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 and the Other, Rules and Responsibility] 2019. 11. 16 PHOTOGRAPH by CHRIS
"타인 앞에서 나는 무한한 책임을 진다."
《시간과 타자, 에마뉘엘 레비나스 Le Temps et L'autre, Emmanuel Levinas》
얇고 바스락거리는 나뭇잎을 끼고 사는 게 좋다. 사각사각 과자소리를 내는 숲길 밟으며 살고 싶다. 그것도 꿈이 되어버렸다. 돼먹지도 않고 이해도 안 되는 머리를 졸라맨다고 해서 유식해지지 않고 답답해진 마음에 먹물을 끼얹고 싶지 않기에 책도 읽지 않는다. 미친놈들이 벌려 논 일 때문에 책방에 갈 시간도 없다. 시간을 여유롭게 보낸다는 그 자체도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주체적일 수 없는 삶에 미안해진다. 이 땅에서 제정신 박으며 산다는 게 쉽지 않다. 검게 어질러진 머릿속에서 하나 쭉 뺀다. 철학? 머리가 점점 고철이 되는 건 아는가 보다. 고래 주둥이같이 발동했던 왕성한 호기심덕에 각국의 철학자 속살은 많이 찔러봤다. 다만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중얼거리던 말은 항상 같았다.
"뭐 이리 잡것들이 한가득이야? 저 한 포기 풀잎보다 못 하구만. 무겁고 두껍기만 하고 부싯돌을 치네."
반 강죄로 죄수생활을 하던 시절, 우연히 읽게 됐던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 Le Temps et L'autre》는 쇠똥구리처럼 눈알만 굴리던 단순세포의 고개를 심하게 흔들었다. 책임. 타자와의 관계. 권한. 응답. 부름. 호혜성. 호소. 요구. 대가 없는 책임. 책임의 폭과 깊이. 희생. 대체할 수 없는 고유성. 주체 의식인 영혼. 시간. 권한 없는 책임이란 말을 싫어하는 나에게 꿈같은 단어들은 공상으로 거북선을 태우고 갔다. 의미 있는 책임에 대해 생각이 가득한 책은 가볍고 얇았다. 남의 짐에 허덕여 무거운 것을 들기엔 처진 어깨를 배려하는 듯했다.
책임이라는 단어는 머리를 때리는 징이다. 그 의미가 너무 크다. 돌덩이로 가슴을 마구 짓누른다. 좋아하는 것들을 보면 한바탕 미치는 성격이라 그런지 마음 동하지 않는 물건이건 사람이건 꾸준히 바라보고 책임지며 산다는 것이 진저리 나게 싫다. 그리고 그 책임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향한 화살도 책임 못 지면서 다른 사람에게만 화살을 들이미는 모습들이 눈살 찌푸리게 싫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부름에 응하는 것이 책임이라고 한다. 책임은 서로를 향해 있다고 하던데 내키지 않는 거짓된 마음까지 돌보는 것은 부담이며 족쇄가 아닐까. 그래도 이건 어렵진 않다.
“타인 앞에서 나는 무한한 책임을 진다.”
레비나스가 말했던 것처럼 이 말은 기억한다. 눈뜨고 숨 쉬고 살아있을 때까지 기억할 것이다. 내 짐이 날 살 수 없도록 압박해 올 때, 그리고 다른 사람의 몫까지 짊어진 짐이 들기 힘들 때, 눈뜨라고 소리치는 하나의 다짐이기도 하다. 책임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자신에 대해서 책임을 짓지 않을 때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대가 없는 책임의 폭과 깊이가 얼마나 절망적이던가. 아직도 책임에 수반되는 여러 가지 일들이 무서워서 눈을 감긴 하지만 말이다. 책임에는 희생이 따른다고 한다. 희생은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아도 그 깊은 요구와 울림을 속 끝까지 볼 수 있도록 온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한다. 삭막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그런지 온몸으로 스스로를 울리는 사람을 못 봤다. 책임이 있고 권한이 있는 거지 누구에게 책임을 씌울 권한은 없는 거다. 다들 이런 이야기하면 섭섭해 하지만 기울어진 책임은 버겁다.
타인과 타인이 만나서 상대방이 속삭이는 속내를 귀 기울여 듣고 서로가 그 요구에 절실히 응답할 때 그것이 바로 책임이 되는 것을 사람들은 보지 않고 듣지 않는다. 자물쇠도 없는 단단한 장벽이 서로에게 영속될 때 타인이라는 영혼의 시간에서 사는 것이다. 자신을 비추고 타인을 비추는 투명의 창 속에서 살아있는 책임이라면 서로를 볼 수 있을 텐데 왜 사람들은 하나만 보라고 할까.
역시 일방향은 재수가 없다. 쌍방향이 안 된다면 샛길이나 오솔길이 좋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을 책임을 지지 못하고 자신의 권한만 내세우며 타인의 가슴에 멍을 만드는 그런 사람들에게서 탈출하고 싶다.
2004. 9. 1. 水
기운이 떨어져 편하게 쉬고 싶다가도 살고 싶다고 외치는 목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찬물을 뒤집어쓴 듯이 정신을 차리게 된다. 과거부터 현재까지도 살아가는 것에 고민하고 있지만, 깊은 동굴에 갇혀 있던 한때는 그 누구의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당면할 문제를 풀 사람은 출제자가 아니라 시험에 임한 당사자이다. 겉과 속이 전혀 일치하지 못했던 삶에서 모호하게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욕구는 꿈처럼 멀어져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인간은 손발이 잘리고 갇혀 있을 때 비로소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어떤 상태로 살고 싶은 것인지, 나는 왜 살고 있는 것인지, 나는 어떤 인간인지까지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선 타인에게 구체적인 형상을 제시해야 하고 그 방향성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사회적인 인간은 고립된 상태에서 진정한 자유인이기 어렵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 프로그램이 사회생활에 염증을 느낀 이들에게 인기라고 들었다. 산을 찾아 바다를 찾아 수도원과 절을 찾아 홀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공동체에서 발견하지 못한 스스로를 찾기 위해 고립을 선택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직시하면 자연적인 삶에서도 동반자는 필요하다. 생명의 기원을 살펴봤을 때 민들레 홀씨로 생겨난 게 아닌 인간은 홀로 살기 어렵다.
외면과 도피를 선택했던 사람들 사이로 책임을 맡기로 했으면 문제를 풀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문제에 대한 인식이 끝난 뒤 적극적인 해결방식을 찾다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두려움에 가득 차서 책임을 회피하고 소극적인 태도로 회의적인 생각을 가졌던 구성원들까지 끌어안아야 한다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미래는 홀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반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추동해야 균형점을 가진 첨탑을 만들어낼 수 있다.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선 먼저 스스로의 책임과 제 몫을 다하는 태도가 필수적이다.
산에서 홀로 호랑이를 만나면 호랑이를 잡거나 호랑이에게 물려 죽어야 한다. 호랑이와 친구가 되거나 선척적으로 호랑이를 호릴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했다면 결국 두 가지 선택인 것이다. 생의 실전에 뛰어들었을 때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선 죽지 않을 만큼 여러 번 물려보는 것도 필요하다. 죽음이 삶과 가까이 있음을 알게 되는 동시에 삶에 대한 경계심이 생길 것이고 두려움이 별 것 아니라는 자각을 통해 절망에 대응하는 힘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한 바퀴 생의 시간을 돌며 알아낸 것이 타자와 책임에 대한 원칙적이고 개인적인 삶의 태도라니, 규칙에 대한 기본 사고를 파해하는 철학은 생활에서 멀리 있지 않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