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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Dec 14. 2024

BEAUTY KILLED THE BEAST

<킹콩 KING KONG>  아름다움이 야수를 죽인 걸까?

[KING KONG, 2005]


 피터 잭슨은 정말 재간둥이다. 눈물 어린 드라마를 맞이하기 앞서 가볍게 목 근육을 풀도록 희극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그만의 발랄함은 대형 스케일로 변해가는 화면의 중심에서 독특한 아우라를 펼친다. <고무인간의 최후 Bad Taste 1987>에 이어 <데드 얼라이브 Dead Alive 1992>에서 실생활에서 인지하지 못하는 죽음이라든지 지하세계, 성역화된 공간의 개방과 침입, 미확인 존재에 대한 공포와 함께 관습의 틀을 고수하고자 하는 인간의 정형화된 태도를 찢어 죽이고 말려 죽이고 골려 죽이는 시선의 반전을 선택한 그는, 현대 비디오라마들의 고립과 은둔, 육체적 성장과 지적인 발달을 통해 변해가는 사회의 모습과 개인마다 각자 다른 모습을 지닌 사랑을 지키기 위해 분리된 인형의 목처럼 건들거리는 젊은이의 자화상을 악동의 손길로 짓궂게 묘사했다. 죽음을 거둬내는 태도가 꼭 똥오줌을 닦는 화장지를 찢듯 가볍다는 느낌도 없진 않았지만 가둬진 현실을 피하기 위해 환상의 세계로 몰입하는 소녀들의 결의와 분열로 향하는 애정관을 열쇠로 삼은 <천상의 피조물 Heavenly Creatures 1995>은 그가 펼칠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과 미의 자각에 동반되는 현실과의 괴리, 그에 대한 정리를 예감하게 했다. <반지의 제왕 The Lord of the Rings>의 스케일을 그대로 적용한 프레임에 웬디가 있어 결코 완전한 사랑을 기대할 수 없었던 피터팬과 팅커벨처럼 혹은, 마법이 먹히지 않아 계속 사자로 살아야 했던 불완전한 <미녀와 야수 Beauty and the Beast>처럼, 피터 잭슨표 <킹콩 King Kong 2005>은 공룡의 혀를 상큼하게 끊어내고 주먹돌에 뜨악해진 실소는 여전했지만 원시림에 묻힌 사랑이 붉은 태양 위로 어떻게 흩날리는지 처연히 재현한다.


 영화 <킹콩>에서는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책이 있다. 프랜시스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 1979>에서 의식의 거울로 작용한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의 《어둠의 심연 Heart of Darkness》과 극 주인공인 잭 드리스콜(Jack Driscoll)의 희곡, 《고립 Isolation》이다. 즉, <킹콩>은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영화 추동의 원형으로 삼고 있으나, 공포의 저변에는 아수라의 성정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의 광포한 심성이 악의 베일에 있음을 서두에서부터 밝힌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인 《어둠의 심연 Heart of Darkness은 외형적인 성장으로 상징되는 제국주의자들의 탐욕이 평화로운 낙원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폭력을 무기로 광범위한 공포를 유발한 비극사의 과정을 서술한 고전이다. 여기서 《고립 Isolation》은 비극의 실행으로 안내하는 마법의 교본이 된다. 단순히 희생양들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트라우마의 회오리는 교전의 앞뒤로 발생된다. 얼굴 만만하게, 심근 가득히 퍼지는 불쾌한 홍조의 원형은 피부에 살포된 멍을 가시게 하는 것만으로 제거되지 않는다. 생명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악은 개발과 흥미라는 선의로서 포장되고, 그 속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단체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선 은폐되어야 한다는 필사의 광기를 탄생시킨다. 이를 작가 콘래드는 실재보다 더 강렬한 허상으로 폭력적이고 살육적인 인간의 태도를 문장 속에서 증명하였다. 고유한 삶의 터전을 잿더미로 바꾸고 연약한 살결 위에 핏물을 뿌리면서 감각의 진동을 유지해 온 것이 문명의 실체였다는 사실을 현대라는 옷 속에 가리어진 원시적인 태도가 과연 시간의 선에서 어떤 변화를 거쳐왔는지 의식의 워킹을 반복하며 보여준다. 무지와 폭력의 개선에 대해 자각을 하는 순간, 무인도에서의 고립보다 더한 공허에 휩싸이게 된다는 것을 <킹콩 king kong>은 콘래드의 책과 드리스콜의 희곡을 펼치며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미에 대한 감탄과 사랑은 진정으로 생명체에게 다가설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는가? 아름다움이란 상대적인 관점에서 발견자에게 주어진 혜택일 수 있다. 자연, 인간, 입자, 사물, 우주. 하나로 지칭하기 어려운 개별적이고 고립된 사물들은 공간에서 퍼지는 후광효과와도 같은 모호함을 지닌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만의 우리에서 타자의 성역을 거침없이 제거하고 수 천년 간 지속된 방벽을 무력화시키며 동감의 기회를 주는 건 고사하고 교화라는 이름의 위선으로 태고의 미로 인식된 그 무엇들조차 하얗게 위장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나도 그렇게 소리쳐야 할까?


 "Isn’t it beautiful?"


 킹콩과 앤이 아름답다고 느꼈던 태양의 화사함은 생명을 살상하면서 퍼지는 핏물의 울부짖음은 아닐 것이다.


 “왜 킹콩은 빌딩 꼭대기로 올라가 죽으려고 했을까?”


 한 기자가 묻자 별 것 아닌 듯 후답이 흘러나온다.

 

 “괴물이 뭔 생각이 있겠어. 그냥 올라간 거지.”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재능이 남달랐던 영화감독 칼 덴헴은 이 자지러진 슬픔과 오류에서도 아무런 응징을 받지 않고 킹콩의 죽음 앞에서 중얼거린다.


 “아름다움 때문이지. 미녀가 야수를 죽인 거야.”


 이 말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면 아름다움만이 선을 살해할 수 있다는 말이 될 수 있을까?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데 같이 영화를 봤던 지인이 말을 했다.


 “남자는 자고로 사랑하는 여자가 좋아하는 것을 잘 기억해야 해. 킹콩이 갈 곳도 없었겠지만 여자가 햇살이 아름답다고 했잖아. 도시에서 볼 게 뭐가 있겠어. 그녀와 같은 눈부신 아름다움을 말하는 태양. 떠오르는 태양, 지는 태양. 그걸 보여주러 올라간 거야. 비록 자신이 죽을지라도.”


 그런가. 빌딩들의 숲에서 떠오르는 태양에 취한다면 나도 가슴을 열면서 아름답다고 말하게 될까. 가질 수 없어 더 아름답지만 바라만 보아도 아름다운 너를 향해 달려갈 수 있다면 죽음을 재촉해도 외칠 것이다. Isn’t it beautiful?


2005. 12. 18. SUNDAY



 한번 몰두하면 상대에게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가슴속 설렘을 지속시킬 수 있는 경국지색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아름다움은 수명이 짧기 때문에, 지속될 수 없기 때문에, 갖기 쉽지 않기 때문에 열렬한 추종을 받는다. 가끔 인간 간에 분쟁이 격렬해지고 말도 안 되는 삶의 이론이 등장할 때 아름다움에 대해 고찰해보곤 한다.


 '저 사람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에 미혹되어 있구나.'


 타인들이 아름답고 멋지고 예쁘다고 말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은 각자의 미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책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주관 없이 정신을 놓아서는 안된다. 말희, 달기, 포사, 서시는 이미 타국의 역사 속에서 주군의 총기를 흐린 미인으로 주목받았다. 지금 양귀비를 상상해 보면 포동포동함이 부담스럽고 당 현종의 마더 콤플렉스가 녹아있는 막장 미인관에 동의하기가 어렵듯이,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벌거벗은 임금님에게는 거짓 없음으로 맨 몸이라고 지적을 하고 아름답지 않은 것에는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 주관적인 관점을 형성하여야 한다. 연산군과 장녹수의 관계도 결핍과 충족에 대한 비틀린 애정관이 권위적인 궁정 현실에 잘못 접합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시대를 거쳐오면서 태평성대는 1%였을 뿐, 99%의 현실은 언제나 어지러웠다. 합리적인 이성이 남아있다면 시국의 쟁점에 대처할 때 개사냥하듯이 당면한 문제를 몰아가며 처리할 것이 아니라 냉철하고 객관적인 방식으로 분석하고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감으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모두에게 아름답다고 여겨지지 않듯이, 긍정과 부정에 대한 개념도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다. 아름다움이 정당하게 심장을 저격하고 살해하기 위해서는 보수와 진보, 보존과 발전, 복고와 개혁, 이 모든 말장난을 넘어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개념 정립이 먼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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