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살던 외진 곳엔 일 년에 한 두 차례 곡마단이 지나가곤 했다. 요란한 북소리로 존재를 알리고 진한 화장과 화려한 장식으로 시선을 끌던 악단들의 원색이 주는 강렬함과 활기찬 율동에 아이들은 한바탕 호려버린 시선을 던졌다. 트럭을 개조한 마차 속은 궁금증 투성이어서 호기심이 많았던 한 꼬마는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따라 속눈썹이 엄청 긴 언니 뒤를 쫓았다.
풍성한 배추 속을 자랑하듯 겹겹이 레이스가 달리고 치장이 겁나게 융단을 깔던 옷들과 장신구들은 반짝거리고 화려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모양새는 구겨지고 펼쳐진 원단들은 땀에 절어 시큼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절여진 땟국물은 흙으로 장난친 손발 못지않았다. 이름과 나이를 묻는 그녀가 손에 쥐어 준 사탕을 빨면서 웃고 있었지만 실망은 컸다. 그곳의 주렁주렁 매달린 화려함은 거짓이었고 묵은 창고보다 더 탁한 향기로 차 있었다.
자꾸 날 안으려던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밖에서 노래하던 목소리와는 달랐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은 없지만 여운만 남았다. 다정한 소리는 크지는 않았다. 많이 쉬어 있었고 떨렸다. 그게 참 불편했던 모양이다. 꼭 잡은 손을 뿌리치고 어두컴컴한 그곳이 지겨워서 뛰쳐나왔었다. 그때 그녀를 안아줬더라면 이런 생각도 든다. 마음이 외롭고 쓸쓸했을 거라는 생각이 지금에야 든다. 아마 사는 속을 보지 않았다면 그들의 피리 소리를 따라 어느 뫼에서 쉬고 있을지 모르겠다.
길 위의 삶에서 펼쳐지는 광대의 연기는 평행선의 고조가 격해질수록 우울하게 들린다. 그날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잠시 머물렀던 음침한 마차 속에 슬프게 울렸던 한 여자의 음성처럼, 그녀가 걸었던 길은 바닷가시골소녀 젤소미나 (Gelsomina)가 걸었던 날품팔이 길과 뭐 다를까. 떠돌이의 삶이지만 예술가의 긍지를 느끼고자 하는 한 여린 마음을 후비는 현실의 조련사 잠파노(Zampanò),
"세상은 포악한 것이다. 너의 노력도 헛되고 사랑도 무의미하니 기대를 버려라. 오직 빵만을 구걸하고 돈을 얻기 위해 땀을 흘려라. 그러다 보면 살게 된단다."
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많이 들었던 말이고 그렇게 살고 있고 그런 이들을 자주 만나지만 나를 되새김하게 망치질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치미는 욱함을 참기 힘들다. 거리에 버려진 아이가 부는 피리는 여린 풀잎 소리를 내는데 어째서 하루종일 철의 사나이를 알리는 목청만이 쉬어야 하는가. 세상의 모든 것은 쓸모가 있다는 말을 믿으며 겨울을 웅크리고 지낸다면 씨를 틔울 수 있을까. 결국엔 주름진 계곡과 수만 가지를 뻗칠 나무를 가슴에 심고 길에서 눈 감게 되는 우리네 삶인데 달리 보고 싶다.
팔려가는 아이들은 먹을 것이 풍족해진 지금은 없을 듯싶지만 여전하다. 유랑극단은 쇠퇴했지만 그들이 남긴 애수 어린 곡조는 누구네 창틀에 달라붙었는지 자주 들린다. 마스카라 번진 걸 보면 마음이 저리는 데 그 이유는 전적으로 이 거리의 여인 때문인 듯싶다. 아무리 아름답게 화장해도 현실의 삶은 광대를 위한 춤곡에 지나지 않다고 말해준다. 딸꾹질이 섞인 경기도 아프다. 모질게 대한 여인에게 미안하다며 짠 바람을 전한 들 꺽꺽대는 딸꾹질보다 더 격할까 싶다. 가슴에 멍을 지우지 못해서 눈을 뒤집고 기억에 의존하여 익숙한 나팔을 불어야 할까 보다. 어떤 이가 아무 뜻 없이 콧노래로 흥얼거리는 익숙한 가락은 당신의 발걸음을 붙잡을 것이다.
<길 La Strada>은 추억의 영화로 KBS 명화극장에서 명절 특집이면 방영되었다. 이 영화도 세네 번 봤나 보다. 어린 날에는 영화의 길이만큼 지루하고 초라한 영화로 기억되었다. "왜 저렇게 힘들고 어렵게 살아야 할까?" 이해되지 않는 길 위의 삶이었다. 크면 활기차고 재미있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영화에 대한 감상을 떠올리면서 옛 기억을 되살리니 곡마단과 마주친 어느 날이 어렴풋하다. 나의 기억인지 영화 속 내용인지 모르겠다. 여자의 얼굴은 기억 안 나는데, 어두운 곳에서 빛나던 눈물은 생각난다. 짐들이 가득했던 마차 안의 검은 공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게 답답했다. 어두운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고, 사람들과 인사도 대충 하고 떠난 것 같다.
처음 여행했을 때 길을 잃어버릴까 두려웠던 경험이 있다. '홀로' 걸어가는 인생에서 미지(未知)는 우리가 알지 못하기에 신비롭고 경외시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찾아가는 길이 여러 갈래라 지도에도 없는 낯선 길로 접어들게 되었을 때, 타인들이 살고 있는 흔적은 보이지만 여행서적에도 설명되지 않은 길이 덩그러니 놓여있음을 알았을 때, 그리고 처음 가본 그 길에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의 별다르지 않은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먼 곳을 돌아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에 허탈했었다. 결국 여행을 하면서 이 여행을 왜 하게 되었는지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근원적인 물음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에게나 처음 가본 길은 미로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고 몇 시간을 헤매어 가고자 했던 길에 도달했던 그 당시에는 목적지를 만났다는 안도감이나 성취감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언젠가 걸었던 길을 곰곰이 되짚어보니 목적지에서 받았던 인상보다 홀로 걷고 생각하고 찾아다닌 공감각적 노력이 더 기억에 남는다.
길을 떠날 땐 출발지로 다시 되돌아와야 한다는 의무감과 함께 부메랑처럼 움직이는 회귀의 본능이 같이 작용된다. 삶은 태동과 함께 성장기가 있고 정체기가 있고 쇠퇴기가 있고 소멸되는 비정기적 순환을 통해 끊임없이 지속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Abbas Kiarostami)의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And Life Goes on>처럼, 혹은 그리고, 그렇게, 그러나 등 다양한 수식어가 붙은 자기만의 생은 계속될 것이다.
2017. 7. 20 THURSDAY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나의 대상에 대해 바라봄이 달라진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삶에 대해 긍정할 부분도 생긴다. 여행길, 출장길, 배움 길, 만남과 헤어짐의 길. 밤길을 달려 거리를 떠돌다 보면 안정되지 않은 삶을 그리면서 내일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했던 시절이 중첩된다. 우리가 사는 모습에는 정답은 없을 것이고 나는 언제나처럼 그렇게 방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