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쌍문동에는 있고, 회사에는 없는 것
응답하라 1988에는 오래 남는 장면이 있다.
천재 바둑 기사 최택이 패배하고 돌아오는 날.
택이 아빠 봉황당은 친구들에게 말한다.
“택이 오늘 졌다.”
그 한마디에는 조심스러움이 묻어 있다.
천재의 패배는 보통 사람보다 더 무겁게 다뤄지니까.
하지만 친구들은 숨을 죽이지 않는다.
평소처럼 방에 들어가, 평소처럼 빈정댄다.
“야, 너 발렸다며.”
“병~신.”
“야, 너 똥 싸도 돼. 대신 냄새나면 안 돼.”
처음 들으면 철없는 농담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은 잔인하지 않다.
오히려 깊다.
그 말은 실패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다만 실패가 그 사람의 전부가 되지 못하게 막아선다.
너는 졌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대로라는 선언처럼.
그 뒤 또 하나의 기억에 남는 장면이 나온다.
최택이 우승하고 돌아오는 날,
동네 친구들은 피자를 시켜 축하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정작 우승한 택이가 가장 적게 먹는다.
영웅이 된 날인데,
조명이 쏟아지는 자리인데,
그는 중심에 서 있지 않다.
친구들은 평소처럼 떠들고,
평소처럼 장난을 치고,
평소처럼 먹는다.
“역시 천재!”라며 추켜세우지도 않는다.
대단하다고 무게를 싣지도 않는다.
그저 함께 피자를 먹는다.
우승은 택이의 것이지만,
기쁨은 ‘우리’의 것이 된다.
이겨도 평소처럼.
져도 평소처럼.
그들은 성공을 과장하지 않고,
실패를 확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실패한 사람을 대할 때 어색해진다.
괜히 말을 아끼고, 괜히 거리를 둔다.
실패가 전염되기라도 할 것처럼.
그런데 쌍문동 아이들은 달랐다.
그들은 택이의 패배를 특별 대우하지 않았다.
천재도 결국 인간이라는 사실을
농담으로 확인해 버렸다.
그 농담 속에는 이런 메시지가 숨어 있다.
성적이 너의 존재를 결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과로 연결된 사이가 아니라
시간으로 연결된 사이다.
그래서 그들은 실패를 동정하지 않는다.
그저 같이 웃는다.
같이 밥을 먹는다.
그리고 다시 하루를 시작한다.
그게 진짜 위로다.
직장에서는 조금 다르다.
동료가 실패하면
우리는 조용히 거리를 둔다.
혹시 책임이 번질까 봐.
누군가 빠르게 승진하면
축하보다 계산이 먼저 스친다.
“나는 어디쯤인가.”
회사에는 늘 평가가 있고,
순위가 있고,
보이지 않는 경쟁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실패를 숨기고
성공을 경계한다.
골목길은 사라지고
성과표만 남는다.
문제는 그 순간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누군가 잘되었을 때
배가 아픈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다.
그 사람의 자리만 볼 것인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시간을 떠올릴 것인지.
잠을 줄이고,
불안을 견디고,
포기하고,
기다렸던 시간을 떠올리는 순간
질투는 조금씩 모양이 바뀐다.
존중이 된다.
경쟁은 남겠지만
적대감은 줄어든다.
우리는 본능 위에 결단을 얹을 수 있는 존재니까.
쌍문동 아이들이 최택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건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잘 나갈 때도, 무너질 때도
우리는 결국 함께일 거라는 확신.
“넌 똥 싸도 돼. 다만 냄새는 안돼.”
그 말은 방관이 아니다.
방치도 아니다.
함께 갈 거니까
조금은 더 나아지자고 말하는 방식이다.
떠나지 않겠다는 전제가 있는 충고.
그게 관계를 지탱한다.
우리는 어떤 동료가 될 것인가
회사에서 골목길을 완전히 재현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선택은 가능하다.
동료가 실패했을 때
조용히 거리를 둘 것인가,
아니면 옆에 앉아줄 것인가.
누군가 성공했을 때
속으로만 계산할 것인가,
아니면 진심으로 손뼉 칠 것인가.
누군가의 성취를 축하하는 일은
사실 나의 품격을 결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실패 곁에 머무는 일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증명하는 일이다.
어쩌면 우리가 그리워하는 건
1988년이 아니라
결과보다 사람을 먼저 보던 시선일지도 모른다.
오늘,
누군가의 성공에 조금 더 크게 손뼉 치고
누군가의 실패 옆에 조금 더 오래 앉아보자.
그렇게 하나씩 늘어날 때
회사의 복도 어딘가에도
작은 골목길 하나쯤은 생기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