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3년째 조직에서 일하고 있다.
대기업에서 시작하여 공공기관으로 몇 차례 이직을 했고,
지금도 공공조직 안에 있다.
오랜 경험이 쌓이면 웬만한 일에는 단단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도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은
쉽게 무뎌지지 않는다.
최근 나는 한 가지 질문 앞에 다시 서게 되었다.
조직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위’의 권한일까,
아니면 ‘옆’의 태도일까.
이 질문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오래 전의 기억과
지금의 경험이 겹치며 다시 떠오른 것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속 ‘구구즈’는
특별히 위대한 인물들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를 이용하지 않는다.
약점을 거래하지 않고,
성과를 가로채지 않으며,
힘의 방향에 따라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그래서 그 장면들은 감동적이라기보다
안정적이다.
저런 동료가 옆에 있다면
실수해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우리가 그 작품을 자주 떠올리는 이유는
완벽한 리더를 그리워해서가 아니라
내 옆을 지켜주는 한 사람을
현실에서 쉽게 만나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의 아저씨' 속 박동훈은
팀원이 실수했을 때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문제를 덮지 않는다.
사람을 먼저 무너지지 않게 세운다.
'미생'의 오상식 차장은
“우린 친구 아니다. 일로 만난 사이다”라고 말한다.
관계는 담백하지만
위기 앞에서는 대신 선다.
이 작품들이 오래 회자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야기의 중심이 성공이 아니라
사람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오래 일하며 내가 확인한 것도 같다.
존중은 거창한 말이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 드러나는 선택이라는 것.
2008년, 당시 공공기관 홍보팀에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기관장의 지시로 신문에 기고할 글을 거의 완성했고
탈고 직전 팀장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나를 회의실로 불렀다.
문을 닫고 말했다.
“이거, 내 이름으로 내고 싶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그 장면은 또렷하다.
닫히는 문 소리,
잠시의 정적,
그리고 그의 말투.
이 이야기는 드라마가 아니다.
내가 실제로 겪은 일이다.
나는 따지지 않았다.
대신 그 글을 투고하지 않고 버렸다.
그것이 내가 선택한 방식이었다.
소란을 만들지 않으면서
나를 지키는 방식.
그 팀장은 이후 본부장까지 역임하고 정년퇴직했다.
나는 그 일을 외부에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기관을 떠났다.
이직의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그날의 기억은 분명히 한 축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한 가지를 분명히 하게 되었다.
타인의 이름을 빼앗지 않는 사람으로 남겠다는 것.
시간이 흐르면
비슷한 장면은 형태만 바꾸어 나타난다.
보고는 사람을 통해 왜곡되기도 하고,
판단은 충분한 설명 없이 내려지기도 한다.
누군가는 조용히 배제된다.
조직은 언제나 합리적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권력은 늘 공정하게 작동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사람은 선택할 수 있다.
누군가의 공을 빼앗지 않는 것.
쉽게 단정하지 않은 것.
침묵으로 타인을 고립시키지 않는 것.
결국 조직의 온도는
제도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결정된다.
그래서 어떤 날에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자꾸 떠오른다.
그 세계가 비현실적이어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너무 드물기 때문이다.
오래 일할수록
결국 남는 것은
누가 얼마나 잘했는지가 아니라
누가 누구를 어떻게 대했는지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