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 바퀴 뒤에서 시작된 올림픽 신기록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3000m 계주 준결승.
출발은 흔들림이 없었다.
세 번째 주자,
당시 고등학생이던 막내 이유빈이 3위에서 4위로 살짝 밀려났다.
그리고 코너.
순간 이유빈의 균형이 무너졌다.
몸이 왼쪽으로 기울고, 날이 빙판을 깊게 파고들었다.
속도를 이기지 못한 몸이 잠시 떠오르더니, 그대로 빙판 위로 엉덩이를 찧었다.
대열에서 멀어졌다.
반 바퀴 이상.
계주에서 초반 낙상은 치명적이다.
그것도 올림픽 무대라면 더더욱.
24바퀴가 남아 있었다.
많이 남은 거리였지만, 체감상으로는 이미 아득했다.
이유빈은 빙판 위에 넘어지면서 한 바퀴를 돌았고
손을 쭉 뻗었다.
뒤따르던 최민정은 주저하지 않았다.
속도를 줄이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리듬대로 들어왔다.
짧고 단단한 터치.
경기는 끊기지 않았다.
누군가 넘어졌지만
팀의 시간은 계속 흘렀다.
이 장면은 작지만 분명한 차이를 남긴다.
‘사고’가 중심이 되지 않았다는 것.
‘흐름’이 중심으로 남았다는 것.
카메라는 선두권을 비췄다.
한국팀은 한동안 화면 밖에 있었다.
그러나 격차는 조금씩 줄고 있었다.
심석희는 낮은 라인을 고수했다.
김예진은 직선에서 밀어붙였다.
최민정은 기회가 보이면 주저하지 않았다.
이유빈도 다시 리듬을 찾았다.
아무도 전략을 바꾸지 않았다.
아무도 표정을 과하게 쓰지 않았다.
위기는 있었지만
방식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반 바퀴는 눈에 보이는 간격이 되었다.
4위가 3위로,
3위가 2위로.
격차는 단숨에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지워지고 있었다.
마지막 구간,
흐름은 이미 넘어와 있었다.
결승선.
가장 먼저 결승선에 도착한 팀은 한국이었다.
기록은 4분 06초 387.
올림픽 신기록.
그 준결승을 달린 네 명—
심석희, 최민정, 김예진, 이유빈.
대표팀에는 김아랑도 있었고,
그는 결승에 출전해 다섯 명 모두 금메달을 완성했다.
그러나 나의 기억에 더 깊게 남은 것은
금빛 결승 보다
이 준결승의 24바퀴다.
이 장면이 특별한 이유는 역전 때문이 아니다.
넘어졌다는 사실보다
그 이후가 더 오래 남는다.
누군가 실수했을 때
팀이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그 조직의 본질을 드러낸다.
왜 그랬느냐고 묻는 순간,
흐름은 멈춘다.
아직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순간,
팀은 다시 달린다.
그날의 팀은
낙상을 사건으로 남겨두고
경기를 구조로 지켜냈다.
위기를 ‘끝’으로 정의하지 않고
‘남은 구간’으로 정의했다.
어쩌면 회복탄력성은
다시 일어나는 개인의 힘이 아니라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는 팀의 방식에 더 가깝다.
과잉 반응하지 않는 태도.
전략을 유지하는 일관성.
그리고 지체하지 않고 내미는 손.
그 축적이
반 바퀴를 지운다.
조직에서도
넘어짐은 피할 수 없다.
문제는
넘어짐의 크기가 아니라
그 이후의 해석이다.
실패라고 부르는 순간
시간은 닫히고,
지나가는 구간이라고 부르는 순간
시간은 다시 열린다.
그날 빙판 위에서
넘어진 것은 한 명이었지만
끝까지 달린 것은 네 명이었다.
넘어짐은 몇 초였고,
태도는 24바퀴였다.
어쩌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4분 06초 387이라는 기록이 아니라
그 기록을 가능하게 한 해석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 곁에서
누군가 미끄러졌다면,
우리는 무엇을 먼저 말할 것인가.
그리고
그 사람에게
얼마나 지체 없이 손을 내밀 수 있을 것인가.
반 바퀴는 생각보다 멀다.
그러나 24바퀴가 있다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