롭게 다가갈 수 있는 전시를 만들었다. 


그들이 피운 모닥불 주위로 모인 여성들은 한 줄로 꿰인 한국 여성 예술사를 직접 느끼며 즐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각각의 구슬들은 여성의 일상, 여성의 불안, 가부장제와 그 안의 여성, 동양인 여성의 몸, 여성성, 코르셋 등 여성을 옭아매는 사회를 녹여냈다. 


‘마녀’라는 이름은 구시대의 것이 되었지만 여전히 매번 새로운 이름으로 앞서가는 여성들을 붙잡는다. 작업명 대신 실명을 내세우며 과거로부터의 역사를 잇는 동시에 페미니스트 여성 예술가로서의 이름을 남기기로 결정한 사일런트메가폰의 결정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우리는 더 이상 단절되고 고립된 마녀가 아니다. 우리의 맞잡은 손과 이어진 실로 우리가 쌓아온 역사를 지켜내고 나아갈 것이다. 더 이상 ‘마녀’라는 낙인은 우리를 단절시키지 못한다. 


사일런트메가폰의 7번째 전시는 이렇게 끝이 났지만, 그들이 마련해 준 모닥불의 불씨들은 여성들의 마음에 남아 새로운 횃불로 활활 타오를 것이다. 


사일런트메가폰의 다음 전시도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글 서로소



사진출처: 사일런트메가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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