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봉역에서 24년을 살아서 3호선이 친숙하다. 3호선은 압구정과 옥수 사이에서 한강을 건넌다. 압구정역을 지나면 열차가 슬슬 경사를 타며 올라가고, 점점 주변이 밝아지다가 동호대교에 올라탐과 동시에 한강 전경이 창문에 확 펼쳐진다. 서울에서 이만큼 드라마틱한 순간이 또 있을까? 어렸을 때는 3호선을 탈 때마다 엄마한테 오늘은 한강을 건너는지를 꼭 물어봤다. 압구정역에서 문이 닫히면 앉아있던 의자에 무릎을 꿇고 돌아서서 설레어했던 기억이 있다. 강을 중간쯤 지났을 때 엄마를 보려고 고개를 돌리면 반대쪽에 타 있던 분들이 신문이나 책을 잠깐 덮고 나와 같은 창문으로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나와 눈이 마주친 분들은 귀엽게 바라봐주시며 엄마랑 이런저런 (아마도 나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 장면은 아직까지도 참 소중하다.
중고등학교 때는 3호선을 타고 어딜 멀리 갈 일이 없었다. 대학생 때 지하철로 강을 건너는 것은 대부분 취하기 위해서나 취한 후였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작년 어느 날 3호선을 타고 압구정역에서 문이 닫히는데 날씨, 시간, 분위기가 딱 어렸을 때의 그 기억과 같았다. 보던 핸드폰을 놓고 오랜만에 열차의 경사를 느꼈다. 주변은 점점 밝아졌고 마침내 한강이 나타났다. 시간이 한참 흘러서도 내가 그 기억 한가운데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감정이 뒤섞이며 앞사람들을 보았는데, 열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반대편을 멍하니 바라보는 내가 이상한 사람 같아 보일까 봐 바로 고개를 숙였다. 소중한 기억에선 사람들이 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서로 눈이 마주쳤는데, 지금은 모두가 귀를 막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나도 여태껏 강을 지나칠 때마다 창 밖을 본 적이 없었다. 세상이 변한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무언갈 잃어버린 걸까.
이 날의 속상한 생각에 그다음부터 강을 건널 때면 오기로라도 핸드폰을 넣고 강을 보려고 한다. 남들에겐 서울 처음 올라온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속에서도 그 1분 남짓의 별 거 없는 시간이 좋다. 어딜 가고 있었고 뭘 해야 하는지를 잠깐 잊고 나면 한강은 그때도 지금도 그냥 흘러가고 있는 게 느껴진다. 영화 크레딧이 올라오듯 옥수역 가벽이 나타나면 생각은 일상으로 금방 돌아가지만 조금은 씩씩해진 느낌이 든다.
한국인은 공부하랴 일하랴 게임하랴 바빠서 하늘을 못 본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하늘 볼 정신도 없이 어딜 바쁘게만 가고 있는 사람들이 어렸을 땐 다들 ‘구름 진짜 빠르다’ 하면서 멍 때렸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슬프다.
그래서, 당신이 삶에 치이던 중 마침 3호선을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고, 이 글이 생각났다면, 노력을 들여서 창 밖을 한 번 바라보자. 지하에만 있다 잠깐 숨을 쉬러 올라온 열차에서 조금의 씩씩함을 얻게 될 것이다. 지옥철은… 예외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