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의 <토가타와 푸가 Toccatas and Fugues>에 흠뻑 녹아버린 한 늙은 영혼이 있다. 비린 냄새로 가득한 수풀 밖으로 희망을 속삭인다. 장미 문양의 창유리를 응시하며 거룩한 음성을 낸다. 묵직하고 깊은 오르간 연주에 천상의 선율을 싣고서. ‘희망’은 나에겐 사치스러운 단어다. 잡을 수 없는 동아줄과 같다. 힘겹게 잡는다 해도 무거운 마음을 끌어올려줄 것은 썩은 동아줄이다. 설령 마지막 끈을 잡고 운이 좋아 웃으며 하늘로 올라간다 해도 단단한 줄 알았던 줄기는 한순간의 기대를 배반하듯 몸을 바닥으로 내치며 수수밭 위로 땅을 붉게 노을 지게 할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 뿌리부터 낡았음을 알지만 뭐라도 잡으려 한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땅에 끌린 가슴을 늪지대에서 끌어올리려 진력을 다한다. 구정물이 가득 찬 심장의 물 빠지는 소리를 듣기 위하여. 바닥으로 떨어지는 오염된 가죽의 분무기에 마른땅도 함께 젖는다.
도시의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 순수한 열정의 들판 아프리카는 갑갑한 도시에 갇힌 사람들이 해방의 탈출구로 머릿속에 그리는 목록의 상위를 차지하지만 사실 자유와 평등과 행복이 조화된 곳은 아니다. 관광을 주 수입으로 하는 백인 권역의 정비된 보호지대를 제외하고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검은 흙의 보고(寶庫)에선 끊임없이 화염이 치솟는다. 동족을 살해하는 격함이, 부모와 형제를 잃은 슬픔이, 불구가 되어버린 아픔이 가득하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참극이 연일 방송되던 1996년. 당시 1994년 후투와 투치 족의 유혈에서 빠져나온 피난민들의 복귀도 매체에서는 간간히 다뤄지고 있었다. 잘린 팔다리, 구멍 난 얼굴, 피에 절은 아기와 엄마, 파리 구덩이를 보는 듯 뭉쳐진 시체들. 사진 속에 담긴 르완다의 참상은 내 삶의 많은 부분과 맞닿아 있었다. 심장이 멎는 충격이 머리를 엄습했다. 하루와 반나절을 걸린 거리에서도 가능한 전류가 휩쓸었다. 간혹 현실과 직접적으로 상관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한다고 투박주는 사람들이 있다.
"복잡한 너의 집 일에나 신경 쓰지 왜 그 먼 곳의 이야기에 신경을 갉아먹냐."
고상한 성어로 말하면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 곱상한 말의 기본정신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내 것도 다룰 힘이 사라지면 자꾸 밖에서 끌어다 말하는 절망이 큰 목소리로 불거진다. 나의 속은 곪아서 치유불가능이다. 그러니 비슷한 동족을 찾아 서로 몰려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직접적인 접촉으로 옮기지 않는 문둥병인데 세상과 격리된 나환자촌. 그들은 왜 떨어져 사는가. 배타적인 시선에 더불어 자신의 것만 깨끗하면 된다는 이기적인 발상의 폐해는 어디에서든 적용된다. 약육강식의 법칙은 문명사회로 진입한 인간의 현장에선 상관없는 일인가. 아니, 도구화된 물질의 풍요 속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진행된다. 미개화된 지역을 식민 강탈하던 외부의 전제적인 지배가 끝나고 자신의 영역을 쓰다듬는 자들은 이미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농작물을 다루던 곡괭이는 거만하게 인간의 목덜미를 친다. 한번 피 맛을 본 토끼가 고기 없이 못 사는 이치다. 악한 근성을 드러내며 채식을 권유해도 으르렁대며 귀한 자식까지 잡아먹는다. 빨간 눈의 비애를 반복하며 미친 눈꺼풀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본성의 참된 영역까지 잠식한다.
인간 살육과 인성 전쟁이 격렬하게 벌어지는 아프리카로 도시의 사람들은 왜 자유 귀족처럼 한쪽 눈만 가리고 놀러 가고 싶어 할까? 당신은 자연의 자생능력과 인간성의 화해를 믿는가. 지속적인 개발의 손길을 내밀며 가난의 극복을 약속하나 에이즈가 인구의 반을 장식하고 병균의 밀림의 온상인 그곳에서, 절규하는 소통불가의 문맹 촌락에서 어떤 색깔의 잃어버린 꿈을 찾고 싶은 것일까. 아프리카에서 아름다운 청춘을 시작으로 인간과 근접한 동물, 신이 내린 1%의 차이를 말하며 버려진 땅을 너무 슬프게만 보지 말라고 알려준 한 사람이 있다. 불쾌한 시체 냄새가 가득한 곳에 찌푸린 얼굴을 숙이며 웅크리던 나를 일으켜 세웠다. 무정한 인생의 바다엔 급격한 오르막과 내리막도 있다고 등을 쓸어주던 마른 손가락.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인생사가 나와 달리 잘 풀려간 듯 보여 기분이 우울했지만 나보다 곱절을 산 관찰의 세월을 따라 그 따스하게 울리는 저음을 깊게 새겨듣기로 했다. 그녀는 아프리카로 떠난 첫날, 대양(大洋)의 신선한 서막을 말했다.
"무한한 바다 세계의 일부가 된 느낌, 공기, 태양, 별, 바람. 이 모든 것이 생생하게 전해준 시간들은 나의 영혼을 성숙시키고 내적 자아를 만들어갔다. 위대한 힘을 믿는 나의 신념은 더욱 강해졌다. 땅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그 바다에서의 항해를 통해 아프리카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삶의 시간과 영원성의 의미, 그리고 철학에 몰두했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의 나날은 막을 내렸다."
부러웠다. 떠나갈 수 있는 그 발이 너무나 반갑고도 질투가 났다. 시끄러운 욕설이 그치고 주위가 잠잠해지면 어두운 방 안에서 숨구멍을 열기 위해 아가미도 없는 호흡을 반복하는 시기가 부풀었다. 하지만 착한 영혼의 어루만짐은 사나운 물어뜯음도 잘 달래주었다. 으르렁거리는 입술은 금세 바삭거리는 손길을 그리워했다. 다시 온순한 매무새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봉우리의 아침을 반기며 말 못 하는 친구들을 찾기 위해 개울물과 바람에게 인사를 하는 노래를 듣고 싶었다. 쓸모없이 산다고 투정하며 아픔만이 상존해서 괴롭다고 말하는 나에게 입을 열었다. 인간만이 품성이나 합리에 길들여 있지 않음을, 즐거움과 슬픔 같은 감정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님을 확인시켜 주었다. 고통받는 존재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말없음에도 신음을 낸다고 했다. 기본 본능을 초월한 잠재력이 악질적으로 변할 때, 언제나 슬픈 것일 수밖에 없다고 다독여줬다. 그러한가. 알고 싶다. 이 자연계에 숨어있는 어두운 측면의 상동(相同)한 자태를.
부시맨의 콜라병과 에스키모의 이글루가 관광용품으로 각광받던 시절. 사람들은 고상한 미개인의 순진한 행동에 빠져 있었다. 가려진 인간의 진실한 본성은 극도로 평화스럽다고 외치며 영화적 소재로, 노래의 찬양으로 끌어 썼다. 위계의 서열은 떠도는 흙먼지에선 가려지고 썩어빠진 집단 갈등은 눈보라에서 지워진다. 폭력을 뉴스의 우선 가치체계로 삼는 이 땅의 미디어가 추구하는 자극은 어느새 꼬리를 내렸는가? 악마적인 유전인자는 100% 순수를 믿는 절대적인 확신에서 천사의 웃음을 전해줬는가? 절감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 무엇을 사랑하건, 사랑의 깊이가 사랑하는 대상을 잃었을 때의 슬픔의 깊이를 대신한다."
온갖 종류로 투혈할 수 있는 대상이 있겠지만 단 하나로 말할 수 없는 기준인 상실의 깨달음, 그 속에 존재하는 사랑. 그래서 이 사랑이 무서울 수밖에 없다. 증오와 겹치고 분노를 껴안으며 노역함을 절개하는 사랑. 많은 것을 잃어서 목적 없고 대상 없는 사랑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음인가. 난 은빛이 빛나는 가공의 세계로 적(敵)들을 인도하지도 못했고 반대파인 나 자신도 넘겨버리지 못했다. 서로를 잡아먹으며 눈물을 흘릴 뿐이다. 불쌍하게도 상대를 위한 모르모토가 되어버리는 공격에 질겁해 왔다. 잔인함의 피학성을 즐기는 자가 아니라면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기를. 살아있는 이 심장에 무심한 목소리로 화살을 박아 넣으며 웃지 말기를. 한 달음 밀려오는 소름 속에서 움찔하며 울어버리는 눈에 고통은 그만!
회색의 둥근 공, 자연의 회생력, 젊은 에너지와 열정적인 시각, 불굴의 인간 정신. 한바탕 먹구름이 회오리 친 뒤 작게 존재를 울리던 판도라의 상자 속에 담긴 내용물이다. 거칠고 원시적인 세계에서 삶의 반경을 급격히 늘린 마술공의 기적을 다시 한번 믿어본다. 엎어지면 까진 생채기에 검은 딱지가 붙는 판막의 힘에 의지해본다. 뿌리 밖 새싹을 피우려 더러운 공기를 흠뻑 마시고 산소를 내뿜는 흰 숨을 들이켠다. 혼란과 소요를 잠식하는 숨겨진 고결한 걸음들을 몰래 따라간다. 집단적 학살은 일정 구역 안에서는 멈춘 듯 보이지만 미세하게 금이 간 곳을 뚫어지게 응시하면 수많은 미생물이 발악하는 걸 지켜보게 된다. 딱딱한 회색분자도 많이 밟히면 균열을 이룬다.
"죽음은 없다. 다만의 세계의 변화가 있을 뿐이다."
나의 죽음은 변화에도 미치지 못하는 숨죽임이다. 괴로움이 선혈 흘리는 가운데서도 황홀함의 궤도로 올려놓는 공포의 발작에 취하고 싶다. 어슴푸레한 새벽의 향기에 몸을 누이며 추억의 보물상자에서 잊힌 황금의 시간을 꺼내고 싶다. 저물어가는 내 희망의 끝 자락을 꺼내서 얼굴에 비비대고 싶다. 고통으로 검게 변한 가슴을 떠오르는 태양 위로 건져내고 싶다. 분노는 태양의 빛깔이 되어 영원히 지지 않도록 푸른 창공으로 날려 버리고 싶다. 저 붉은 바다가 숨 쉬는 이 순간에!
2004. 11. 12. FRIDAY
염색체 염기서열이 하나만 어긋나도 인간은 구조적인 이상으로 신체적 기능과 외형에 결함이 생기게 된다.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 차이는 약 1.6%라고 한다. 이 유전자 차이로 인해 인간과 침팬지는 다른 사회적 구조를 구성하게 되었고 각자 진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침팬지 엄마, 동물 행동학자이자 환경운동가 제인 구달의 이야기는 수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종의 구분은 어디에서 시작되고, 인간과 동물을 분류하는 차이는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현재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조상과 같은 모습의 영리한 침팬지와 현 인류의 본질적인 차이는 세포 DNA(DeoxyriboNucleic Acid) 속으로 끼어들어 자신의 RNA(RiboNucleic Acid)를 증식시킬 수 있는 '레트로바이러스 (Retrovirus)'에 있다.레트로바이러스는 단일가닥의 RNA를 기반으로 한 바이러스로, 숙주 세포에 감염되면 자신의 RNA를 이중나선 구조의 DNA로 변환하여 숙주의 게놈(Genom)에 삽입하고, 이 과정을 통해 레트로바이러스는 숙주의 유전체에 영구적으로 통합될 수 있다. 이런 바이러스 유전자 중 일부는 세대를 거쳐 유전되면서 인간과 다른 동물의 유전자에 흔적을 남기는데, 이를 내인성 레트로바이러스 (Endogenous Retrovirus, ERV)라고 부른다. 인간과 침팬지는 동질의 조상이라는 근간에 유사한 레트로 바이러스 유전자를 갖고 있지만, 도구 활용의 다양성, 고도화된 신경세포의 발달과 복잡한 뇌의 적응 및 이에 따른 인지적인 차이, 신체를 보호는 과정과 면역 체계 발달과정, 유전자발현을 제어하는 전사조절인자 (Transcription Factor)가 다르게 발현되어 지난 역사를 통해 고유의 발달과정을 갖게 되었다.
《희망의 이유 Reason For Hope》는 침팬지와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행동인지학을 연구하고 인간과의 차이를 설명해 낸 제인구달의 자서전이다. 애완동물과 생활하면서 그들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자신의 전재산을 물려주는 부호들도 있듯이 학자적인 시각에서 연구자로서의 객관성과 냉정함, 삶을 공유하는 친우로서의 친밀함과 감정교류는 대립되는 개념인지 궁금해진다. 우리는 살아있는 대상을 대할 때 연구적 시각으로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공존을 위한 존재적 개념으로 봐야 할 것인가? 보통 지능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면 물리적으로 동일종이 아니어서 공통의 이해를 가지지 않을 땐 내부적인 상상을 발휘하여 타자와의 교류를 생각할 것이다. 나는 학술적인 연구자의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대상을 분석하고 그들의 삶에 스스로를 투영하는 행위는 개인적인 삶에만 적용하고 있다. 건조함이 가득한 생에서 눈에 띄는 지표를 쌓는 것은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인가.
희망의 이유(Reason for Hope)는 제인 구달이 경험한 시간 속에서 떠오른다. 부제로 제시한 영적인 여정(A Spiritual Journey)은 사회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유지와 안정을 넘어 발전을 생성하는 이질적인 유전적 특성인 전사, 합성, 변형이 인류의 차이를 만들어낸 기본임을 기억하게 만든다. 아프리카에서 인간적인 접근의 방식으로 희망의 이유를 전개한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울지마 톤즈 Don't cry for me Sudan 2010>의 이태석 신부는 종교색을 떠나 생활의 필요가 존재하는 의사의 삶, 모든 것을 털어버린 진솔한 인생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 자리에 없지만 분열에 땅에서 몸소 보여준 공존의 삶은 생존에 허덕이던 타국의 젊은이들이 생명을 살리는 의사라는 직업을 갖고 죽음과 반대되는 삶이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방식이 되었다.
인간이 타인과 함께 하는 이유를 제시하는 방법과 접근적인 구도는 다양하다. 모든 것에는 작용과 반작용이 있고, 선에는 악이 있고, 발전과 퇴보의 과정이 혼재되어 있다. 인간은 각자 입장을 선택하며 살고 있다. 역사를 추동하는 방식을 잘 관찰해 보면 희망이 꺾이는 어두움의 순간 속에서도 거대함을 숨긴 가녀린 빛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판도라의 상자 속에서 두드림을 멈추지 않았던 한줄기 희망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