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취향, 자크 데리다》 지성적 취향의 에크리튀르
《비밀의 취향 Le Goût Du Secret》은 제목부터 마음에 들었다. 비밀이 가지고 있는 필연적인 폐쇄성과 독자성을 철학적인 사고로 풀이하는 데리다의 언어와 나의 내밀한 기호점이 맞닿아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들게 했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와 마우리치오 페라리스(Maurizio Ferraris)의 대담을 텍스트로 복원한 구문은 형상과 질료에 대한 본질적 시간의 탈구점을 햄릿의 탄식으로 설명하면서 시작한다.
"시간이 이음매에서 빠져 있다."
"Time is out of joint."
데리다에 의하면 한 인간을 구성하는 기억이나 회상, 희망이나 꿈과 같이 현재의 시간에서 탈출한 시간은 존재가 거쳐왔으나 탈구된 어깨처럼 제자리에서 빠져나온 시간이며, 자신의 현재 안으로 모아들지 않는 시간이다. 현재적 존재의 위기는 현재의 탈구를 경험하고 있는 시대성에 기인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언어적인 전승으로 설명되는 복잡성 속에서 에크리튀르와 문학성이 철학 속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라면 시간적 정연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철학적인 것 속에서 자연언어의 밀착은 언제나 존재한다. 철학과 문학이 분리불가능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자서전이나 회고록처럼 자전적인 이야기들은 지금과의 독특성, 현재의 독특성 속에서 현전과 자기 현전이 탈구되는 순간으로 인해 단독자적인 실존은 자기 현전적이지 않고 현재에 의해 재전유되지 않으며 탈구되어 있지만 덜 단독자적인 것이 아니다. 포화시킬 수 없는 맥락이라는 관념의 존재를 인정하여 열린 구조를 지닌 맥락의 비폐쇄성을 가늠해야 한다. 작품과 서명의 관계처럼 존재의 자리를 점유하고 작가의 서명을 간직하는 산물은 동일자가 자신에 대해 독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로 함께 생산되기 때문에 맥락에 의해 만들어지며 또한 맥락을 만드는 것이 된다.
"글을 쓰는 행위가 이해받고자 하는 욕망과 꼭 결부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텍스트 전체를 아무나 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와 같은 무언가가 있다. 투명한 이해 가능성은 텍스트에 아무런 진정한 미래가 없다는 걸, 텍스트가 지금 당장의 현재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걸, 즉시 소진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오해와 몰이해의 지대야말로 장래를 위한 비축이고 또한 과잉을 위한 기회이다. 장래를 허락하는 과잉으로써 새로운 컨텍스트들이 배태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말하는 걸 아무나 즉시 이해할 수 있다면 그건 내가 새로운 컨텍스트를 만들어내지 못했고 기왕의 기다림에 기계적으로 응답했을 뿐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기쁘게 읽는다고 해도 그들이 책을 덮을 때 그냥 끝나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약간 변태 같아 보일 수도 있는 욕망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전유해 버릴 수 없는 그런 것을 쓰고 싶다는 욕망 말이다. 특정 부류의 개방성, 유희, 미규정성을 남겨둔다는 것은 동일한 기호를 찾는 일인 동시에 도래할 자를 위해 자리를 비워두는 것이다. 다른 이에게 읽을거리를 준다는 것은 더 바랄 것이 있게끔 둔다는 것이고, 다른 이로 하여금 개입할 여지를, 고유한 해석을 쓸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해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은 타자의 독해를 환대하는 것이지 타자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비밀의 취향, 자크 데리다》
스스로 타인의 비밀을 획득하게 하고 타자의 시간 속으로 개입되어 가는 일들은 변칙적인 행위로 보이긴 하지만 비밀은 비현상성 자체로서의 비밀이며 대체불가능한 독특성이며 실존의 잔여이다. 즉, 감추려고 하는 것이 없는 그 자체로서의 존재이기도 한다. 비밀이 아닌 것과 대립되는 비밀은 "바로 거기, 우리가 공유하면서도 공유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주제화할 수 없고 대상화할 수 없으며 공유할 수 없는 존재화할 수 없는 무언가는 바로 절대적인 비밀이며, 풀려난 것(ab-solu), 연결로부터 잘려 나온 것, 떨어져 나온 것, 연결될 수 없는 것이 바로 연결의 조건이다.
"귀속된다는 것, 귀속을 고백하는 것, 가족이 됐든 국민이 됐든 언어가 됐든 무언가를 공통물로 삼는다는 것은 곧 비밀의 상실을 뜻한다."
자신의 언어로서 자신의 시대에 자신의 역사로 자신의 필치를 통해 자신이 쓰는 문자들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가지고서 타자에 응답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철학하고 글을 쓰는 이의 임무라는 데리다의 이야기는 한층 비밀스러운 취향에 공감하게 했다. 그가 언급했듯이 자신만의 고유 언어를 통해 우정을 나눌 사람과 이야기하고 담론을 개진할 때 뜻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과 조촐한 저녁식사를 함께 하거나 뜨거운 사랑을 나누거나 가벼운 산책을 하는 일은 기쁠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비밀의 취향에 대해 시간을 거스르거나 뛰어넘어 다양한 목소리로 내면을 기술하는 글들은 지금과 현재의 실존과 맞물린 선택이며 기호의 변화와 현재적 상태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비밀의 취향
"스포츠 하나도 안 좋아하세요?"
"승부 나는 건 지루하더라고요. 특히 축구는 전혀 아니에요. 야구도 그렇고."
"그럼 뭐 좋아하는 스포츠 없으세요?"
"스포츠는 그다지. 볼 일이 없어서. 룰을 정하고 뛰는 게 영..."
"그래도 운동하는 애들 몸은 좋던데. 사진 찍으면 군살도 없고 보기 좋잖아요."
"섹시하지가 않아서."
차에서 이동하면서 개인적인 취향에 대해 말해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점심까지 회의하다가 팀원들과 평양냉면을 먹으러 나왔다. 주문한 냉면이 안 나와서 뜨뜻한 냉면육수를 홀짝 거리는데, 영화 이야기, 사진 이야기, 모델이야기, 감독이야기, 배우이야기를 하다가 불똥이 머리 이야기로 튀었다.
"대표님은 머리 빈 아이는 전혀 섹시하게 안 느껴진다는데?"
"어이구. 취향이 고급지십니다."
"지적인 것에서 섹시미를 느낀다는 거지."
"크흐흠. 육수가 간도 없이 담백하네요."
'섹시'란 단어를 왜 써가지고 그게 뜬금없이 화제가 될 줄은 몰랐다. 무표정하게 성적인 단어를 쓰면 생육적인 어감이 충격적으로 머리에 꽂히는 것이다. '성적', 정확히 말하면 '지성적'이다. 다들 자기만의 취향이 있겠지만 신체의 외부적인 상태를 관찰할 때는 걸리적거림 없이 본다. 겉옷을 벗겨놓으면 일단 골격을 본다. 뼈가 곧은지, 순서대로 배열이 잘 되어 있는지, 위치가 제대로인지 확인한 뒤 근육과 살이 얼마나 얹어있느냐는 부차적인 관심사이다. 물론 나 또한 살과 뼈, 피로 이루어진 인간인지라 육체적인 기호로는 조밀한 근육을 가진 마른 사람에게 시선이 간다. 이마, 코, 턱, 목, 귀, 쇄골과 어깨, 손목, 치골, 허벅지, 무릎, 발목을 만지고 있으면 단단한 뼈가 느껴진다. 적당한 길이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넣어보고 결이 살아있는 눈썹과 긴 속눈썹도 시간을 두고 응시해 본다. 갈비뼈에 몸을 기대면 심장소리가 울린다. 타자와 접촉하는 내밀한 형태에서 감각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비밀의 취향을 형성하는 기본 조건이 된다.
상대방에 대해 감흥이 발생하려면 그의 내부에 영혼이 살아있는지 피사체로서의 지적인 자격을 획득해야 한다. 정례 된 글을 읽다 보면 귓가가 짜릿해지고 전율이 오를 때가 있다. 대상에 대해 알고 싶다는 관심이 생기면서 관자놀이에 흥분이 감돈다. 동공이 커지고 눈매가 얇아지며 목덜미에 긴장이 피어오른다. 내적인 호기심이 육체적인 연상과 맞부딪치려면 실체를 가져야 하는데 보통 선호하는 취향의 인간들은 머릿속 감옥에 갇혀있다. 내부에서 울리는 목소리와 외부적인 언어가 결합되면서 동일성을 획득하는 취향은 단순히 공공의 기호로 분류할 수 없도록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울 수밖에 없다.
글이나 그림을 보면 만드는 사람의 모습들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책장을 펴고 작가와 호흡을 함께 하다 보면 손가락을 천천히 책상에 튀길 정도로 지루한 사람과 글을 보면 볼수록 주머니에 송곳이 튀어나오듯 흥미가 솟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머리가 투명 젤리처럼 생각이 말랑말랑한 인간들도 있고, 백지를 마주한 듯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인간들도 있다. 변덕스러운 하루의 기분과 별개로 지속스러운 관심사를 획득한다는 것은 상대의 지적인 표현 능력과 내면의 음성이 본인과 기호적으로 맞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림도 보다 보면 밝고 소란한 그림과 침착한 침묵이 개성적인 그림, 어떤 연상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그림이 있다. 음악을 감상하다 보면 노래가사만 들리는 음악과 선율이 중심인 음악과 소음으로 분리되는 음악이 있다. 취향과 기호들 (Goûts et Préférences)에 관한 지성적 에크리튀르(écriture)는 집단적인 생활환경에서 자기만의 언어를 사용하여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과 더불어 대상을 선택하는 가운데 독특한 자기 색을 드러내게 만든다.
뇌하수체 호르몬과 함께 사는 방식
"결혼하면 집 어떻게 꾸밀 거야?"
"결혼할지 말지도 모르는데 벌써 김칫국 마시냐?"
"그럼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어쩔 건데?"
"한 집 살기 어려워."
"응?"
"정말 좋아하면 옆집에 살 거야."
"건 또 뭔 소리야?"
"살다 보면 꼴 보기 싫을 때도 있을 거 아니야. 옆집에 살다가 보고 싶으면 갈 거야. 멀지도 않고."
"잠은 어쩌려고?"
"같이 자고 싶으면 자고. 혼자 자고 싶으면 혼자 자고."
"그걸 누가 받아들여?"
"싫으면 말고."
말은 조심해야 한다. 결혼관이나 연애관을 세워본 적이 없던 열여섯에 내뱉은 말 치고 쿨하긴 했는데, 진짜 말대로 되긴 했다. 다만 옆집보다 더 멀다. 사랑한다고 해도 함께 생활을 공유하는 것은 답답하다. 마음이 한결 같지 않다. 보통 인간은 사랑을 시작하면 상대의 모든 것을 알기 위해 결속을 진행하고 미래를 약속한다. 하지만 우린 바로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그리하여 사회가 규정하는 사랑의 굴레 속으로 뛰어들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혹은 새로운 길을 만들어낼 것인가는 각자의 상황에 맞게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이전에 사랑을 말했던 사람들은 굉장히 가까이 다가왔다. 돌이켜보니 사랑에 관해 나는 무딘 편이었다. 항상 타인들이 먼저 시작했고, 나는 나중에 감정이 타올랐다가 먼저 꺼지고 말았다. 말과 감정은 동행하기를 거부한다. 인간의 삶과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상대가 끊어주기를 희망하면서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 대해 하나씩 흘려봤다. 그런데, 그런 것도 사랑으로 극복하거나 함께 옆에 있겠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절망에 가까운 감정이 들었다. 스스로도 해결이 안 되는 일을 어떻게 외부인이 해결한단 말인가. 항상 헤어짐을 말하는 역할은 나의 몫이었다. 지금 돌아보니 사람마다 길이 다르다는 것을 알겠다.
감정을 풀어놓는 순간이 되면 성향상 제멋대로 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성이 있어서 안 된다고 막을 것이다. 손을 벌리는 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오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을까? 인생의 비극적인 그림들은 감정대로 움직여서가 아닐까 한다. 일에 몰두하면 시간이 빡빡하게 흐른다. 하루가 풀로 돌아가면서 물 마실 시간도 없는 뻑뻑함. 나는 그런 급박함조차 기꺼워한다. 현재의 투자가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을 느낄 수 없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현재는 미래에 대해 알 수 없는 그림 앞에서 과거에 대한 미련을 털어버리고 있다. 올라오는 감정대로 살아가면 안정적인 모든 것들을 파괴해 버릴 것이다. 감정에 대해 생각하면 그런 날 것 같은 거친 동물은 철창 안에 가둬두는 시간이 필요하겠다 싶다. 길을 걸어가면서 감정이 살아나면 애정을 갈구하는 곳에 쏟기보다는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그림을 표현하는데 쓸 것이다. 그래야 시원할 것 같다. 나는 가슴속에 엉켜진 고리를 풀어헤침에 관심이 지대하다. 정념의 사춘기는 잔인한 시절 앞에서 생활로 흡수되었나 보다.
성적 갈망, 남녀의 의식차이, 욕구의 발현상태에 대한 생각의 파편들 : 1997년 노트 속의 기록
우리는 사회의 제도와 관습에 억눌려 진실의 속성을 감춘 채 갈망하면서도 그것이 표면을 뚫고 사회로 발걸음을 내디디면 더없이 불안해한다. 내부에 은밀하게 감춰둔 소유욕을 잃어버리고 상대의 부재를 느끼기 때문일까? 상대를 향해 열망하는 갈증은 이성의 찬물로 식혀서 부드럽게 만들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 시각적으로 인지를 통해 거부해 버린 의식은 열렬히 원했던 행위도 부자연스럽게 하므로 반드시 열기를 식혀야 한다.
걷잡을 수 없는 욕망으로 육체적인 힘을 사용해 상대를 밀어붙이면 남녀평등은 있을 수 없다. 밤은 영원하지 않다. 가정의 아내와 또 다른 이름의 사회적 아내들. 무능한 손님을 탓하는 창녀나 남편의 무능을 탓하는 아내나 일반적인 여성의 특성은 같다. 그들은 성적으로 욕망이 부족해서 남성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발기해서 성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여자를 찾는 남성은 평생 여성을 이해할 수 없다. 요란한 요성이 오르가슴으로 가장된 기술적인 사회와 이젠 은밀해지지 않는 집안의 개방된 침실에서도 무능한 건 더 이상 저항할 수 있는 변명이 아니다.
상대방에게 거부당할까 두려운 심리 속에 인정받고 인정하려는 사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감정문제에 있어서 사실은 언제나 추하기 마련이다. 여성의 고소(告訴)는 몸을 가두었던 무력한 상황 때문이 아니다. 내부를 상처 입혔던 말과 행동에 의한 것이다.
"넌 성적으로 무능해"
여성의 의지를 꺾고서 침입한 남성이 욕망을 충족시키고서 내뱉은 말이었다면 그것은 둘 사이의 일치감을 소멸시킬 만한 ‘소진어’다. 한쪽의 일방적인 욕구는 남을 이해하겠다는 배려가 없는 심리이고, 그것이 행동으로 표출되었을 땐 벽을 치는 자기 파괴적인 모순이다.
그때의 나는 뭔 소리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외면적으로 건조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혼란한 삶의 상황과 대비해서 이성적인 접근이 많은 편이었다. 상대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데, 감정은 날 것인데, 인식은 차가운데, 육체적으로 들이미는 행동이 유치해 보였다. 혹은, 연배를 뛰어넘는 접근에 당황했다. 사랑을 말하는 상대방들에게 호기심은 일었는데,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호르몬은 나도 작동해. 다만 너한테는 아닌데?"
뇌적인 사랑
지금 적고 있는 것은 살면서의 궁금증이다. 이미 한참은 지나가버린 성장기의 고민일 수도 있다. 외피적인 것에 대한 반응 말고 내부의 변화에 대해서 적어보려고 한다. 이성을 내려놓은 본능에 대한 고찰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육체가 변하기 시작하고 성장 호르몬이 급격히 분비되기 시작하면서 남녀의 성징이 시작되었을 때 파괴적인 본능이 시작되었을까 싶기도 하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육체가 만들어지도록 내분비 기관의 변화가 진행 중이어서인지 기분은 급격히 위아래를 향하고 완성되는 것들이 완벽하게 보이지 않았다.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이 형태가 일그러지고 표면에 금이 가는 작품을 깨버리듯이 완벽하지 않으면 파괴해버리고 싶은 원리였다. 흠이 있게 만들어지는 것을 밟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보통 사춘기 남자아이들에게 운동을 시키는 이유가 내부의 발산이라고 하던데 그런 이유와도 비슷했나 보다.
나의 속을 관찰하면 돌진형이라고 보인다. 생산적인 일을 시작하고 집중할 때 에너지가 솟고 성에 대한 본능이 발동되긴 한다. 생태계를 관찰하다 보면 교미 중에 암거미가 수거미를 먹어버리는 그런 먹고 먹히는 관계와 비슷했다. 생명에 대한 단서를 받고 나선 가장 핵심인 상대의 머리부터 먹어버리는 것이다. 죽음에 임박하면 카타르시스가 발산되는 것과 같은 맥락인가 싶기도 하다.
어렸을 때는 성을 구분 지을 필요가 없이 아이들하고는 말이 되지 않았다. 좋은 집, 멋진 차, 근사한 이성, 완벽한 결혼, 최고의 학벌, 대단한 성공. 누구나 꿈꾸는 세계가 나의 본질적인 고민과 맞지 않았다. 될 대로 되라면서 엇나가고 싶은 마음에 누군가와 한번 자보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삶의 범위도 좁긴 했지만 나는 육체적으로도 맞는 동시에 대화가 되는 사람을 원했다. 머리가 먼저 달아올라야 되는데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한 가지 더 고민이 되었던 것은 성에 대한 감각은 뇌에서 발산되는 것인지였다. 육체적인 갈증을 해소하면 체증에 꽉 막힌 머리가 시원해질 것 같았다. 책을 봤더니 사실이었다. 뇌하수체전엽호르몬(腦下垂體前葉: Anterior pituitary hormones)에서 갑상선자극호르몬, 부신피질자극호르몬, 여포자극호르몬, 황체호르몬, 생장호르몬, 프로락틴을 조절하고, 인체의 대사와 성장과 생식을 조절한다고 했다.
"아, 그렇구나."
머리를 자극할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고민스러운 것이구나 알게 되었다. 그런데, 머리가 자극될만하면 시각이 작동을 해서 외모를 보게 되었다. 뇌에서 시작된 본능 때문에 책임질 일을 만들면 안 되니까 우발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대상은 신체적으로도 적합해야 됐다. 애석하게도 머리에서 시작되어 눈으로 자극된 뒤 한 바퀴 감각이 돌면서 이상과 다른 현실을 알게 되었다. 완벽한 인간은 없었다. 가끔 육체적 갈증을 해소를 할 때면 무조건 불을 꺼버렸다. 그런데 달빛도 있었다. 약간의 전자기기 불빛도 있었다. 제일 문제는 불빛이건 무엇이건 간에 관계가 끝나고 나서 호르몬이 사라진 상태에선 상대가 더 이상 사랑스럽긴 어렵다는 데 있었다.
호르몬의 발산과 해소를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본능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나만의 솔직한 이야기이자 궁금증이다. 쌀이나 보리나 콩이나 다 곡류라고 말하듯이, 다른 사람들 말하는 거 보니까 관계를 해석할 때 전부 '사랑'이라고 하는데, 나의 관찰일지에 따르면 사랑은 호르몬의 작용이다. 그건 머리의 작용이지 가슴의 작용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사랑한다고 누군가가 말하면 가만히 듣고 있다.
"호르몬 발동인 거야? 아직 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