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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AMA, FORGIVENESS

<천상의 소녀> 용서

by CHRIS
[OSAMA, SIDDIQ BARMARK. 2003]


“I cannot forget, but I can forgive.”

"잊을 수는 없지만 용서할 수는 있습니다."

- 넬슨 만델라 Nelson Mandela -


나의 발목을 자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 아직도 아픈데 어떻게 쉽게 잊을까? 망각과 용서. 누군가를 향해 있는 이 단어들은 행위를 실행할 대상을 갖고 있고 대상과 주체가 어떠한 위치에서 영향을 주고받는지에 따라 그 의미가 전개된다. 잊는다는 가능성을 가진다는 것과 용서의 폭을 넓히는 것. 생각만 해도 벅차다. 말보다 실행하는 것이 어렵기에 이해한다고 해도 실천의 의지는 더디게 펴진다.


그를 미워하지 말라고 사람들이 충고할 때마다 그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잠을 설치게 한다. 내가 그를 미워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얼굴의 가죽이 움직였나? 증오의 씨앗이 비쳤을까? 그래, 미워해. 미워해. 감옥에서 탈출하지 못했거든. 쳇바퀴보다 무거운 시간의 구렁텅이를. 그를 미워하는 것이 나의 삶을 가난하게 만들 것임을, 불행에서 허우적대게 할 것임을 알아도 빠져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질기고 투명한 원한의 동굴에 깊이 던져진 사람들은 그저 아파할 뿐이다.


살면서 잊을 수 없는 것들. 그것은 아픔과 연결되어 있을 때 기나긴 용서의 밧줄을 물고 온다. 달콤하고 향긋한 기억보단 서럽고 우울한 시절의 몽상이 감정의 언저리를 더 강하게 문지른다. 이불 밑에 고여있는 축축한 불안감을 어서 말리고 싶은 아이들의 거세된 본능과 같은 세기로. 잊을 수 있을 때 용서도 가능한 것 같다.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곧잘 나는 왜 ‘그’로 지칭되는 그들을 용서해야 하고 애써 잊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곤 한다. 잊지 않으면 숨 막혀 죽을 테니까. 왜 그랬는지 이야기를 들으려 죽이고 싶을 테니까. 그래설까? 미움과 허무의 덩어리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폭력적으로 변하는 감정을 쉽게 가라앉힐 수 없다.


이 세상에는 비상식적이고 비정상적이고 비윤리적이며 반인륜적인 일들이 가득하다. 설명을 하면 할수록 꼬여만 가는 일들이 나를 정당화할 구차한 부연 또한 멈추게 한다. 볼이 발그레한 소녀의 얼굴은 어두웠다. 나의 검은 얼굴은 더 어둡고 어둡다. 차별 없는 세상에서 살기를 바랐는데 우매한 차별과 우스운 관습과 욕심의 장벽은 여전하다.


할머니는 아이의 길게 자란 머리칼을 땋았다. 소녀가 잠든 사이 풍성한 덤불을 뭉툭한 가위로 잘랐다. 아침에 일어난 그녀는 머리뭉치를 화분에다 심었다. 나의 기나긴 슬픔이여, 꽃나무처럼 피어나라. 하늘로 곧게 뻗어가라! 우리는 같은 사람이지만 분리된 공간에서 차별의 정당한 가치와 역할에 대해 설교한다. 전쟁과 평화. 의무와 희생. 파괴에서 생성이 일어나는 것은 우주의 법칙이지만 인위적으로 만드는 윤회와 회전은 살아가는 자에게 정리될 시간을 앗으면서 혼돈을 가중시킨다. 왜 이렇게 처절하고 갈라진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하나의 개체화된 다른 인격체인데도 차별을 견뎌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은 오늘을 숨 쉬고 살아간다. 얇은 부르카의 장벽에 갇혀 “함께!”를 웅얼거리며.


무지개는 하늘이 커다랗게 울고 나서 떠오른다. 희망의 길목에서 좌절한 사람들이 바라는 소원을 일곱 가지 색상의 다리 위에 펼쳐놓는다. 할머니가 들려주신 옛날이야기는 이런 말을 전했지. 눈물 없이는 진정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는 걸. 종교적 신념과 시절의 관습, 전쟁과 파란, 차별과 편견이 하나의 시대장벽이 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잊힐 만할 때 잊을 수 없는 거리가 남아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갈등이 해결이 됐다고 선언해도 모든 것이 끝나는 건 아닐 텐데, 한숨이 절로 나온다.


2006. 2. 26. SUNDAY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내기엔 나의 언어는 너무 조잡하다. 서로 뒤엉켜 배열조차 되지 않는다. 그림은 머릿속에서만 완성되었다가 허물어진다. 창조적인 일(事), 습관적인 생(生), 반복적인 형(刑), 전위적인 사(思). 몸은 하려고 하지 않고 마음은 동경만 반복한다. 무엇하나 이뤄지지 않고 무엇하나 파괴되지 않는다. 가슴의 내벽만이 끊임없이 갈구하는 목쉰 외침 속에서 영혼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돌다 돌다 지쳐 남아날 것이 없을 때까지 방황한다. 비밀의 문을 깨뜨린 자는 누구인가. 날 철저히 외면한 이는 누구인가. 난 무엇이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난 왜 가만히 정지해 있나. 극적인 인간들. 희세의 영웅들. 비범성을 세상에 남기고 간 이들. 모두가 기이한 환경과 분위기, 비몰적 상황에서 독특한 본질을 키워나갔다. 1997년. 존경할 이 드물고 같이 호흡하기 조차 꺼려지는 이가 태반이다. 전부 다 착각하고 있는 미치광이다. 정신병원에 앉아있는 듯한 묘한 불안감과 답답함. 숨 막힘. 전율. 비통. 어지럼증. 계속 있다간 내부가 폭발하여 나도 저 미치광이들에 끼게 되리라. 전부! 매일 송곳 같은 자각이 달팽이 촉수의 감각으로 깨어있다. 내 얇은 표피가 무감각 속에 취해있는 인간들의 가시를 스쳐 지나가며 피를 흘린다.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감과 타인에 대한 연민으로 벗어날 수 없다. 가끔 발작한다.


1997년 겨울 아침 나에게 썼던 편지가 있었다. 분노스러웠던 부분은 빼버린다. 어차피 허망하다. 그때를 되짚었을 때 침묵으로 가려진 상황이 고착되었다. 진물이 벅찬 고름이 되어가고 있다. 피딱지는 언제쯤 굳어서 이탈한 자리에 앉을까. 보호막이 떨어져야 상처도 아무는 것임을 배우게 될 텐데 속의 위벽뿐 아니라 말짱하던 외벽까지도 허물어지고 있다. 그 사실이 무척 괴롭다.


편지는 지속적으로 써왔지만 그 많던 글들도 어디로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타인에게 건네면 속된 기억은 사라진다. 그러다 적은 종이도 그을리면 생각도 지워진다. 남에게 전달한 순간 벌써부터 밖으로 뛰쳐나가 버린다. 무엇 때문에 어떤 것을 적고 그리고 만지고 부르고 지우고 나타내고 조합하고 찍고 문지르는 것일까. 무엇을 표현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인가. 단순히 흩어진 나열이 최선인가.


친구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림은 좀 더 자유로울 때 그리는 거라고, 글은 억압될 때 쓰는 거라고. 뭉뚱그려진 글들에서 피해 가고 싶었다. 한 붓의 터치에 마음을 활짝 담아보고 싶었다. 그게 안 된다. 도피하지도 못하는 어리석음이 줄기찬 인륜의 끈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지우지 못할 천륜은 또 뭔가. 기분 한번 이상하다. 커피를 타 마셔도 속이 내리질 않는다. 완전 돌기 직전이다. 평상의 얼굴로도. 편지를 받을 때마다 조용해지기 어렵다. 글을 배우고 생각이 주어진 것은 정상적으로 살라고 그런 것이 아닌가. 저 머릿속은 뭘로 가득 찼는지 모르겠다. 적나라하게 다 까발린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을 일, 답답하다.


2004. 9. 29. WEDNESDAY




마음에 쌓인 원한을 지우기란 쉽지 않다. 심리적인 거리가 먼 사람에게는 냉정한 얼굴로 이성적인 행동을 하지만, 가까운 사람일수록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인해 폭력적인 감정이 이입되는 경향이 있다. 원한이라는 악한 감정은 타인과 나의 거리를 좁힌다. 타자와 내가 이름을 알 수 없는 별개의 사람들이 아닌,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기억의 원흉으로 강하게 결속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긴 시간 동안 울분에 차 있었다. 불편한 감정을 덜어내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 힘이 들었다. 타인이 불쌍했다가 이해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서 마음은 언제나 폭풍우를 맞은 파도처럼 울렁거렸다. 그들에 대해 면밀하게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고 특별히 신경을 써야만 했던 보호와 책임의 굴레에서 어떻게 멀리 떨어질 수 있을지는 인생의 숙제와도 같았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그들에게 일말의 책임감이 남아있다면 스스로 해결하고자 행동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고 또한 그들이 당연히 일정 부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상대방을 완전한 개별자로 인식하지 못한 머뭇거림이 원망으로 변했던 것이다.

모든 행동의 인과관계는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일어난다. 어쩌면 주체적이지 못한 상태에서 타인의 행위로 인해 삶이 어질러지고 피해를 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문제가 발생했을 때 타인을 원망하지 않고 그들의 행위와 자신 스스로를 분리해서 보는 일은 어렵다. 행위의 주인이자 본질인 인간은 어떤 행위로 이루어지고 어떤 행위와 연관되어 어떤 행위에 대해 결괏값을 얻는다. 진정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에서 멀어지고자 한다면 나와 타인의 행위는 별개로 분리하여 봐야 한다. 각자의 행위를 실행했던 사람은 각자의 선택으로 인해 그 선함과 악함의 보답을 얻게 된다. 선택한 행위로 인해 벌어진 일은 스스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각자 삶의 형태를 구성한다. 풀리지 않았던 삶의 공식을 풀어내며 고민했던 시절에 위로를 보낸다. 그래도 아직 괜찮다. 난 살아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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