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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HÉTÉROTOPIES

《헤테로토피아,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

by CHRIS
[Les Hétérotopies, Michel Foucault]


잠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눈을 감고 있으면 현재의 공간에서 다른 모습으로 놓여있는 공간적 상상으로 전이된다. 손끝에서 사라져 가는 빛에서 늙음의 시간과 죽음의 무게를 가늠하거나 타자와의 접촉이 없어 깨지지 않았던 처녀성을 버리던 공간의 흔적을 떠올리게 된다. 중력으로 온 힘을 끌어당기는 땅에 몸을 가까스로 발붙이고 있다가 그 하중을 떨치고 몇 시간 뒤 비행기 안에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여기에서 저기로 넘어가는 순간이동을 거듭하며 옛날 영화의 한 장면 속에 파묻히게 되는 것이다. 없음에 대한 몽상은 현재의 시점에서 이미 전혀 없기 때문에 가능하다.



헤테로토피아
Les Hétérotopies


현실에 없는 장소인 유토피아(Utopia)와 현실에 없는 시간인 유크로니아(Uqronie)의 경계선에서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는 현실에 존재하는 유토피아이자 현실에 존재하는 유크로니아다. 푸코가 말하는 정상성을 벗어난 공간배치가 실제로 존재하는 경우의 수와 있을 수 없는 시간이 존재하는 반공간(Contre-escape)은 아이들에겐 정원의 깊숙한 곳이며 당연히 다락방이며 더 그럴듯하게는 다락방 한가운데 세워진 인디언 텐트이며 목요일 오후의 부재한 부모의 커다란 침대이다. 어른들에게 자리 매겨진 유토피아는 정원이나 묘지, 감호소나 사창가, 감옥, 클럽메드의 휴양지와 같은 것이다. 요양소나 정신병원, 감옥처럼 일탈의 헤테로토피아가 대체한 헤테로톨로지 과학이 설명하는 한시적 헤테로토피아도 있다. 극장이나 시장, 마을의 변두리나, 마을 한가운데 있는 멋진 공터, 벌거벗은 채로 살 수 있는 휴양촌, 집창촌에서의 연회, 통과와 변형 혹은 갱생의 노고와 관련 있는 19세기 기숙학교와 병영, 오늘날의 감옥이나 미스터리 중심에 있는 매음굴처럼 장소 없는 장소에서 그 공간의 조각인 배를 타고 자유롭지만 바다의 무한성에 숙명적으로 내맡겨져 정탐질과 빛나는 해적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노니는 것이다.




유토피아적인 몸
Le corps utopique


"모든 장소 바깥에 있는 장소이자 몸 없는 몸을 갖게 될 장소, 아름답고, 맑고, 투명하고, 빛나고, 민첩하고, 엄청난 힘을 지니고, 무한히 지속되고, 섬세하고, 눈에 띄지 않고, 보호되고, 언제나 아름답게 되는 몸, 원초적인 유토피아, 인간의 마음속 가장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유토피아, 그것은 형체 없는 몸의 유토피아일 것이다. 내 몸은 자기만의 고유한 환상성의 원천을 가지고 있다. 침투할 수 있지만 불투명하고, 열려 있으면서도 닫혀 있는, 이해 불가능한 몸. 즉, 유토피아적인 몸. 어떤 의미로는 절대적으로 가시적인 몸. 나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다른 사람에게 바라보임 당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안다. 내가 유토피아이기 위해서는 내가 몸이기만 하면 된다. 나로 하여금 내 몸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었던 모든 유토피아의 모델, 그 적용의 원점, 그 기원의 장소는 바로 내 몸 자체였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인간의 몸이 모든 유토피아의 주연 배우라는 것이다. 몸은 가면, 화장, 문신과 관련해서도 역시 위대한 유토피아적 배우이다. 실상 내 몸은 언제나 다른 곳에 있다. 사실대로 말하면 그것은 세계 속에 있는 만큼이나 다른 곳에 있다. 몸은 세계의 영도(Point Zéro)이다. 여러 갈래의 길과 공간들이 서로 교차하는 이 영도에서 몸은 아무 데도 없다. 그것은 세상의 중심에 있다. 이 작은 유토피아적 알맹이로부터 나는 꿈꾸고 말하고 나아가고 상상하며, 제자리에 있는 사물들을 지각하고, 또 내가 상상하는 유토피아의 무한한 힘에 의해 그것들을 부인한다. 내 몸은 태양의 도시와도 같다. 그것은 장소를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것으로부터 실제적이든 유토피아적이든 모든 가능한 장소가 시작되어 뻗어나가는 것이다."

《유토피아적인 몸 Le corps utopique 미셸 푸코》


눈을 뜨고 거울을 바라본다. 푸석하게 부어있는 눈두덩이와 평소에 발견하지 못했던 이마의 주름, 피곤으로 누렇게 떠 있는 피부, 흰자에 한가득 새겨진 실핏줄, 까슬하게 껍질이 일어난 입술, 격하게 주름이 진 손가락, 부종으로 매끈하지 못한 다리. 튀어나온 발목. 시선이 처하는 몸은 기억하던 사진 속의 나와 다른 현재를 말하고 있다. 내가 사유하는 모든 사물들은 유토피아의 정반대이자 절대적 장소인 몸에서 동일한 현존과 동일한 삶의 상처를 드러낸다. 자신의 몸에 대한 인식이 가능할 때까지 모든 몸은 그저 하나의 나뭇가지처럼 분리된 객체이며, 모든 것은 거울 이미지를 통해 구체화된다.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타자의 손길에서 스스로를 되찾은 자신을 느끼는 것이라는 푸코의 설명은 굉장히 에로틱한 어감을 전달한다.


"당신을 가로지르는 타자의 손길 아래서, 보이지 않던 당신 몸의 온갖 부분들이 존재하기 시작한다. 타자의 입술에 대응해서 당신의 입술은 감각적인 것이 되고, 반쯤 감겨진 그의 눈앞에서 당신의 얼굴은 확실성을 얻게 된다. 이제야 당신의 닫힌 눈꺼풀을 보려는 시선이 있는 것이다. 사랑 역시 거울처럼, 그리고 죽음처럼 당신 몸의 유토피아를 누그러뜨린다. 그것은 유토피아를 침묵시키고 달래주고 상자 안에 넣은 것처럼 가두고 닫아버리고 봉인한다. 그래서 사랑은 거울의 환영, 죽음의 위협과 사촌지간이다. 사랑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이 위태로운 두 형상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렇게나 사랑 나누기를 좋아한다면, 사랑 안에서 몸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적인 몸 Le corps utopique 미셸 푸코》


사랑 안에서 몸이 여기 있다는 표현은 다른 세계의 저기에 있는 그를 이곳으로 끌어오는 사이렌의 경고이자 존재적인 유혹이다. 유토피아적인 몸을 인식한다면 헤테로토피아로 넘어가는 길이 보일 것이다.




다른 공간들
Des espaces autres


"현시대는 아마도 공간의 시대일 것이다. 우리는 동시성의 시대, 병렬의 시대, 가까운 것과 먼 것의 시대, 인접성의 시대, 분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환원될 수 없으며 중첩될 수 없는 배치들을 규정하는 관계들의 총체 속에 살고 있다. 유토피아로서의 거울, 장소 없는 장소, 거울 안에서 나는 내가 없는 곳에 있는 나를 본다. 거울의 표면 뒤에 가상적으로 열리는 비실제적 공간에서, 나는 저편 내가 없는 곳에 있다."

다른 공간들 Des espaces autres, 미셸 푸코》


푸코가 지적했듯이 바깥의 공간(espace du dehors)은 우리 자신이 바깥으로 이끌리는 공간, 바로 우리의 삶, 시간과 역사가 침식되어 가는 공간이다. 특권화되고 금지된 장소들의 헤테로토피아는 기술적인 공간의 확장으로 인하여 더 이상 신혼여행 중에 머물게 되는 기차가 되거나 사랑이 숙성되고 처녀성이 상실되는 호텔이 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의 개인화로 인해 질병으로서의 죽음에 대한 강박 관념은 저마다의 검은 저택인 무덤을 소유하게 하였으며 극장처럼 사각형의 무대 위에서 양립 불가능한 복수의 공간, 복수의 배치를 구현하게 만들었다. 시간의 분할 (découpage du temps)과 연결되는 헤테로토피아는 대칭적으로 헤테로크로니아 (hétérochronie)를 향해 열린다. 우리는 박물관과 도서관에서 보편적인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발상과 한 장소 안에 모든 시간, 모든 시대, 모든 형식, 모든 취향을 가두어놓으려는 의지, 고정된 장소에 시간을 영원하고 무한하게 집적하려는 기획을 따라 가볍고 일시적이며 불안정하게 시간과 연계된 한시적인 축제의 헤테로토피아를 만나게 된다. 열림과 닫힘의 체계를 전제로 한 헤테로토피아는 이슬람교도의 목욕탕처럼 종교적이고 위생적인 목적의 정결의식과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사우나처럼 순전히 위생적인 목적의 정결의식 사이에 놓여 있다. 미국식 모텔방처럼 전면적으로 열려 있는 형식의 헤테로토피아와 환상을 만들어내는 매음굴과 공간의 조직화를 보여주는 17세기 청교도 사회의 식민지 사회처럼 극단적인 축 사이에서 자급자족적이고 자기 폐쇄적이며 무한 바다에 숙명적으로 맡겨져 있는 배의 운명을 따르는 헤테로토피아는 지금 '여기'와 현재 '이곳'에 주목하게 만든다.




공간, 지식, 권력
Space, Knowledge and Power


"자유는 실천이다. 사람들의 자유는 결코 그것을 보장해 주는 법이나 제도에 의해 확보되지 않는다. 법과 제도는 거의 모두 반대의 목적으로 쓰일 수도 있다. 이는 그것들이 모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는 행사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 폴 레비나우 Paul Rabinow와의 1982년 대담 중에서>

오늘날 사람들은 해방 기계(libertating machines)를 꿈꾸지만 자유의 행사는 주체의 자발적인 수렴이 있을 때만 제대로 기능할 수 있다는 푸코의 말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실질적인 자유의 실천과 사회관계의 관행, 지역, 장소, 건축 등 공간적인 분포를 포함하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소성의 헤테로토피아와 유토피아적인 몸, 그리고 여기와 저기 사이에 놓인 지식의 층위와 권력이 내포하고 있는 역사적인 시간들은 주체자의 해방적인 의도와 자유를 행사하는 사람들의 실제적인 실천과 맞물려야만 공간이 긍정적인 효과를 생산할 수 있음을 해제하고 있다. 헤테로폴로지(Hétéropologie)로 불리는 푸코의 공간에 대한 새로운 분석틀은 공간과 지식, 권력 사이에서 자유의지의 유기적인 실천만이 공간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음을 그의 죽음 뒤 시간적인 비수용의 간극을 통해서 응집하여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헤테로토피아와 마주친 헤테로크로니아의 나
Moi, hétérochronie face à l’hétérotopie


출장 중에 미셸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를 읽으며 말과 사물들, 특정 장소와 시간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푸코의 강연과 논문, 사유적인 대담은 대학시절 《광기의 역사》를 읽던 과거의 나를 소급하게 했으며, 그때의 시간들과 현재의 시간들만이 아니라 그 가운데 끼여 있던 생활의 고뇌까지 한 자리로 동시에 불러왔다. 띄엄띄엄 기억들이 번쩍이다가 갑자기 몇 개의 단어들과 문장들에서 점점이 소환되는 시간들은 장소를 이동하며 회상을 반복하게 만들었다.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와 헤테로크로니아(hétérochronie)는 공간과 시간의 두 가지 축을 거치며 인간 경험의 이질적인 차원을 드러낸다. 일상적인 공간과 다른 방식으로 기능하거나 구조화된 특별한 장소들, 병원이나 박물관, 감옥, 묘지, 도서관, 극장 등 현재와 다른 공간들로 규정되는 곳에서 헤테로토피아는 스스로 시간을 저장하거나 반복하거나 초월적으로 재구성한다. 우리는 그곳에서 인간 경험의 비일상적인 현실을 마주치게 되며 자신의 위치를 재정의하게 된다. 헤테로크로니아는 시간의 축 위에 자신을 놓으며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경험하게 만든다. 이름을 모르는 허허벌판의 땅 앞에서 생명과 죽음의 시간적 대립을 경험하고 묘지를 연상시키는 황무지의 헤테로크로니아를 통해 시간의 연속성과 단절을 동시에 경험하며 자신의 유한성과 무한성을 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의 집에 초대를 받아 그들의 공간 속에서 손님의 역할로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할 때나 지나간 그림들을 보며 관찰자로서의 내가 작가와 호흡하는 순간들은 단순히 박물관이나 축제의 현장이 아니라도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삶의 방식을 점검하게 만든다. 어제와 내일과 오늘, 이곳과 저곳과 여기, 중첩된 시간과 공간의 교차점에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해체되는 나에 대해 바라보게 되는 경험은 스스로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말들의 사유로 귀착될 것이다.


"독창적인 사유는 스스로를 들이민다. 그 역사는 그것이 용인하는 주해의 유일한 형식이며, 그 운명이야말로 그것이 감내하는 비판의 유일한 형식이다."

-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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