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OP CAR

<배설과 예술, 시간의 철학> 똥차. Merry Christmas!

by CHRIS

똥차 가고 새 차 온다.


똥차는 한마디로 헌 차인가 보다. 좁게 말하면 인력시장에서 값어치 없고 쓸모없는 인간,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가치의 사람, 특히 남자를 가리켜 "똥차"라고 지시한다. 똥차와 반대로는 "된장녀"가 있다. 허영심에 가득 차 자신의 수준에 맞지 않게 사치를 일삼는 인간, 이성이나 가족에 의지해 과소비에 빠진 여자를 가리킨다. 사실 똥이나 된장이다. 먹을 수 있느냐 혹은 먹고 난 뒤의 결과물이냐의 차이긴 하지만 멀리서 보면 색도 비슷하고 질감도 흡사하고 흐물거리는 것도 유사하다. 일전에 동화책에서 봤는데 된장 푸러 갔다가 똥 퍼다가 된장찌개를 끓인 어리석은 부부의 이야기도 있었다.


나는 똥차가 좋다. 정확하게 말하면 시간에 따라 감가상각을 포함하고 있는 경험의 사물들은 의미롭다. 현재 몰고 있는 차도 소위 똥차인데, 2007년도에 구입한 이 차는 지금은 값어치가 똥값이 되었어도 가장 유용한 재산목록 1호이다. 십 수년간 이리저리 찧고 박고 난리부르스이지만 큰 사고 한번 없었다. 사업을 시작했을 때 작품들과 각종 짐들을 여기저기로 날라서 돈을 벌게 한 기특한 친구다. 수리비용을 따지면 새로 사도 될 것을 엔진모터부터 차체 회전축, 가죽 시트부터 각종 내부장기를 전체 다 갈면서도 계속 몰고 있다. 자동차수리점 사장님도 만약을 대비해 구형은 스페어로 두고 신차 구입 예약을 하라고 충고했다. 새 차를 구매하려면 인건비와 부품 제작상의 문제로 몇 개월의 예약이 필수가 된 코로나 시절부터 새 친구를 들이는 문제는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성질상 하나가 종료된 뒤 새로 바꾸는 습관이 있어서 두 대를 두면 어디다 둬야 할지 관리는 어떻게 할지 정하지 못해서 완전히 망가지기 전까지는 그냥 탈 예정이다. 오래된 차를 부르는 애칭이 있다. 빵빵이. 온갖 세월의 상처를 자연스럽게 선보이는 빵빵이는 어디에 놓아두어도 익숙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토박이다. 스피드와 뽀대를 즐기는 사람들은 스포츠카의 날랜 속도와 깊숙한 승차감을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SUV처럼 시야가 높고 널찍하며 적당히 큰 차가 좋다. 여러 종류의 차를 접대차 타 봤지만 벤츠건, 포르셰건, 람보르기니건, 벤틀리건 겉모양에 비해 승차감은 별로다. 사물이란 무릇 감각에 익숙해지고 나서 인체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물건을 오래 쓰고 보완하며 관리하는 습관을 통해 개인적인 기호와 사물의 지속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새 친구를 만들려고 옛 친구와 이별하면 이런 친밀함을 가지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쿠르릉 시동을 켜면 행운부르스의 전율이 느껴진다.


똥으로 차(茶)를 만들면 마시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최고급 똥커피는 있다. '루왁 커피'라고 인도네시아에서 재배, 생산되는 이 커피는 "코피 루왁 (kopi Luwak)"으로 불린다. 루왁은 인도네시아 말로 사향고양이를 가리킨다. 루왁커피는 사향고향이의 똥에서 추출한 커피의 한 종류이다. 사향고양이한테 커피 열매를 먹인 뒤 그 고양이가 싼 똥에 들어간 원두를 골라 잘 세척한 후 깨끗해진 원두를 로스팅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생각하면 역겹지만 모기 눈알을 박쥐똥에서 추출해서 비빈 음식도 몬도가네 식사에 집중하는 미각의 세계에선 최고급으로 쳐준다. 나올 수 없는 적은 양 때문에 괴이한 미식에 탐닉한 사람들은 찾는다. 이 루왁커피 역시, 가격이 일반 원두의 13-15배라 사치품으로 속할 만큼 고가로 판매된다. 한쪽에선 똥이라 하찮게 보고 한쪽에선 똥발린 것들도 세척해서 비싼 돈 주고 먹는 우리의 세상은 참 희한하다.



시골에선 똥이 귀하다. 삭혀서 거름으로 쓰면 인간이 귀한 것들을 모아 다양하게 먹은 똥만큼 건강하고 유기질이 풍부한 비료는 없다. 다만 부패의 과정에서 암모니아의 발산이 진행되면 엄습하는 향기가 온몸을 감싼다. 썩은 냄새를 뒤덮는 오물 덩어리가 땅 속의 무기질과 만나면 생명을 발아할 수 있는 좋은 거름이 된다. 그런데 사람이 군집된 곳에선 얼마나 먹어대는지 똥이 남아돌아서 돈을 주고서 똥을 버려줘야 한다. 똥냄새가 원래 강하긴 한데, 육식을 많이 하는 도시인의 똥뚜간은 역하다. 채식을 주로 하는 똥은 무기질도 많고 냄새도 그리 강하진 않다. 요즘 똥은 버리고 비료는 화학적으로 생산해서 만들어낸다. 전 세계의 유통이 잠시 멈췄던 코로나 시기, 화학 비료값이 엄청 올라서 제한된 자원을 이용한 자연유기화합물의 생성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었다.


어렸을 땐 파란색, 초록색 똥차가 정기적으로 정화조를 푸러 왔다. 찻길을 보면 똥차들이 부지런히 똥을 치우러 다녔다. 친구들끼리 똥차를 하루에 몇 번 봤는지를 따져서 내기도 했다. 적게 본 사람이 아이스크림 사기, 그런 유치한 내기였다. 즉, 똥차를 많이 봐야 행운이 깃든다고 믿었다.


똥과는 인연이 많다. 호기심과 흥이 강했던 유치원 시절, 푸세식에서 후처리를 하다가 그만 발을 잘못 놀려서 부모님의 슬리퍼 한 짝을 똥뚜간에 흘리고 말았다. 장대를 가지고 신발을 꺼내려다가 신발이 더 깊숙이 들어가는 바람에 그날 신발을 잃어버린 것을 고백하고 오지게 맞았다. 부모님은 똥차를 불러서 똥을 푸고는 신발을 되찾았다. 어린 나는 푸세식 화장실을 갈 때마다 이상하게 납작하고 작은 신발보다는 나막신 같은 굽이 있는 어른들의 신발을 신고 싶었다. 땅에서 높아지는 기분, 그런 작은 환상을 그렸다. 따뜻한 봄날, 뭔 바람이 불었는지 엄마의 빼딱 구두를 신고 화장실에 간 나는 환기도 시킬 겸 빛도 쪼일 겸 문을 반쯤 열었다. 햇살이 비추는데, 나오라는 똥도 안 나오고 할 게 없어 심심해졌다. 갑자기 문 앞으로 흰나비가 날았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어제 유치원에서 배운 [나비야] 동요가 터져 나왔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 오너라.

호랑나비 흰나비 춤을 추며 오너라.


그런데 그날 흥이 과해서 똥뚜간임을 간과하고 발을 놀려버렸다. 스텝을 안쪽으로 몇 번 밟자마자 바로 아래로 직행했다. 다행히 노래를 부르며 팔까지 대자로 벌린 바람에 똥구멍 사이로 팔이 걸려서 간신히 대롱대롱 매달렸다. 삶의 본능을 발휘하여 살아보겠다고 목이 터져라 엄마를 불러댔다. 어제 막 치운 똥뚜간은 떨어지면 바로 즉사할 것 같이 깊고 어두웠다. 시멘트 바닥에 걸쳐진 겨드랑이가 아파왔다. 경직된 어깻죽지의 반경이 좁아지고 이제 죽겠구나 싶은 순간, 갑자기 문이 열리며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바로 끄집어 올려져서 우물펌프 앞에서 댓사리 맞았다. 그날 맞은 몽둥이 세례는 살았다는 안도 때문에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겨드랑이가 빨갛게 쓸려서 바셀린을 듬뿍 발랐는 데도 아픈 줄을 몰랐다. 밤에는 구석에서 따로 자야 했다. 이 똥뚜간 이야기는 친구들이 심심할 때마다 자주 해달라던 이야기였다. 주변에 아무도 똥뚜간에 빠져 본 경험이 없었다. 전에 어른들에게 들은 말로는 똥이 가득 찬 똥뚜간에 빠지면 늪처럼 모든 것을 삼킨다고 했다. 똥도 자주 치워줘야 혹여 똥 간에 빠져도 뼈가 부러질지언정,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음을 빠지고 나서야 알게 됐다.



정신적인 것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모든 것을 소화시켜서 또 먹고 싶은 탐식이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 이런 배설에 대한 욕구 때문인지 커피 사랑은 따지고 보면 배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커피를 처음 마신 중학교 일 학년, 영화 <고스트버스터즈 Ghostbusters>에 등장하는 식충이 유령, 먹깨비(Onionhead)처럼 먹는 것을 좋아하던 나는 축적된 음식의 양이 과해서, 약간의 변비가 있었다. 그런데 달달하고 따뜻한 커피를 처음 먹고 바로 대장에 신호가 오며 화장실을 갔다. 그 당시 약은 먹지 않고 천연 치료의 음식만 신뢰하던 입장이라 그날부터 커피에 환장하게 되었다. 먹으면 바로 신호를 보내는 커피에 익숙해지면서 "카페인 = 커피"가 아닌, "변비약 = 커피"가 되었다. 모닝커피는 만성 습관이 되어서 커피를 먹어도 잠이 오고 커피를 먹어도 화장실을 안 가기도 한다. 그냥 뇌에서 아침에 커피가 들어오면 "안녕! 신호 보내줄게." 하고 말하는 것 같다.


무의식적인 관점에서 배설의 일종인 똥꿈을 해석하자면 내부의 발산과 새로운 수확이다. 똥꿈을 꾸면 그날은 복권에 당첨되거나 돈을 더 번다든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기미를 제공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똥 밟았다"처럼 똥이 그렇게 재수 없는 것은 아니다. 똥만이 아니라 오줌도 그렇다. 우리의 과거에서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의 29대 무열왕 김춘추(金春秋)의 결혼비화를 보면 배설이 옥토를 덮는 홍수로 변할 때 세상을 장악할 수도 있다.


어느 날 꿈에서 신라의 명장 김유신(金庾信)의 여동생 보희가 서악(西岳)에서 오줌을 누웠는데, 경성(서라벌)에 오줌이 가득 찼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막냇동생 문희가 비단치마와 언니의 꿈을 바꾸었다. 보희가 꿈을 꾼 뒤 십일 후, 정월 오기일(午忌日)에 김춘추가 축국(蹴鞠)을 하러 김유신 집에 들렀다가 경기 중에 옷고름이 뜯어졌다. 김유신은 여동생들에게 수선을 부탁했다가 보희는 거절하고 이 일은 문희에게 돌아가게 된다. 그 이후로 한 방에서 옷을 고치며 서로를 알게 된 김춘추와 문희는 아이를 임신하고 골품제(骨品制) 계급사회로 구성된 신분차이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혼인을 올리게 된다.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가야왕족인 문희의 결합은 배설의 환몽에서 시작되어 이타적이고 이질적인 요소의 만남이 삼국을 통일하게 밑바탕이었음을 민간 설화의 기본적인 뼈대를 통해 보여준다.


서로의 만남이 계획적이었든 자연스러웠든 간에 배설은 세상에 내부적인 것을 표출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배설의 결과물인 현실의 똥과 오줌, 무의식적인 배설물,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차이는 인간의 인지적 사고의 계획과 실행에 큰 영향을 끼친다.



배설이 잘되면 하루가 가볍다. 일반적으로 학식자들은 고귀한 단어를 쓰고 아름다운 문장을 사용하여 멋진 이야기를 짓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민간문학들은 삶의 흩어진 이야기들을 모아서 인생사를 설명했다. 배설이란 행위와 배설의 결과인 똥은 실행적인 관점에서 예술적인 행위들과 관련이 있다. 글쓰기와 글, 그리기와 그림, 디자인과 오브제, 촬영과 사진, 프로덕션과 영화, 움직임과 춤, 소리와 음악 등 우리의 주변은 실행과 결과, 배설적 행위와 배설물들로 혼재되어 있다. 그것을 아름다운 이름으로 포장하는 사람도 있다. 나에겐 배설은 굉장히 중요한 삶의 기본적 요소이다. 충분히 먹지 않는다 해도 내분비기관과 밀접한 신체적 구조상, 모든 순환이 멈출 때까지 배설을 할 수 있다.


배설된 결과물의 값어치는 외부에서 정하는 것이 아니다. 배설한 주체가 배설의 행위를 통해 배설된 결과를 만족스러워하면 그것으로도 족하다. 남아있는 변비의 기운처럼 불만족스러운 것은 행위를 실행한 자가 잘 알고 있다. 헛배가 부르고 식은땀이 나고 명치가 눌려서 체한 듯한 기운은 편안하지 못하다. 애써 섭취한 것들을 아래로 흘려보내지 못하고 참을 수 없게 올라오는 욕지기로 토해낸다면 그것은 잘 정제된 결과물이 아니다. 아기들이 황금똥을 싸면 수유가 잘 됐다는 소리다. 조선 왕조에서 변비로 인한 폐색증으로 사망한 왕도 있다. 고귀한 결정의 위치에서 온갖 산해진미를 먹어도 배출할 수 없다면 지위도 부귀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수많은 이야기의 결론은, 똥차는 내 눈의 보석이라는 것이다. 남들을 따라가려고 비싼 고기 먹고 힘들여서 살다가는 황금똥을 생산하기 어렵다. 피만 부를 뿐.





강아지 한 모금, 나 한 모금
[A sip for the dog, a sip for me] 2004. 12. NOTEPAD. MEMENTO SKETCH by CHRIS


한 해가 마무리되는 시점, 손발이 되어준 하얀 꼬마를 아껴야 했는데 매일 바쁘다며 거세게 몰뿐, 어디 이상이 없는지, 잘 굴러갈 요량은 되는지, 정비할 시간도 한참 지났다. 점검이 며칠 걸릴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별 이상은 없단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오늘로 끝냈다. 엔진오일도 갈고 부동액도 넣고 간단히 마무리했다. 셋방주인과 함께 일 년을 바삐 다녀야겠구나.

몇 달간 청소도 안 해 꼬장꼬장한 외관이며 속살들, 호강시키려 큰 마음먹고 대대적인 세차도 했다. 날이 추워선지 세차장의 바닥이 모두 얼어 있었다. 미끌미끌한 바닥을 보니 마음도 미끌거렸다. 잠시 세차장 사무실에 앉아 있으라며 커피 한잔 내민 아저씨의 손에서 커피를 받아 들었다. 난롯가에 앉아서 물 뿌리는 소리를 들었다.

부스럭, 고개를 돌리니 눈이 또랑또랑한 강아지가 발 밑을 서성거렸다. 귀가 쫑긋한 게 예쁜 녀석. 요 놈도 커피가 당기는가? 나 한 모금, 강아지 한 모금. 서로 정답게 나눠 마셨다. 역시 혼자 먹는 것보다 둘이 나눠먹는 게 맛나다. 요즘 혼자서 너무 많이 마셔선지 약간은 질려 있었다.


깨끗한 차를 몰고 집에 오는 길, 기분이 좋았다. 다리를 긁으며 커피를 조금만 더 달라고 칭얼대던 강아지의 까만 눈망울과 바삭대는 발질도 푸근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진돗개에게 물린 이후로 개를 무서워하는데 별 짓을 다 한단 말이다. 자꾸만 강아지가 눈에 어른댄다. 고 강아지 귀가 종모양이었다. 딸랑~ 크리스마스 종소리처럼.


2004. 12. 24. FRIDAY





크리스마스가 특별하지 않게 된 날은 언제부터였던가. 빨간색 기념일을 챙기지 않은 지도 꽤 되었다. '낭만'이나 '기쁨', '축제'라는 단어적인 학습에서도 멀어졌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나요?", "안녕?"처럼 크리스마스도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를 타인들이 기념하는 날들보다 눈에 띄도록 좀 더 그럴듯하게 만드는 구호가 되었다.


기념일은 어른들보다는 아이들에게 필요하다. 머리가 백지장인 존재들에게 새로운 날들을 설계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그들 스스로 시간에 행동하며 각자 살아가는 날들에 의미를 부가하도록 만드는 기점을 제공한다. 설날도 그러하고 신년도 그러하고 생일도 그러하고 모든 기일들도 그렇다. 개인적인 기념일이나 사회에서 조직하는 행사일이나 역사가 규정하는 특정일들은 생계를 구성하기 위한 판촉이나 특정한 계획을 목적으로 형성된 날들처럼 삶을 살아가는 개별적인 존재가 현재의 필요에 의해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과거로 바라보아야 한다. 주어진 시간이 사용자의 상태에 따라 상대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며 절대적이거나 불변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때, 일상다반사적으로 존재하고 생성되고 소멸되는 시공의 관점에서 현대 물질사회의 운명처럼 시간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서 매일과 같은 무게로 작용한다.


현재를 가볍게 살아나가기 위해선 무겁도록 삶을 인식하도록 종용하는 과거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반대급부적으로 거리에서 사는 삶이 길어질수록 몸은 가벼워지지 않는다. 피로로 부은 얼굴로 일어나 커피를 연거푸 여덟 잔 마셨다. 눈가의 붓기는 여전하고 속은 담담하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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