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라이프》 가이 대븐포트 | 예술과 문학에서의 조화로운 혼란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질서는 여전히 그 자체로는 사소한 것들을 무작위로 모아 놓은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
"The most beautiful order of the world is still a random gathering of things insignificant in themselves" by Heraclitus
우리는 책을 읽는 시간을 책이 놓여 있던 공간과 함께 총체적으로 기억하고 있는가. 선명했던 추상(抽象)이 지나간 뒤 그날의 감상을 적어놓지 않으면 시간은 산산이 부서진다. 가이 대븐포트 (Guy Davenport)가 말하듯이 시간의 흔적은 기억을 상실한 사람들 사이로 방에, 의자에, 계절에 달라붙기도 힘들다. 바다와 바람이 배의 모양을 만들듯이 《모든 기운은 형태를 낳는다 Every Force Evolves a Form》는 대븐포트의 믿음처럼 굳어진 정물에도 죽음과 정지, 종말과 같은 기운이 가두어져 있다.
에피큐리언(Epicurean)의 소박한 식사는 밀턴의 파이프 담배 한 대와 차가운 물 한잔의 생각 깊은 그 유명한 야식처럼, 혹은 퀴리 부인의 체리 한 접시와 차 한잔의 소탈하고 과학적인 절제처럼, 머리를 채우는 깊이 있는 책과 눈을 사로잡는 오브제와 별의 순항을 방해하지 않는 정갈한 음식 차림으로 드러난다. 《스틸라이프 Still Life》의 세계는 오늘날의 바쁜 삶에서든 황망하게 몸을 돌리는 어느 곳에서든 펼쳐져 있다. 쉽게 스쳐 지나가는 사소한 정물에 대한 관조를 손에 쥐고서 예술과 문학에서의 조화로운 혼란을 야기하는 테이블 위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1. 여름 과일 광주리
생생하게 포즈를 취하는 살아있는 여자 모델인 프라우번레번(Vrouwenleven, Women's Life)과 과일이나 꽃, 생선처럼 움직이지 않는 스틸레번(Stillleven, Still Life) 사이에서 재빠른 움직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스틸라이프(Still Life)의 정지된 대상은 지루하다고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음식을 구하고 구한 음식을 먹기까지 그 시간 사이의 기다림이 있는 공백은 이집트의 영혼, 카(Ka)가 섭취하는 영원의 시간이었다. 흡사 우리가 추석이나 설 명절에 제사를 지내고 사람들과 제삿밥을 나눠먹기 전, 조상들이나 귀신들에게 바치는 음식을 향불이 탈 때까지 물끄러미 놓아두듯이 말이다.
왕과 귀족이나 대신들의 초상화, 혈우병이 가득한 피의 대관식, 영웅들의 전쟁 서사시, 미녀와 신의 찬란한 승천처럼 거창한 것들에 감흥이 가지 않는 것은 소박한 현재의 그림만이 생활과 동일함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네가 아스파라거스를 한 뭉치를 그리는 것은 휴가를 보내는 뜻이라니, 동조의 유쾌한 웃음이 튀어 올랐다. 수많은 서양의 화가들과 작가들의 문화 예술적인 사례를 읽어 내리면서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이 떠올랐다. 그녀의 초충도(傳申師任堂筆草蟲圖)는 수박이나 생쥐, 나비의 섬세한 모습들을 정겹게 그리고 있어 여인의 단아한 성품을 가늠하게 한다. 정적인 것을 따진다면 동양적인 그림이 여백의 미도 있고 생각거리가 많긴 하다.
1837년 루이 다게르(Louis-Jacques-Mandé Daguerre)가 발명한 최초의 사진 프로세스인 다게레오타이프(Daguerréotype)는 영구적인 이미지를 캡처하여 뛰어난 선명도로 독특한 이미지를 창출하였지만, 노출시간이 오래 걸리고 이미지가 변색되기 쉬운 단점이 있었다. 다게르의 최초 실험 대상은 몇 가지 석고상과 오브제들로 이루어진 정물이었다. 조세프 니옙스 (Joseph Nicéphore Niépce)는 1826년 하루종일 태양광에 노출해서 중정의 사진을 찍었고, 그 안에는 음울하고 황량하고 비논리적인 시간의 그림자가 흘렀다. 처음 사진이 만들어지는 시기에는 "예술가의 아틀리에"도 담겨있었는데, 이제는 예술가의 부재한 초상 같은 풍부한 질감과 빛과 그림자가 가득한 그림은 찾아보기 힘들다.
2. 운명의 두상
도시인의 설화, 특히 유럽인들의 전설과 우화에는 셜록 홈스나 타잔, 돈키호테가 있다. 셜록 홈스가 살던 베이커 스트리트 221번지 B호의 실내는 어떨까? 화학 실험기구가 놓인 탁자, 바이올린, 범죄 관련 신문기사를 모아 놓은 스크랩북, 벽난로 위에는 담뱃잎을 넣어놓는 페르시아 슬리퍼가 잭나이프로 고정되어 있다. 홈스의 방은 리 헌트(Leigh Hunt)의 실내처럼 혹은 철학자와 시인의 방처럼 감성과 예민함을 간직한 은신처이며, 괴테, 알렉산더 폰 훔볼트, 퀴비에 등의 과학자, 시인, 딜레탕트, 컬렉터들이 있음 직한 온갖 아마추어의 방이다. 그리고 오스카르 뫼니에가 조각한 홈스의 고전적인 흉상도 잊지 말아야 한다. 철학적 사색에 필요한 파이프 한 개도 있어야 하고 커피나 찻주전자, 와인잔과 와인병도 곁들이면 좋다. 셜록 홈스는 Shear Lock에서 온 이름으로 짧게 자른 머리라는 뜻이고 Holm은 지중해에서 자라는 상록수 오크나무인 Holm oak의 줄임말이다. 오귀스트 뒤팽(Auguste Dupin)은 소나무(Pine)와 고대 인물을 연상하게 하며, 에르퀼 푸아로(Hercule Poirot)는 헤라클레스와 배나무(Poire)를 떠올리게 만든다. 탐정들의 이름은 대븐포트가 지적하듯이 고대세계와 자연의 녹색을 연결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야생의 사냥꾼처럼 범죄로 특정된 인간의 기억을 채집하고 약탈자들을 처단하는 움직임이 바로 탐정들의 모습이다.
"가구를 들여놓은 실내는 우주일 뿐 아니라 사적인 개인이라는 사건이다. 거주한다는 것은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
버드나무 정령 오르페우스와 아내 에우리디케의 신화를 고딕 모드로 바꾼 포(Edgar Allan Poe)의 《어셔가의 몰락 The Fall of the House of Usher》은 독일적인 영혼의 신경 쇠약, 우울, 미신과 초자연적인 성향으로 운명 지워진 이성, 파우스투스의 고집과 자만심, 햄릿의 격동적인 영혼과 음산한 가을 날씨와 같은 불길한 고딕을 선사한다. 고상한 고전(Classic)을 던져버리고 깊은 숲 속 베네치아의 책들, 스페인의 기타, 네덜란드의 유화 물감이 운반되어 온 길들이 닿는 곳에 어셔가의 집이 놓여있었다. 프랑스의 옛날 말로 문지기(Ussier)이자 버드나무란 뜻의 Osier에서 흘러나온 오르페우스와 연결되는 운명은 아폴로 신전에 걸려서 잘린 음유시인의 머리가 노래하게 만든다. 독일의 음산한 바람과 썩어가는 이끼와 불안한 돌들 사이로 포(Poe)는 정물이 있는 탁자를 올려두었다. 사적인 공간에 놓인 탁자, 옆으로 밀어둔 악기 하나, 악보, 신문, 파이프, 과일이 담긴 그릇, 흉상은 사람들이 읽고 먹고 마시고 연주하고 대화하는 문명화된 집 안에 어떤 공간이 있음을 상정한다. 포는 어셔가의 탁자 위에 정물들을 배열하고 매력적이고 신비로운 어셔의 지성과 어두운 상상력을 암시하며 광기 어린 이야기의 목록을 펼쳐낸다. 고딕(Gothic)은 아라베스크의 관능으로 고대를 꿈꾸며, 예술은 의미를 지니는 곡조로 정령들과 소통한다. 인류의 운명으로서의 두상은 스티븐 디덜러스의 아우구스투스적인 사티로스를 초대하고 어셔의 신경쇠약은 로버트 버턴(Robert Burton)의 《멜랑콜리의 해부 The Anatomy of Melancholy》도 잊지 않는다.
"우리는 멜랑콜리에 대해 이렇게 결론 내릴 수 있다. 처음에는 매우 쾌적한 기분인데, 말하자면 최고로 매력적인 환각으로, 혼자 있고, 혼자 살고, 혼자 걷고, 혼자 생각하고,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고, 깨어서도 꿈을 꾸고, 수많은 환상적인 장면들을 상상하는 가장 달콤한 기분이다."
《멜랑콜리의 해부, 로버트 버턴 The Anatomy of Melancholy, Robert Burton》
과도하게 예민하고 온통 머리만 가지고 있는 로더릭 어셔(Roderick Usher)는 햄릿의 중세적인 죄의식과 르네상스적인 거만함, 뒤팽의 프랑스적인 현학성, 셜록 홈스의 명민하고 명료한 시적 감수성을 지닌 우울증에 뒤덮여 있다. 참수로 가득 찬 역사적인 두상이라니! 인류 운명의 상징으로 출현한 머리는 오스카 와일드가 그린 《살로메 Salomé》에서 접시 위에 놓인 세례 요한의 에로틱한 환상으로 돌아온다. 다윗에게 잘린 골리앗의 머리나 페르세우스에게 잘린 고르곤의 머리도, 그리고 네페르티티의 우아한 흉상과 베토벤의 예술적인 흉상까지 몸이 없는 머리는 가면으로 회귀되어 생각이 머무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사색적인 죽음으로 연결된다.
3. 사과와 배
사과와 배를 떠올리면 한적한 정물의 모습보다는 일거리가 가득한 제사상이 연상된다. 빈객들의 손에 한 박스씩 들려진 배와 사과에 주목하자마자 풍성함과 번잡함이 동시에 밀려든다. 새무얼 버틀러(Samuel Butler)가 《일리아스 Iliad》와 《오디세이아 Odyssey, The Authoress of the Odyssey》에서 말했듯이, 한국에서의 사과와 배는 문명의 한 쌍이 되어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과실의 모습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단품은 곧 세트로 포장되어 타인에게 선물로 전달되며 공동으로 과육을 깎아 먹고 향유하는 가을과 노동을 저장하고 대접하는 겨울을 초대한다. 모양새만 그럴듯한 유럽의 사과와 배보다 한국의 배와 사과는 단물도 많고 맛있어서 바라보는 정물로의 가치를 상실한 게 아닌가 싶다. 인류에서 가장 오래된 과실, 배나무 열세 그루와 사과나무 열 그루로 자신을 증명하는 오디세우스 (Odysseus)는 어디로 갔는가. 한 알의 사과를 선물하며 사랑을 읊는 그리스와 로마의 목가시는 한국의 재래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묶음 떨이로 판매되는 목청 따가운 흥겨움은 있다. 얕은 물과 웅덩이를 걷는 사람들 사이로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처럼 깊은 물을 천천히 걸어가고 싶다.
"어떤 가슴도 응답하지 않는 그리움을 느낀다면? 나는 홀로 걷는다. 내 마음은 벅차오른다. 감정이 생각의 흐름을 방해한다. 나는 친구가 있을까 땅을 두드린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그를 만날 것만 같다. 하지만 친구는 나타나지 않으니 No friend appears, 나를 꿈꾸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건지."
《1855. 6. 10.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일기》
데븐포트는 소로의 사과와 배를 이렇게 해석한다. "친구는 나타나지 않으니, appear는 즉, 사과 (Apple)와 배(Pear)는 함께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사과는 유혹하고 배는 화해한다. 소로의 사과는 객관적이고 공개적이며 사회적이다."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의 《풀잎 Leaves of Grass》에서 언급되듯이 카리스마적인 달콤한 배와 유혹적이고 보상적인 사과는 사랑과 증오, 조화와 불협화음으로 반전의 폭풍을 상징적으로 품고 있다. 인간과 신성 간의 조화를 상징하는 배와 인간과 신성 간의 만남을 상징하는 사과로 전면에 나서는 것이다. 이브의 사과(Malum)가 흉악한 악(Malus)에서 금지된 과일이 된 것은 언어적 우연일 뿐이라니 종교적인 의미의 원죄의 사과는 잠시 잊어도 좋을 듯하다.
현대 유럽 회화의 아버지이자 정물화의 대가, 폴 세잔(Paul Cézanne)의 사과는 에밀 졸라와의 우정이 사라질 무렵 시작되었다. 피카소(Pablo Ruiz Picasso)의 고대적 요소는 사과, 배, 과꽃을 담은 정물에서 흘러나와 과거가 남긴 '재고'를 검토하고 모더니즘적인 상직을 복합적으로 구성하였다. 라스코(Lascaux)와 알타미라 (Altamira) 화가들과 동시대인으로 남은 피카소는 현대적 예술가로서 가장 고대적인 방식으로 존재하였다. 상형문자나 도식적인 (Glyph) 요약처럼 언어와 그림 속에 근원을 숨기는 정물들은 이집트 회화의 규칙을 끌고 왔고, 소용돌이와 점찍은 원(Dotted Circle)의 인물 동공은 배와 사과를 형상화한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의 <양파가 있는 정물>은 귀 절단 사건에 대한 명상이자 사면이다. 그가 그린 194점의 정물들은 시각적 일기로 사용되었다. 19세기의 평화, 아늑함, 가정의 상징이었던 사물은 고흐의 손에서 질병과 건강의 기록으로 변용되었고, 피카소와 브라크에 와서는 산만하고 제정신이 아닌 세상에서 사라져 가는 프라이버시의 상징이자 조화의 소중한 흔적으로 변화한다. 르네상스 정물에서 "삶은 연기처럼 사라진다"는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를 상징하는 사물로 나타났듯이, 양파(Onion)는 결합(Union)과 같은 단어로 구원의 의미를 가진 배의 유사체이자 유한한 삶에 수반되는 소재로서 복합적인 상징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4. 토리노의 형이상학적 빛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를 죽음으로 이끈 정신 이상의 기간 동안 토리노(Torino)는 사적이고 보잘것없는 니체에게 맑은 가을날의 아름다움을 안겨주었다. 토리노의 파란 하늘과 기하학적인 도시적 구성, 고전적인 지속성과 정연함, 현대적인 활기 속에서 멜랑콜리와 노스탤지어에 잠겨 니체는 되풀이되는 운명에 관해 생각하였다. 끓어오르는 듯한 분위기를 뜻하는 '슈티뭉(Stimmung)'은 니체의 입에서 예술작품이나 문화 현상의 정서적 심리적 측면을 묘사하였고, 그의 생각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1888-1978) 회화 작업의 영감이 되어 주변의 사물들에 부여된 기존의 의미가 사라지고 낯설게 보이는 느낌을 끌어왔다. 가을 오후의 은은한 멜랑콜리 담고서 머리를 돌게 하는 강렬하고 신비로운 광기의 계절이 다가온다.
"1912년부터 1915년까지 내가 그린 연작들은 모두 토리노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진정으로 고백하건대, 이 그림들은 또한 그즈음 내가 열렬히 읽던 프리드리히 니체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그가 토리노에서 쓰러져 정신 이상이 되기 전에 집필한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wie man wird was man ist》를 통해 이 도시의 특별한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토리노의 형이상학적 우아함이 가장 잘 드러나는 진정한 계절은 가을이다. 토리노가 내게 보여준 가을은 현란한 형형 색색의 활기는 아니었지만 활기찼고, 가깝고 먼 시간의 엄청난 정직과 순수를 간직한 거대한 것이다. 그것은 철학자, 그리고 철학적인 시인, 예술가들의 계절이었다."
<조르조 데 키리코 Giorgio de Chirico>
키리코가 그린 토리노의 광장은 적막하였으나 결코 조용하지 않은 구성을 가지고 있다. 이십 년 전, 한 밤에 굴렁쇠를 굴리는 소녀의 뒷걸음을 따라가며 묵직한 소란함을 목격하였다. 조르조 데 키리코의 환영(Illusion)이 사라진 에니그마 (Enigma)는 질문을 일으키는 종류의 알 수 없고 신비로운 상태의 것이나 사람을 나타내는 수수께끼(Riddle)이다. 현상과 본질에 대한 전반적인 질문들은 정지된 정물과 풍경에서도 형이상적으로 극명히 나타난다.
사유하는 시인의 불확실성과 하루의 미스터리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방법론에서 시작된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이브가 사과를 먹어버린 밀턴(John Milton)의 《실낙원 Paradise Lost》은 《복락원 Paradise Regained》 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고 낙원을 찾으면서 키츠(John Keats)로 전이된다. 날 것과 익힌 음식, 테이블 매너와 요리와 식사 방식이 가득한 문명의 기원이 가족의 중심에 놓이면서 이와 함께 동반하는 규칙과 행동방식은 정물화라는 예술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니체가 토리노의 가을빛 속에서 느낀 신비로운 멜랑콜리는 키츠의 세계의 종말을 의미한다. 문화는 자기장, 역사를 형성하는 패턴화 된 에너지와 같다. 이미지 질서의 종말 뒤에 새로운 세상이 탄생하기 위해 스틸라이프는 어떤 종류의 영혼에서 서식할지 모른다.
"먹을 수 있는 적절한 음식과 이를 먹는 적절한 방법은 정물화 속에 내재해 있으며, 빵과 와인이 입체파 정물화에서 지속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빵과 와인은 성체적 의미를 부여받기 전부터 존재했다. 이들은 신들과의 협정이라는 고대의 맥락 속에 존재했고, 음식을 가지런히 차려서 먹는 것은 별들의 순행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인간이 동의한 합의 사항이었다. <...> 진실을 보는 한 가지 방법은 대상을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익숙한 것을 에니그마(Enigma)처럼 보는 것이다."
《스틸라이프, 가이 대븐포트 Still Life, Guy Davenport》
예술적인 정물의 시간 앞에서
In the presence of artistic still life’s time
"인간은 처음에 사냥꾼이었고, 예술가였다."
《상상력의 지리학, 가이 대븐포트 The Geography of the Imagination, Guy Davenport》
스틸 라이프는 정지된 사물을 의미하며, 또한 지속되는 생활을 동시에 뜻하기도 한다. 달리 표현하면, 찰스 올슨(Charles Olson)이 말하는 "결코 죽지 않는 자연(Natura NON morte)" 일 수도 있겠다. 펜과 칼과 금속 공구와 붓과 흑연으로 석벽이나 종이나 나무나 타자기나 컴퓨터나 디지털 판대에 다양하게 표현되는 예술은 하데스의 겨울 속 얼어붙은 죽음과 함께 하는 동시에 데메테르의 씨 뿌리고 꽃 피우고 수확하는 땅의 계절과도 공존한다.
명상이 되는 정물은 물질과 정신의 결합처럼 관조의 영역에서 그 의미를 풍부하게 자아낸다. 정물에서 신에게 하루의 일용할 양식에 대해 기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치유의 의미를 떠올리며 생활 태도를 바꾸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결별한 친구에게 쏟아지는 사과를 그리면서 화해를 모색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뜨거운 커피 한잔과 차가운 물 한잔으로 지나가는 오늘밤을 기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낯익음은 매일의 놓여있는 순간을 잊게 만든다. 낯설게 바라보는 정물 속에서만이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예술과 문학에서 새로운 화풍과 장르를 끌어올 수 있다. 저리도 우뚝하게 서 있는 과거의 건축물에서 시절을 지나쳐 버린 찬란하고 고독한 얼굴들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은가. 깊숙하게 떨어지는 쪼개진 종이들과 날카로움을 상실한 펜들과 시원한 과일의 땀 흘리는 표면과 어제의 꽃잎이 황망히 흩어진 탁자 위를 바라본다. 심연의 흔들림이 가라앉을 즈음이면 사물들에 감정과 이야기를 담아 보냈던 스틸라이프(Still Life)를 그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