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늘 평가와 판단의 한가운데 서는 일이다.
의도와 다르게 해석되기도 하고,
충분한 설명 없이 결론이 먼저 내려지기도 한다.
사실이 모두 드러나기 전에 평판이 앞서 달리기도 한다.
그럴 때 사람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억울함을 반복해 말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기준을 더 또렷하게 세울 것인가.
나는 요즘, 한 사람의 문장을 시간을 내어 되새긴다.
읽는다기보다, 붙든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다.
그의 이름은 정약용,
호는 다산(茶山)이다.
다산은 드라마 속 인물이 아니다.
영웅 서사로 소비되는 소설 속 주인공도 아니다.
그는 한국사에 분명히 기록된 실존 인물이다.
우리는 흔히 그를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쓴 실학자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는 책상 위의 이론가가 아니었다.
그는 정조의 신임을 받아 개혁 정책에 참여했고,
특히 수원 화성 축조 과정에서
공사 체계를 합리화하는 데 기여했다.
거중기 활용과 공정 관리, 비용 절감과 기록 정비.
그는 방식을 바꾸려 했다.
기록과 계산을 중시했고,
관행보다 구조를 보았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낡은 틀을 손보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1801년, 강진으로 유배된다.
그의 나이 마흔.
계기는 신유박해(辛酉迫害)였다.
1801년은 신유박해(辛酉迫害)의 해다.
당시 천주교, 곧 서학(西學)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었다.
조선은 유교 질서를 국가의 근간으로 삼고 있었고,
통치의 정당성 역시 그 질서 위에 세워져 있었다.
천주교는 여러 지점에서 기존 체제와 충돌했다.
조상 제사를 금지한 교리는 효를 근본으로 삼는 유교 윤리와 맞지 않았고,
만민 평등사상은 엄격한 신분 질서를 상대화했으며,
외래 사상이라는 점은 정치적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정조 생존 시에는 일정 부분 완충지대가 있었지만,
사후 정국은 급격히 보수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남인 계열 인물들이 타격을 입었고,
개혁 성향의 인물들은 일제히 의심의 시선에 놓였다.
다산은 젊은 시절 서학에 접했고, 천주교 교리를 접한 인물이었다.
형제들 가운데에는 실제 신앙을 받아들인 이들이 있었고,
특히 형 정약종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박해 속에 처형되었다.
다산 자신이 끝까지 교리를 신앙으로 고백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지만,
천주교 관련 인맥과 사상적 교류 속에 있었고,
그로 인해 의심을 피할 수 없는 위치에 놓였었다.
박해의 시기, 이런 ‘연루’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가문 전체가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그는 강진으로 유배된다.
그러나 천주교는 ‘직접적 명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산은 이미 개혁 정책을 추진하던 인물이었다.
정조의 신임 아래 제도와 관행을 손보는 일에 깊숙이 관여했다.
기존 질서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은, 보호막이 사라지는 순간 가장 먼저 표적이 된다.
정조라는 정치적 우산이 사라진 뒤,
천주교와의 관계는 공격하기에 충분히 명확한 이유가 되었고,
그간 누적된 견제와 반감은 그 명분 위에 얹혔을 가능성이 크다.
정치적 격랑은 언제나 단선적이지 않다.
겉으로는 하나의 죄목이 내세워지지만,
그 아래에는 권력 구도, 당파 갈등, 감정,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다산은 그 복합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밀려났다.
마흔의 나이에.
강진에서의 18년.
그는 억울함을 변론하는 데 생을 소모하지 않았다.
대신, 글을 썼다.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그는 말한다.
“청렴자 목민지본무 일호불취어민(淸廉者 牧民之本務 一毫不取於民)”
청렴은 목민의 근본이니, 한 터럭이라도 백성의 것을 취하지 말라.
『흠흠신서(欽欽心書)』에서는 이렇게 적었다.
“흠흠자 경신지지야(欽欽者 敬慎之至也)”
흠흠이란 지극히 공경하고 삼가는 것이다.
억울함 속에서도
그는 ‘삼가라’고 썼다.
판단을 서두르지 말 것.
권한을 가질수록 더 조심할 것.
감정보다 원칙을 앞세울 것.
나는 이 문장을 오래 붙들고 있었다.
분노보다 절제가 앞서는 태도.
변명보다 기준이 앞서는 태도.
그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가 무너질 수 있는 자리에서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올해 쉰이다.
연구기획 업무를 하고 있다.
현 경영진과의 다툼은 끝나지 않았다.
왜곡은 반복되었다.
그러나 최근, 그 강도는 약해졌다.
이유는 단순하다.
하나 둘 사실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거짓으로 맞서지 않았다.
자료를 정리했고, 기록을 남겼다.
감정으로 반응하지 않으려 애썼다.
사실은 느리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
그럼에도 일부는 여전히 나를 믿지 않는다.
이 또한 현실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지키고 싶은가.
명예인가.
자존심인가.
승리인가.
아니다.
나는 기준을 지키고 싶다.
그래서 다산을 붙든다.
그의 저술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의 태도를 되새기기 위해.
강진에서 다산은 자신의 거처를
수오재(守吾齋)라 불렀다.
지킬 수(守), 나 오(吾), 집 재(齋).
“나를 지키는 집.”
상황을 바꿀 수 없을 때
그는 자신을 지키는 쪽을 택했다.
밖에서는 여전히 갈등이 있다.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거짓이 진실로 굳어지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안에서는 나를 지켜야 한다.
억울함이 나를 규정하지 않도록.
분노가 나의 언어가 되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하다.
데이터를 더 정밀하게 검증하고,
논리를 더 또렷하게 세우고,
구조를 더 공정하게 설계하는 일.
그것이 나의 연구이고,
나의 방식이다.
이 글은 특정한 처지의 사람만을 향하지 않는다.
사회생활을 하는 누구나
설명되지 않는 판단과 마주할 수 있다.
충분히 말하지 못한 채
평가를 받아야 하는 순간을 겪는다.
그럴 때 우리는 묻게 된다.
밖으로만 싸울 것인가.
아니면 안을 먼저 다질 것인가.
다산은 유배지에서 자신을 소모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정교해졌다.
나 역시 그렇게 하고 싶다.
쉰이라는 나이는
감정만으로 반응하기에는 충분히 긴 시간이다.
밖이 소란할수록
안은 더 또렷해야 한다.
나는 오늘도 시간을 내어
다산의 문장을 되새긴다.
억울함을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해서.
강진의 수오재처럼,
나 역시 나의 자리에서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수오재를 지어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