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의 후예들이 보여주는 지푸라기 기질이 마음에 든다. 억눌림을 그대로 발설할 수 없는 통제, 하지만 저항하는 눈빛은 얼마나 강한가. 데이비드 카퍼필드가 보여주는 뻔한 자본주의 마술보다 허름한 마차에서 벌어지는 환각적인 속임수에 약간의 웃음과 눈물을 내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집시의 시간>은 좋아하는 단어가 모두 들어간 영화이다. 떠돌이 집시와 물과 같은 시간.
나는 시간을 갈구할 것이다. 돈보다, 재능보다, 약속보다, 정의보다, 질서보다! 떠도는 게 좋다. 근질근질한 발병이 돋으면 세상에게서 등 돌리고 떠도는 자는 슬프도록 외롭기에 하루를 위로할 춤과 음악이 필요하다. 시간이 다가오는 놀라운 소리를 감추기 위해서 크게 노래하고 소란스럽게 춤을 춰야 한다. 나의 어머니가, 나의 아이가, 나의 연인이 떠나갔던 그 길에서 그들이 흘려놓았던 먼지를 마시며.
신문을 펼친다. 이 세상 어디에선가 아이들의 매매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사라진 아이들. 거인의 성에서 흘러나온 피리소리를 들은 것일까? 유혹하는 사이렌을 따라 눈을 감고 춤을 추었나? 저주의 씨앗으로, 인종 청소의 본보기로, 자본가의 싸구려 노동 점유물로, 쓸모없는 쓰레기로, 곱다운 시선 한번 받지 못하고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다가 버려진 아이들. 저 길 위의 삶. 육체에 박힌 두 개의 눈을 넘어선 감독이란, 삶을 탐구하는 사람이란, 무릇 호기심이 풍부해야 한다. 자본이 흘린 성공에 취하지 말고 널려놓은 기삿거리에서 단서를 잡아 전설을 쫓는 탐험가가 되어야 한다. 그런 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
에밀 쿠스트리차(Emir Kusturica), 그의 고향 보스니아. 파도가 인다. 눈앞에서 알고 있던 모든 이가 사라진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되거나 포탄에 엎드려 있다. 귀를 막는 동족의 싸움에서 정지해 버린 시간. 참혹한 널에서 우리는 어떻게 중심을 잡을 수 있을까? 고발성이 짙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거대한 이야기를 쫓다가 따뜻한 영상을 포기하고, 감각을 성취하려다 가치관을 포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말은 의미를 잃는다. 떠돌다가 잠시 피를 섞고 다시 거리의 아이로 떠도는 생에서 죽음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또한 새로운 생명이라는 것은?
머리가 복잡한 가운데 왜 집시의 시간이 맴도는지 모르겠다. 타로점을 치며 좋던 아니던 내일 있을 일을 예견하고 마차에서 우유차를 마시며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떠나는 진동을 느끼고 싶다. 세상의 가장자리를 달리는 자에게 거추장스러운 죽음이 다가오면 보내는 자나 맞는 자나 편히 보내주는 길은 억지스럽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다.
시간은 고무줄 같다. 아기 기저귀에 끼우는 노란 고무줄과 맨살을 찰싹거리며 어린 날을 부르는 기억들. 무덤덤해지면서도 한순간 움찔거리는 반응이 하루를 무겁게 한다. 눈앞으로 밀려오는 경험이 악몽일 땐 쉽게 잊지 못한다. 집시의 시간, 황폐한 톱니바퀴의 신음을 뒤로하고 그 안에서 편히 달릴 수 있기를 바라본다.
2005. 2. 25. FRIDAY
에스닉한 집시치마가 유행이었을 때 현란한 색상이 눈앞에서 흔들리는 와중에 땀에 흠뻑 절은 시큼한 바람 냄새와 먼지 가득한 흙냄새를 맡았다. 커다란 이상이 다가오면 생활이 각박한 사람들은 전쟁으로 평범한 삶을 뒤집기를 꿈꾸고, 안정적인 연대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비좁은 공간을 열고서 조용한 공존을 원한다. 쉽게 벗고 쉽게 뒤집어쓸 수 있는 쓰개치마처럼 인간의 탄생과 소멸은 한 폭의 치마 속 가느다란 두 다리 사이에서 시작되었다가 버팅길 수 없는 한 줌의 재로 흩어진다.
집시의 시간은 한 곳에서 토박이로 살아가려는 정착 의지를 불허한다. 언제나 이방인이며, 타지인이자, 새내기였다가 이주민일 수밖에 없는 이름 없는 인간들은 총알에 쓰러지고 거짓말에 무너지며 결핍에 찌들게 된다. 세상을 감싸는 오만가지 이미지가 머리를 스쳐나갈 때마다 의식을 잠식해 버린 과거의 한 조각이 날카롭게 고개를 든다. 설익은 혀를 꺼내기엔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사념의 아이들이 소리친다. 집시의 시간이 움직이면 묻어두었던 방황의 시간도 함께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