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라노 동계올림픽이 내게 남긴 것
「다산을 되새기는 시간, 나의 수오재를 짓다」를 올린 뒤, 그 글에서 다 담지 못한 생각이 남아 이 글을 다시 정리해 적는다.
2026년 밀라노 동계올림픽 여자 쇼트트랙 3,000m 계주 결승.
경기 후반, 한국 팀은 치열한 순위 경쟁 속에 있었다.
코너마다 몸이 스칠 듯 위태로웠고,
순위는 한 치 앞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심석희의 강한 밀어주기.
그 힘을 받아 최민정이 2위로 올라선다.
그리고 마지막 주자 김길리.
마지막 바퀴,
몸을 낮게 붙이고, 빙판을 깊게 파고들며 앞으로 나아갔다.
머뭇거림이 없었다.
주저함도 없었다.
앞선 선수를 지워버리듯 추월한다.
관중석이 일제히 일어난다.
그리고 결승선.
금메달.
그 순간 김길리는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웃었다.
아이처럼 맑은 표정.
그러나 그 웃음은 가볍지 않았다.
그 안에는 시간이 들어 있었다.
계주는 혼자 완성할 수 없다.
마지막 바퀴의 속도는
그 이전의 모든 바퀴가 밀어 올린 결과다.
이 팀은 한때 갈등을 겪었다.
대표 자격 정지와 논란,
서로 다른 입장과 상처의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같은 유니폼을 입고,
같은 레인을 달렸다.
갈등이 있었고,
징계가 있었고,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출발선에 섰다.
화해는 한 문장으로 끝나지 않는다.
신뢰는 선언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같은 목표를 향해 다시 몸을 싣는 시간,
그 시간을 통과해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그날의 웃음은 더 단단했다.
이겨서가 아니라,
함께 완주했기 때문에.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팀추월.
그 중심에 있었던 이름, 김보름.
경기 직후 일부 보도에서 ‘왕따’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인터뷰 발언 일부가 짧게 전달되었고,
상황은 단순한 갈등 구조로 받아들여졌다.
여론은 빠르게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후 경기 전략과 운영 방식이 다시 설명되었고,
일부 보도에 대해서는 법원이 허위 또는 왜곡 판단을 내렸다.
정정보도와 손해배상 판결이 있었다.
처음 알려졌던 인식과는
다른 부분이 있었던 셈이다.
사실관계는 일정 부분 정리되었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겪은 부담과 상처는
결코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결국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진실은 뒤늦게 정리되었고,
시간은 이미 흘러 있었다.
김길리의 웃음은 하루 만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팀의 시간, 갈등의 시간, 기다림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졌다.
우리는 종종 결과만 본다.
금메달, 순위, 기록.
그러나 그 뒤에는
보이지 않는 시간들이 있다.
함께 달리는 법을 다시 배우는 시간,
오해를 견디는 시간,
스스로를 다잡는 시간.
그리고 마침내
웃어도 되는 순간이 온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개인의 억울함보다 더 큰 것을 생각했다.
계주는 결국 신뢰의 경기라는 것.
마지막 주자의 질주는
앞선 세 사람의 믿음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
조직도 다르지 않다.
서로 다른 생각과 입장이 있고,
때로는 오해도 생긴다.
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웃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함께 완주하느냐다.
김길리의 마지막 바퀴는
속도의 장면이 아니라
신뢰의 장면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장면에서
이 질문을 다시 붙든다.
지금 나는
어떤 바퀴를 달리고 있는가.
누군가의 마지막 바퀴를
제대로 밀어주고 있는가.
모든 일은 즉시 정리되지 않는다.
모든 오해가 곧바로 풀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있다.
자기 레인을 지키는 것.
넘어지지 않도록 중심을 낮추는 것.
그리고 언젠가 올 마지막 바퀴를 위해
지금의 한 바퀴를 성실히 도는 것.
웃음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통과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표정일지도 모른다.
그날의 빙판 위에서
나는 금메달보다 더 큰 장면을 보았다.
함께 달린 사람들이
마침내 같은 방향을 보고 웃는 순간.
그 장면이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