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ght and I in Uncertainty] 2019. 6. 1. PHOTOGRAPH by CHRIS
"미세한 입자로 이뤄진 우리의 삶은 불확정성의 원리에 놓여있다."
《불확정성의 원리,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UNCERTAINTY PRINCIPLE, Werner Karl Heisenberg》
나는 물리와 수학에는 제로의 감각을 지니고 있다. 중 고등학교 때 기계적인 학습을 강요하던 담당 선생님들이랑 대판 싸우고 나선 교과서를 창 밖에 던져버리고 거들떠보지 않아서 수학은 덧셈과 곱셉 정도만 하고 아인슈타인의 비사(秘史)나 뉴튼의 사과같이 먹고 곱씹는 이야기만 안다. 미분적분, 대수학, 알고리즘 같은 단어는 신문지 상에서 눈 속에 주워 담아 봤고 물질의 질량측정, 광자기학, 파동의 입자 값 같은 말들은 타인의 입에서 많이 들어봤다. 우주의 신비를 발견하고 광학의 세계로 접근할 수 있을 절호의 기회였는데 성질부리다가 혼자서 무덤을 파버린 것이다.
아까 커피를 마시다가 이상함을 발견했다. 제대로 타지지 않은 프림이 부글부글 거품을 내며 나선형을 그리는 걸 보고 분명히 적당한 비율과 동률의 기회로 물을 집어넣고 설탕을 넣고 수저로 저었는데 어제와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에 궁금해졌다. 또다시 잡다한 생각이 머리를 흐리고 있다. 세상에는 뭐든지 정해질 듯하면서 비껴가는 법칙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이야기가 난무한 《불확정성의 원리 PRINCIPLE OF UNCERTAINTY》라는 책을 본 기억이 있는데 되살려서 풀어봐야겠다. 불완전한 삶에 대입되는 불확정성의 원리는 적합한 사고적 재료이다.
요즘 삶을 돌아보면 무엇하나 규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현상에 놓여 있는 분열된 실체의 가지들을 얼마나 정확하게 분류하고 측정할 수 있을까. 하이젠베르크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노력도 본질적으로 의미가 없다고 한다. 자동차나 트럭처럼 고체화된 물질은 유한계에서 정확한 속도와 위치를 바로미터 하는 것은 가능하나 작은 먼지나 입자들의 세계를 관측하는 것은 공간 속에 놓여 있는 다양한 변수 조건들과 대상에 마찰하는 미세한 배수의 값 때문에 오차가 날 수밖에 없다고 하니 실망스러울 따름이다.
사물의 위치와 속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옷과 피부가 마찰을 일으키며 정전기를 발생시키는 순간 갑자기 몸을 비틀면서 옷을 벗을 벗으면 정전기의 전자기파와 속도 값이 비틀림 없이 옷을 벗어젖혔을 때처럼 일정하게 유지될 수 있을까? 결괏값은 대상의 중복되는 위치와 방향성에 의해 변화될 것이다. 또한 중간에서 생성되는 조건절과 미묘한 움직임에 따라 매번 차이가 날 것이다.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들의 파동이 공기 중에서 어떤 흐름을 띠느냐가 중요하다. 분명 열이 발생하고 그 안에는 에너지가 움직이고 있을 텐데 흔들리는 질량과 속도는 어떻게 재 볼 수 있는 것인가. 시간의 흐름에 놓인 에너지원들은 어떤 기폭제를 타고 파도처럼 생겨나서 기포처럼 소멸되는 것일까.
아침에 일어나서 빛을 관찰해 보면 먼지의 파장을 발견하게 된다. 숨을 거칠게 쉬면 쉬는 대로 입자의 방향이 변화하게 되고 갑자기 일어나서 바닥을 털면 먼지가 분해되어 보이던 것도 볼 수 없게 된다. 빛이 가득할 땐 보이는데 움직임을 통해 빛을 차단하면 입자들의 세계는 보이지 않게 된다. 생활 속의 작은 현상에서 자꾸 기억을 파 들어가는 것도 괜찮겠다. 산란하게 쪼이는 삶의 빛을 관찰해 본다. 현대의 역사, 경제, 정치, 문화의 흐름이 거시적 세계관에서 미시적 세계관으로 옮겨가는 것도 광포하게 벌려놓았던 이론적인 잔재와 구호의 허상들이 권력자들과 정책자들의 일률적인 통합 욕구에서 변질되었다는 반성에서 시작된 것처럼, 하나로 뭉쳐진 삶에서 정신을 얽어 매왔던 구속들을 벗어던지기 위해선 모든 걸 조각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낙관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알 수 없는 내일이 멸망할 것이라고 절망하면서 타인의 불안을 조장하거나 혜안을 가진 미래의 선지자가 된 것처럼 신들에게 내일을 기탁하지 않는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헬릿 카(Edward Hallett Ted Carr)가 말했듯이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본다는 밀물론과 썰물론은 수용한다. 그러나 블랙홀에서의 정보 유출(Black Hole Information Paradox)을 인정한다는 스티븐 호킹의 충격적인 발언은 수용할 수 없다. 지구에 앉아서 떠돌아다니는 입자들이 소리치는 세계를 유한계의 시간에 놓인 인간이 심도 있는 관찰과 직관만으로 어떻게 알겠는가. 솔직히 미시사를 연구하거나 불확정성의 논리를 전개해 사람들을 충격과 혼동으로 몰아넣는 궤변들은 육체적 한계를 인식한 인간들이 자신의 세계조차 볼 수 없음을 좋은 말로 포장하는 거나 다름없다. 가까운 일상에서 내면의 세계나 자연을 들먹이는 그 자체가 왠지 모르게 도(道)와 직결되어 보이므로 고상해 보이고 그 영역에 감히 범접하기엔 못난 미물 같아서 반론의 여지를 제기하기도 쉽지 않다.
하이젠베르크는 자연현상과 인간계를 관찰하여 물리학에서 접근되는 상대적인 지식이라는 불투명한 어려움을 제거하고 현재를 바라볼 수 있게 한 물리학자이다. 일상의 관찰을 벗어난 무한대의 인식까지 접근해야 한다는 여타 과학자들의 의견도 충분히 납득하지만 그 이상은 나도 모르겠다. 난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보다는 파인만(Richard P. Feynman) 박사가 좋다. 외모만큼이나 생각이 수더분한 게 인간적이라서 마음에 든다. 베르나르(Bernard Werber)의 《개미 Les Fourmis》처럼 찰나의 세계를 살았던 한 잠꾸러기가 한바탕 꿈에서 깨고 난 뒤에 빛이 가득한 세계를 봤다던데 요즘 나의 꿈은 아주 산만하기 그지없다. 무슨 꿈이 나올지 불확정이다.
2004. 9. 24. FRIDAY
2025년은 양자역학이 탄생한 지 100주년으로, 유엔에서는 올해를 <세계 양자과학기술의 해>로 지정했다. 1925년은 양자 역학의 아이디어가 형성된 해이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미시세계에서 입자의 운동과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행렬 역학 Heisenberg matrix mechanics>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하였고 에르빈 슈뢰딩거는 물질의 진화 상태를 기술하는 <슈뢰딩거 방정식 Schrödinger equation>을 설명하여 파동역학의 관점에서 양자역학을 완성했다. 두 이론은 현대 양자역학의 기초를 이루게 되어 반도체, 레이저, 양자컴퓨팅, 양자암호 등 다양한 기술적 혁명을 이끌어왔다.
천재 수학자 존 포브스 내쉬(John Forbes Nash, Jr)의 삶을 그린 <뷰티플 마인드 A Beautiful Mind>라는 영화도 있지만 솔직히 수학자들보다는 물리학자들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 우주적인 암호들로 구성된 수학은 추상적인 논리체계와 보편적인 기호로 총집된 언어적인 원리인 반면, 물질세계로 이루어진 자연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물리학은 삶에 적용가능한 법칙과 밀접한 각종 이론들의 결과물로 가득하다. 삶을 이해하기 위해 이과로 갔다가 예과로 갔다가 문과로 가는 정신없는 행로를 반복한 고등학교 때에는 대학을 꼭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아무렇게나 넣은 곳에 덜컥 걸리는 바람에 사회와 밀접하게 사고하는 것으로 의식의 진로를 정했다. 당시는 주변도 불확정에 미래도 불확정에 심리도 불확정이었다. 각박한 조건절의 삶이 불안정하다 보니 살아가는 행로가 이리저리 바뀌어버려서 그 안에서 존재감을 상실할 때가 많았다. 한 때는 외부로 원망을 돌리기도 했다. 스스로도 확정될 수 없는 심리 속에서 하루를 헤매었다.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지니 남 탓 할 게 없다. 원자보다 더 소립자인 알 수 없는 내가 그저 불확정성으로 쪼개지면서 정신없음이다.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심리학, 인류학, 법학, 교육학, 지역학 그 모두가 한데 섞여있는 사회과학 문화권에 살고 있으면서 자연 과학의 순수한 열정이 철학적인 사고와 함께 결합된다면 인식의 범위가 폭넓게 펼쳐지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하루를 잘게 나누어 쓸 수밖에 없는 대가의 저작들은 매사를 쪼개어 현상을 분석하는 열정적 태도를 내포한다. 글을 읽다 보면 타인들은 알차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가 또한 하나에만 집중하여 문을 닫고 있는 형식이 답답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나의 뭉터기로 표현했다가 낱개로 쪼개지기도 하고 조각으로 산재되었다가 다시 하나로 합산되는 그런 유동성은 정신없을까? 예전의 기록들을 정리하고 아이디어를 편성한 뒤 하나의 주제로 집중해서 쓰기엔 현실적인 삶의 작업이 정리되지 않아서 우선순위에 대한 일의 순서를 재배치하고 있다. 삶을 증명하기 위한 수많은 이론과 정의에도 불구하고 세기를 거쳐 남아있는 기록들은 내부의 목소리를 발산하기 위한 각 개인들의 메아리로 들린다. 나보다 앞서 살아간 자들의 이야기에 얼마나 진실하고 열렬하게 응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흘러 불확정한 얼굴의 누군가가 나의 허기지고 궁금한 목소리에 답을 할 수도 있다. 안팎으로 부지런히 표현하고 소리치는 것은 미지의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여기며 오늘도 흩어진 상념들을 정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