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APTATION, READING STORIES

독서 후의 개작(改作), 로제 그르니에, 미셀 투르니에, 앙드레 도텔

by CHRIS
[Island of Wounds] 2022. 09. 10. PHOTOGRAPH by CHRIS


<로제 그르니에 Roger Grenier> 세 줄의 독서
20050214.MON


그 남자가 여자의 젖가슴에 그렇게 집중하고 있는지 몰랐다. 온통 젖가슴, 젖가슴뿐이다. 뾰족한 젖가슴, 벌어진 젖가슴, 늘어진 젖가슴… 그는 구강기가 만족되지 못한 인간인가. 과부는 과거를 가진 여자라? 말이 쉽지 않니?


"삶이란 얼마나 사람을 상하게 하는 건지!"


책을 읽는 건지 마는 건지, 불행을 단 3줄로 요약한 그녀의 독서방식에 무릎 치며 웃었다.

행복한 가족들은 모두가 한데 모인다.
불행한 가족들은 각기 자기 나름대로 불행하다.
오블론스키 집안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한데 모여도 불행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불행을 숨기면서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말이다. 그는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를 알고 있었다. 형이상학적으로 말하는 건 신경쇠약 징조라니! 하지만 그녀는 상심한 표정을 짓곤 침착하게 말했다.


“내가 보기엔 미치광이는 두 종류가 있어. 자기가 나폴레옹이나 되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물론 그 사람들 생각은 틀렸지. 그리고 인생이란 끔찍한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들 생각은 틀린 게 아니야.”


모니끄라고 불리는 여자는 평범한 신경쇠약이었다. 좀 심하고 한 번에 낫지 않는 신경쇠약.


로제 그르니에는 지루해질 때쯤이면 괜찮은 문장을 들고 나온다. 글을 엉망으로 뒤죽박죽거렸다. 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를 읽던 여자에게 남자가 대답한 말은 가관이었다. 나는 배를 잡고 쓰러졌다.


“뭐라고, 그 여자가 기차에 뛰어들었어?”


도자기 만드는 일을 시켰더라면 광기에 사로잡힌 안나는 기차에 뛰어들지 않았을까? 가마에 구울 수 있는 것은 광기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미셀 투르니에 Michel Tournier> 레몬과 동화
20050215.TUE


1. 레몬 = 죽음

수업시간 중에 시큼한 레몬을 먹는 계집애가 있다.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된 인물에 맹렬한 호기심을 가지고 태연하면서도 광란한 비전을 적어내는 개성을 지니고 있다. 무미건조하고 음울한 권태에 철저하게 빠져 아름다운 초록색 유리조차 불건전한 회색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 앙증맞음. 공증인의 딸. 열두 살에 공증인 곁에 자신을 두고 떠난 엄마. 낮은 흐느낌이 딸꾹질과 같다는 것을 일찍이 알았다. 치명적인 독버섯에서 죽음과의 친화력을 발견해 내고 떡 벌어진 권총의 어깨에서 마지막 섹스를 상기하며 밧줄을 보곤 기념비적인 피안을 찾는다


"권태란 일종의 범세계적인 전염성을 지닌 것으로 전 세계에 그 해로운 물살을 밀어붙인다."


독버섯. 권총. 밧줄. 한꺼번에 끝내야 한다. 남자의 코트 속에 묻어둔 여자에 대한 상상은 너무 웃다 죽어버렸다는 생태학적인 강의로 끝나고 말았다. 이젠 살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에 사로잡힌 여자.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죽음은 밀초를 먹인 기요틴 위로 편안하게 흔들렸다.


소녀와 죽음이란 미셀 투르니에의 단편을 보다가 받았던 인상을 가볍게 줄였다. 미셀을 떠올리면 종 모양의 니트모자가 함께 따른다. 피에로 같이 삐딱한 고개. 나는 시니컬한 비웃음을 좋아하는 편이다. 인생이 삐딱선 타고 줄타기를 하거든. 레몬 위에서 혀를 놀리면 시큼하고 아찔한 맛에 웃지만 확실히 재미있어서 그런 건 아니듯이 죽음도 그런 게 아닐까? 찡그린 웃음과 눈물이 함께 고이지만 그건 죽음을 씹었기 때문이다.


2. 섬도 늙는다

홀연히 사라졌던 로빈슨 크루소가 22년 만에 돌아왔다. 검둥이 하인 프라이다도 동행했다. 그는 평범하게 생활에 적응했다. 딸 뻘이 되는 처녀와 결혼했고 과거는 괄호 안에 묻혔다. 그러나 불안은 다시 섬처럼 솟았다. 바른생활 검둥이 녀석은 온 데다 씨를 뿌리고 나섰다. 지쳤다 쓰러진 녀석은 카리브 섬이 그리웠는지 이웃집에서 거액의 돈이 사라진 날 없어졌다. 모험이었고 고독했었고 찬란했던 비원. 놈은 그곳으로 간 게야. 크루소의 말수는 줄어갔다. 부인이 죽고 나서 그는 곧장 집을 팔고 섬을 찾아 떠났다. 그리고 여러 해가 흘러 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찾을 수 없었다. 낡은 화물선의 요리사 보조로 들어갔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배에서 몇 년 표류했지만 힘만 소진했고 돈을 탕진했으며 헛된 탐험에 몸은 녹초가 되었다.”


그때 선술집에서 이야기를 듣던 늙은 키잡이가 말했다.


“섬을 찾았지만 섬을 못 알아봤구먼. 섬은 너와 마찬가지로 늙어버린 거야. 모든 게 빨리 변하는 열대지방에서 너무 늙어버렸어. 이 멍청이야! 거울 좀 쳐다보라고. 섬이 널 알아보던가?”


모두들 웃었지만 크루소의 살벌한 눈길이 닿자 입을 다물었다. 그날 밤 선술집에는 끝날 것 같지 않은 엄청난 침묵만이 흘렀다.


로빈슨 크루소의 末路는 이러할까. 늑대 소년처럼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는 태초의 낙원을 잊지 못하는가. 밤새도록 달을 보고서 울었던 목소리를. 어미 것이든, 아비 것이든, 형제 것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런데 다행스럽게 돌아갔지만 그곳이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의 모습일 거라고 누가 장담하는가. 나는 너와 함께 늙어가지 못했다. 다른 곳에서 너무 늙었다. 가까이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는 너. 각자의 섬에 사는 사람들은 시간이 주는 광대한 장벽을 헤아리지 못한다. 여행은 그래서 슬프다. 모든 것을 봐야 하니까. 흘러가는 순간에 놓인 비슷한 삶. 돌아오고 나면 난 이미 내가 아니다. 미셀의 단편을 읽다가 나의 어린 꿈을 생각했다. 소녀는 죽었고 크루소도 섬에 돌아가지 못했다.




<앙드레 도텔 André Dhôtel> 뱅상의 귀
20050227.SUN


뱅상이 귀를 긁을 때는 좋지 않은 징조였다. 그것은 난처한 기분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가면서 엄청나게 그를 매혹시키고 있다는 증거였다. 선원으로 취직해도, 막일꾼으로 돌아서도, 며칠 되지 않아 매번 퇴짜를 맞는 그는 가족들에게 어처구니없는 팔자라는 인식을 안겨줬다. 뱅상은 오직 눈 딱 감고 복종을 하는 길 밖에 없었지만 그가 보기에는 이 세상에 진실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점차 풍경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게 됐다. 어렴풋한 소리에서 발소리, 종소리, 뱃고동 소리, 갈까마귀 우짖는 소리, 청색 파리소리, 소사나무 숲 바람소리, 부서지는 파도… 이것만이 중요했다. 그는 이 모든 소리들이 무한한 심연에서 공간을 찢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기다림의 지평에서 울리는 기적소리는 만족스러운 고통의 비명이었다. 기이하고 진부한 痛.

어느 날 해변가를 걷던 뱅상은 낯 모르는 처녀가 창문을 열어놓고 소리치는 걸 들었다. 그건 빛인가, 소리였던가? 키가 크고 아름답지만 불쾌한 성미와 사사건건 트집 잡는 심술궂음. 일터에서 퇴짜를 맞는 것까지 자신과 똑같은 아멜리. 그는 맑고 세차고 빛나는 목소리에 푹 빠졌다. 미칠듯한 즐거움과 혹은 멋진 절망감의 표현! 한편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가 내지르는 날카로운 속사포 목소리에 무감각한 남자를.


“흥, 나무토막같이 생긴 녀석이 부드럽게 나오니 더욱 꼴불견이지 뭐야?”


처음에는 그를 외면할 생각이었지만 떠들썩한 시비를 걸고 싶은 욕망에 먼저 말을 걸었다. 시시각각 만사가 엉망으로 되길 원했기에. 자신의 고함에 끄덕하지 않는 남자의 증오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참으로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일 것이다. 철저히 병신 노릇을 하는 남자에게 아주 기나긴 고함소리를 되풀이했다.

뱅상은 사랑과 분노가 섞인 기다란 목소리에 놀랐고 곧 귀를 긁었다. 아멜리는 귀를 긁는 행동을 보고 그의 가슴속에 몰지각한 결정이 지어진 것을 알았다. 그리곤 소리쳤다.


“얼간이!, 절대로 니 거가 되지 않을 거야!”


그는 난간으로 다가와서 조그만 돌의 파편을 억센 힘으로 던졌다. 그녀는 날아가는 돌멩이 소리에 오싹하여 몸을 돌리다가 바닷물에 빠졌다. 그도 뛰어들었다. 아름다운 여름날이었다.


“난 바보야. 그렇지만 네 목소리를 못 듣게 될까 겁이 났었어. 세상 그 무엇보다 네가 고함지르는 게 제일 좋아.”


둘은 서로에게 딱 맞은 연인이 되었다.

이튿날, 심하게 과음한 그는 자기가 가게에서 가담한 싸움을 늘어놓았다. 아멜리는 칭찬을 잔뜩 늘어놓았다. 갑자기 나긋해진 목소리에 실망한 뱅상은 그녀와 헤어졌다. 그리고 일주일의 코미디가 시작되었다. 만취한 어느 날 저녁, 그는 물 웅덩이에 비친 자신을 보고 갑자기 귀를 긁었다. 아멜리가 떠올랐던 것이다. 수레국화와 베로니카와 탱알 속으로 풍성한 꽃다발을 만들어서 그녀에게 갔다. 그러나 여자는 용서할 수 없었다. 꽃다발을 자근자근 짓밟고는 기가 막히게 고함을 지르며 그를 멍텅구리 취급했다.


“가버려, 가버리라니까!”

잔뜩 취한 데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기쁨에 얼이 빠진 그는 물속으로 뛰어들어 헤엄을 쳤다. 아멜리는 그를 내버려 두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소문이 돌았다. 그는 지난밤 돌아오지 않았다고! 여자는 방파제 끝까지 나가 바다를 보며 욕을 퍼부었다. 바로 그날 저녁 아멜리도 종적을 감췄다. 뱅상은 물이 빠지고 난, 이튿날이 되어야 술이 깼다. 너무 많이 취해있었던 것이다. 아멜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는 흐느끼며 모든 불행의 근원이었던 모래사장에 이르렀다.


“살아야 했다고. 알아들었어? 그냥 여기 있기 위해서라도. 파도처럼, 자갈돌들처럼. 파도와 함께. 새들과 함께. 모든 것과 다 함께. 빛과 함께 말이야. 이 망할 놈의 계집애야.”

“너 뭘 그렇게 재잘거리고 있니?”


온종일 숲을 헤매다가 바닷가에 도착한 아멜리였다. 그녀는 분노에 찬 뱅상의 목소리를 듣고 기쁨에 넘쳤다. 드디어 그는 화가 난 거야! 뱅상은 날카로운 목소리를 듣고 황홀해졌다.


“너는 왜 도망쳐버렸지? 이 망할 놈의 계집애.”


그는 점점 강하게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날 골린 걸 절대로 잊지 않을 거야.”


아멜리도 소리쳤다.


“나도 절대 잊지 않겠어. 세상 끝장나는 날까지 매일같이 너에게 시비 걸 거야.”


그는 황홀한 표정으로 되풀이했다.


“매일같이.”


그리고 급작스러운 어조로 덧붙였다.


“죽을 때까지.”


여자는 가장 분별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가 죽는댔어, 이 병신아!”



앙드레 도텔의 이야기는 정말로! 너무나! 재미있다. 일전에 글을 읽다가 한참을 깔깔댄 뒤에 줄여봤는데, 너저분한 장식이 없어서 간략하는 게 아까웠다. 난 병신같이 연애질을 하는 연인들이 좋다. 누구에게는 소음이라도 누구에게는 황홀한 목소리잖아. 멀찌감치 사랑하는 짓거리를 보고 있으면 머저리 반푼어치도 안 되는 놀음이다. 그것이 사랑인가? 난 함부로 죽지 않을 것이다. 정말 너네, 왜 아무 때나 따라 죽고 지랄이야. 질기게 살고 놈한테 시비 걸라니까! 엉뚱해지는 가운데 욕만 늘어난다. 이러다 성격파탄자가 될지 몰라. 열망했으나 떠나가지 못했으니. 귀가 안 좋아서 그런지 요새 이비인후과 질병엔 아주 빠삭하다. 덕분에 아침마다 중얼거리는 농담은 내 즐거운 레퍼토리가 됐다.


귀에서 자주 물이 찬다.

잠자고 나면 바다에 가지 않아도

물이 가득 고인다.


소라 껍질의 뱃고동 소리
귀는 나에게 신호를 알린다.

붕붕, 떠나가렴!


나 떠나갈 땐 귀가 신호를 보낼 거야.
그래, 오늘이야. 떠나가렴!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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