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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고맛동산 Apr 18. 2023

느림의 미학

빠르지 않아도 괜찮아

퇴사한 지 이제 세 달이 넘어간다.

이전 회사에서 치열한 시간들을 보냈기에 이번 쉼은 원 없이 늘어져있고 싶었다. 나름 느릿한 시간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것들을 처리하느라, 하고 싶었던 것들을 시작하느라 첫 달은 내내 바쁘기만 했다. 예상했던 상황이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정신없는 한 달을 보냈다. 진짜 쉼을 찾기 위해 모든 일정을 뒤로하고 기차티켓을 끊었다.


‘부산으로 가야겠어!’


언젠가부터 1년에 한 번씩은 꼭 찾는 곳이다. 어떠한 연고도 없는데 그냥 부산이 좋았다. 사람마다 그런 거 하나씩 있지 않나? 이유 없이 그냥 좋은 것. 부산은 내게 그런 장소이다. 이번 여행은 시작부터 좀 더 느긋하라는 듯, 그래도 된다는 듯, 내게 기다림을 요구했다.


‘그래! 언제든지 가능하지. 난 시간부자니까!’


집에서 가까운 영등포역으로 예매했는데 아주 보란 듯이 기차를 놓쳤다. 평소라면 왜 늦장을 부렸냐며 자책했을 것이다. 허나 자책한들 무얼 하나, 이미 벌어진 일인걸! 대신 느긋하게 서울역으로 가서 기차를 탔다. 취소수수료와 함께 좀 더 비싼 티켓을 끊게 되었지만 기존 예매한 열차보다 조금 더 빨리 부산에 도착했다. 기차를 놓친 순간부터 나를 쪼이고 있던 끈을 확 풀어헤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오히려 기차 놓치길 잘했네 싶을 정도로...! 평소라면 부리나케 짐 챙겨서 하차했을 텐데, 줄줄이 서있는 하차승객들을 보며 지금 나만이 즐길 수 있는 느림의 미학을 즐겼다.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 서울과는 다른 공기, 기습하는 추위에 흠칫 놀랐다.


‘맞다. 여기 항구도시였지! 안녕 부산! 나 왔어.’


사람으로 바글바글한 유명한 국밥집을 뒤로하고 고요한 비건 식당에 갔다. 직원은 내게 인사를 건네고 물을 주고는 한동안 오지 않는다. 기다림을 즐기며 식당 내부를 천천히 둘러볼걸... 멋진 광안대교가 보이는 창가 뷰 자리를 놓쳤다. 대신 창가에 놓인 귀여운 식물들과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건강한 음식들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쉬움을 달래듯 수변공원으로 걸어갔다. 아마 내게 아쉬움이 없었다면 아파트숲 사잇길로 빠르게 걸어 목적지에 가려했을 것이다. 누구 하나 재촉하는 사람이 없으니 느릿느릿 마음껏 누렸다. 수변공원에 도착하니 산책하는 사람, 물멍 하는 사람, 작은 물고기를 방사하는 사람 등 일상을 누리는 부산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광안리의 윤슬을 즐겼다.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더욱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그렇게 수변공원의 끝에 다다르니 광안리 바닷가가 눈앞에 펼쳐졌다. 때마침 연락 온 친구의 전화로 한껏 여유를 부리듯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수다를 떨었고, 넓은 광안리 바닷가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갈매기와 관광객들을 구경했다. 한창을 구경하다 들른 찻집도 평온하고 따뜻했다.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을 되돌아보니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종일관 느리고 차분하기만 하다. 마치 누군가의 짜여진 각본처럼.

메뉴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이전의 아쉬움을 보상이라도 하듯 광안리 해수욕장이 넓게 펼쳐진 멋진 창가 뷰를 얻게 되었다. 밖에서 걸어오면서 본 그 자리였고, 그 손님도 혼자로 보여 더 용기 내서 입장했는데 마침 그 자리를 얻게 되다니, 이거 완전 나를 위한 자리잖아?

티와 티푸드를 즐기며 원 없이 느릿한 시간을 보냈다. 일기도 쓰고, 책도 읽고, 또다시 물멍도 하고. 회사에 있을 때의 나는 오로지 하나만 보고 달려가는 경주마였다. 퇴사가 아니라면 난 여전히 회사에 매여 있었을 테고,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지는 대로 생각했을 것이다. 퇴사일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만 해도 무조건 이직하겠노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먼저 퇴사한 동료의 한마디가 나의 결정을 뒤집었다.


‘네가 보는 세상이 그게 다가 아니야. 그 이상의 것들이 회사 밖에도 많이 있다고! 그걸 너도 느껴봤으면 좋겠어.’


일은 곧 나라고 생각했던 나를 변하게 만들었고, 이직이 아닌 휴식으로 이끌었다. 경주마로 살았던 그 시간들을 채찍질하듯 강제로 멈추게 했다. 조급하고 불안할 줄 알았는데 때때마다 마주치는 브레이크들이 나의 속도를 조절해주고 있다. 이제 일이 아니라 나에게 집중해보려고 한다.

나를 위해 살아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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