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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Dec 12. 2024

LOST IN BEIJING. LUST, CAUTION

<苹果>,   <색, 계 色 戒>  아침 그리고 저녁 사이

[LOST IN BEIJING]  SHANGHAI. 2007. 12. 2. PHOTOGRAPH by CHRIS


 TV와 DVD로 인해 영화산업이 환영받지 못하는 현실을 중국의 극장에서 확인하고 있다. 조용히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어서 좋지만, 일요일에도 관객이 없는 영화관은 낯설기만 하다. 적적함이 감도는 12월의 영화관이라... 따닝국제상업광장 (大寧國際商業廣場)의 CGV주변은 크리스마스 준비가 한창이다. 크리스마스트리에 붉고 노란 장식이 반짝이고 캐럴이 거리에 울려 퍼진다. 옷차림은 가을중심, 마음은 겨울중심. 우유홍차를 사 들고 극장을 배회하다 사과를 베어 무는 판빙빙(范冰冰)의 모습에 끌려 <苹果 Lost in Beijing>를 봤다.


 모간산루(莫干山路 M50 Creative Park)에서 느꼈던 중국예술의 놀랍고도 열정적인 태동은 영화에서도 강렬하게 불어오고 있다. 거대한 집단 내의 사소한 분열과 경쟁적인 협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모색, 잘못에 대한 회의, 예측할 수 없는 미래로 나아가는 개인들의 분연한 결의와 긍정적인 희망은 작품의 거대한 모토가 되고 있다. 텁텁한 공기만큼이나 시커먼 먹구름처럼 밀려오는 중국인들의 사고는 공포스러운 감탄을 자아내며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불안하게 웃으며 입 안의 모래처럼 꺼끌거리는 모난 현실의 희화화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회색의 도시를 배경으로 물밀듯이 걸어가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닫혀있던 문 밖으로 힘차게 걸어 나가는 얼굴들을 본다. 다양한 색깔. 각색의 표현들. 웅성거리는 내일.


 내 것이되 내 것이 아니고, 너 것이되 너 것이 아닌 걸 부러워하는 자화상. 거리에서 자연스레 맞이하게 되는 거부할 수 없는 흡연의 기억처럼 스멀하게 밀려오는 타인과의 부정(不正)적인 합의는 모든 것이 공허해진 날, 내 안의 지워진 부정(父情)을 끌어낼 것이며, 오해와 범죄의 기로에서 정연한 내일을 보는 여자는 누구의 이름이든 간에 배 아파 낳은 아이를 안고 갈 수밖에 없는 길을 떠나리라.


 인간은 억압 속에서 자유를 추구한다. 하늘을 나는 새는 바람의 부피를 헤치는 방법은 알지만 시원하고 간결한 공기가 선사하는 폭풍 같은 설움과 신선한 기쁨은 알지 못한다. 날기 위해 퍼덕이는 새. 그건 웅크린 나의 모습이며 여기, 중국인들의 숨겨진 형상일 것이다. 북경에선 날 찾을 수 있길.


2007. 12. 4. TUESDAY




色 戒. LUST, CAUTION
[DESEO, PELIGRO | 色 戒. LUST, CAUTION]


 유혹과 경계의 선 상에서 현실의 수위를 넘나드는 일은 자주 찾아온다. 선택은 어둡고 내일은 알 수 없다. 조심스러운 그대가 빠져드는 건 녹슬도록 짜릿한 그녀의 속삭임. 아무리 영화가 시대적 현실을 정확하게 재현한다고 해도 그것은 과거의 영화를 돌아보는 한 사내의 몽환에 머물러 있지 않을까? 기다려도 그것은 기다림이 아니요, 매혹되어도 그것은 미혹됨이 아니었으니 우리에게 진실은 한낱 고양이의 발걸음처럼 의심스럽고, 교태롭고 유혹적인 유선형의 동선처럼 어지러울 뿐이다.


 상하이의 조계지가 번화로움에 사로잡혀 식민지 시대의 짓밟힌 흔적을 희미하게 내보이고 있듯이 반 세기를 넘긴 아픔의 불빛은 밝음이 사라진 뒷골목보다 더 찬란히 빛다. 지나버린 날들이란 격정적인 숨소리를 터져낸다. 웅성대는 말들은 공중에서 흩어지고 알 수 없는 정념의 비릿함만이 코끝을 스쳐간다. 마작을 패던 자리에 누가 있었고 조용한 카페에서 누구와 밀담을 나누었는지 당신은 기억할까?


 <색, 계 LUST, CAUTION>. 분리될 수 없는 암울한 시절의 매혹은 이름을 숨긴 어느 여자와 이름이 드러난 어떤 남자를 가뒀던 시간의 물병 속에서 기인되었다. 마법의 유리가 깨져버리면 그대를 끌어당긴 오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리.


 2007. 12. 9. SUNDAY     




 홀로 영화를 보는 일은 머리가 복잡해질 때면 가슴속 열기를 식히는 빈번한 방법이었다. 넓고 캄캄한 영화관에 아무도 없을 때 멍하니 은색 스크린을 보고 있으면 유체이탈로 빠져든다. 대각선으로 멀찍하게 간혹 한 두 명만이 좌석에서 머리를 빼꼼하게 내밀고 숨을 쉬고 있을 때 화면에 그림이 비치고 주변의 온기가 사라진 적막한 공간은 낯설다. 서라운드를 타고 들어오는 총소리도 격정의 숨소리도 억눌린 욕망도 그렇구나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어색함이 가득하다.


 과거의 시간들과 감정들을 순연히 떠나보내며 묵직한 손짓으로 밀어내고 있는 중이다. 낱장으로 흐드러지게 써놓은 글들과 그림들이 한가득이다. 이리저리 꼬아놓은 암호는 당사자만이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의 나는 지금과 같은 감정의 표정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내면의 결정력에서 달라진 부분도 있다. 그때와는 다른 자리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면서 앞으로 흘러간다면 스스로의 의지를 동원하여 다른 길에 서 있고 싶어졌다. 문장이 끝날 때 마침표 사라져 있거나 전후의 단락을 구분 짓지 않아도, 맥락을 혼재하거나 문장부호를 생략해도, 침묵 속에서 말해지지 않은 언어는 침묵할 수 없는 궁금한 말들을 울렁이는 파도와 넘실대는 바다의 협곡 속에 부조화와 균열의 증거로 쏟아낸다. 이야기는 계속되고 삶은 흘러간다. 기울어진 망향의 바다 사이로 죽음과 삶의 망태기를 걸쳐놓은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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