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맨스랜드>, 전시(戰時)에는 누울 자리가 없다.
어릴 적 자주 보았던 탱크가 평화유지군의 보호물자 차량으로 이용될 땐 그리 작을 줄은 몰랐다. 초반만 답답하게 웃었지, 갈수록 기분이 무거워진 <노 맨스 랜드 NO MAN'S LAND>. 낙관과 비관의 차이는 무엇인가? 대화를 적고 나누면서 언제나 의문을 가지지만 ‘같다’는 건 어떤 전제로 소통을 허용하는 것인가.
내가 사귀었던 사람을 나와 총구로 만난 너는 알고 있다. 우리는 한 때 같은 민족이라고 불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너의 총격에 나의 동네가 불타고 나의 총격에 너의 동네가 불타오르기 전까진. 그런 우리가, 이름도 모르는 너와 내가, 총알 한 발씩 심장과 빗나간 자리에 맞은 형제가 만났다. 어느 누구도 누워서는 안 되는 대지에서.
너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고 네가 밟은 자리에 내가 서야 살 곳이 생긴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군수물품과 구호품을 전달하고 평화협정의 기준을 정하는 우두머리들, 윗물은 맑고 도덕적인가? 최고 수뇌부와 그 아래, 또 그 아래... 대열을 선점하는 정치가와 군 장성들. 명령을 따르는 일개 평사(平士). 계급을 지키고 자리를 수호하기 위해 라인을 밟지 않는 것은 ‘보호할 대상’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꼭 총을 들어야 전쟁광이라 표현할 순 없다.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목숨이 오고 가는 곳에서 보도전에 돌입한 기자와 데스크, 그것을 지켜보는 시청자. 멀리 갈 것 없이 이라크 전쟁을 보면 목이 잘리고 숨이 넘어가는 생사의 현장을 보도하면서 제작자와 관람객의 자의식은 달라졌다고 보기 어렵다. 타인의 죽음 앞에서 깊게 자성하자고 말하지만, ‘돈 먹고 돈놀이’ 하는 행태는 그리 나아 보이진 않는다. 당장 죽지 않는 느릿한 죽음과 싸워야 하는 평시의 사람들은 더 나은 환경에서 으쓱이며 전쟁을 대하나 억센 의지를 숨기며 생활에 빌붙기 위해 생존본능으로 추락한 승냥이와 다를 바가 없다.
걸프전, 이라크 전쟁처럼 십자군으로 부활한 서방의 세력이 중동에 위치한 악의 축을 쳐부순다는 명분을 제외하고도 아프가니스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르완다, 동티모르, 동남아, 팔레스타인, 코소보. 짧은 세월 안에서 보고 들은 지구상의 내전은 소문을 불식할 정도로 셀 수 없고 기억할 수 없다. 싸움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것이다. 전쟁을 지켜보는 것과 직접 하는 입장은 극과 극이다. 나는 서서히 죽는 전쟁에서 서 있던 사람이었다가 극적으로 격해지는 과도기에 서 있다. 그러면서 아픔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선(善)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다리를 쓰다듬어 주며 위로하는데 진실은 아니었다. 왜? 그들은 그 위급하고 토악질 나는 ‘긴급한 상황’이라는 것을 몰랐으니까. 그렇다고 살살 약 올리고 간 사람에게 똑같이 느껴야 한다며 핏물 가득한 구덩이로 몰아넣는 것은 같이 죽자고 매달리는 어리석은 치기일 뿐이다.
평탄, 전쟁, 복원, 평상.. 반복된 악몽을 꿈꾸면서 "잊지 말자! 기억하자! 새로 거듭나자!"던 약속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지뢰를 깔고 누운 자의 생명은 너무 위해하기에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다. 같이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은 동반 자살인가?
"너의 집 불은 너희가 꺼야 돼. 내가 어떻게 알아?"
그래, 누가 알런가. 그러는 동안 한 명, 두 명, 세 명. 한 어미의 뱃속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죽고 다른 어미의 뱃속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조용하고 안락한 생활에 나른해하며 천년만년 살아갈 것이다.
표현이란 어떻게 사람의 심리를 조정하는가? 같은 전쟁이었지만 내전을 따스하게 바라봤던 영화가 있었다. 오래된 흑백 필름의 효과를 사용해 전쟁이 벌어지는 실상은 극 초반, 무성 뉴스 다큐멘터리로 엮고 중반부터 망가진 사람들의 삶은 액자형식의 짧은 민화로 엮어 옛날이야기 듣는 기분을 전해주었다. 건조하면서 정겨운 화면은 전쟁과 민족, 핏줄과 삶, 세월에 대해서 차분하게 생각할 여유를 남겼다. 그런데 이와 달리 속사포 같은 입담으로 세르비아-보스니아 인들의 유머가 빠르게 먹히는 <노맨스랜드>. 시나리오가 끝내준다는 말발은 수상한 먹구름을 피우며 진정할 사이도 없이 복잡한 머리를 메워댔다.
사실, 표현은 다른 방식이지만 같은 비판인 것이다. 시작은 다른 충격의 출발선이나 끝에는 같은 세기의 강도로 다가온다. 표면은 코믹하나 내용은 결코 웃을 수 없는 영화를 보며 푹신한 좌석에 앉은 엉덩이가 따갑도록 가라앉았다. 정말 웃기지 않았다. 아니, 침통했다. 난 비관론자인가? 흑백논리에 빠지긴 싫다. 하지만 잊을 수 없다. 영화 초반 낙관과 비관의 차이를 농담 삼아 던지던 사람이 있었다. 해가 뜨자마자 총에 맞아 죽었는데...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부정하는 사람은 낙관적이고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긍정하는 사람은 비관적이다.
X에서 X로 회귀하는 이 대사는 곧잘 들어왔는데 전쟁에 참여한 이들이 모두 죽음으로 치닫는 결말에 처음 장면이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울 필요도 없고 소리칠 필요도 없다. 더 나빠질 것도 없으니까. 추억을 만지작 거리며 누워서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전시(戰時)에는 어떤 인간도 누울 자리가 없다."는 사실만이 적나라하게 소리친다. 보살펴주던 친구가 동족과의 혈흔으로 숨지고 인간의 도리에 대해 떠들던 자들이 하나 둘 떠나면 이 주제는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약간의 움직임으로 너뿐 아니라 주변은 폐허로 변한다는 것을 모두 알았기에.
2005. 1. 22. SATURDAY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에 파병된 북한군 수십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뜨악했던 파병 소식만큼이나 개 같은 인간의 죽음에 혀를 차고 말았다. 재래식 무기를 팔아 신 무기를 생산하고, 돌아가지 않는 재고를 팔아서 살인적인 무장력을 강화시키고, 헌 무기든 첨단 무기든 한방에 사라지는 인간의 목숨에 경제적 부강을 부르짖고 우방의 외교를 확인하고 첨단의 실험을 감행하는 국가적 이익의 행태가 나라의 경제적인 가치 재고나 국가적인 위신 상승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제정신이 사라진 국제 정세가 정신없는 사회만큼이나 암담해 보인다.
전쟁은 한번 시작되면 과거 백년전쟁의 명성처럼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쉽게 끝나지 않는다. 싸움질을 좋아하는 인간들을 보면 미친놈 같다. 팔다리가 잘리고 목에서 피가 흘러야 싸움의 본질을 알게 될 것이다. 전쟁의 시간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드러누울 땅이란 검은 죽음이 가득한 폐허뿐이다. 모든 것이 불탄 뒤에 아주 서서히 생명의 싹이 돋는다면 그나마 다행이랄까. 누구의 편에 붙어서 오래 살아남을지 고민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지가 어디에 있는지 먼저 살펴보는 것이 내일을 향해 누울 자리를 볼 때 유익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