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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맛 떨어지는 차별, 청춘이라서 들이대 봤습니다!

1. 배움이 부족했던 청년의 첫 출근

by 자유로운영혼

1990년, 어쩌다 보니 대학 문턱을 넘었지만 7년 후 졸업장을 손에 쥔 순간에도 사회생활에 대한 자신감은 바닥을 맴돌았습니다. 기계공학이라는 전공은 여전히 낯설었고, 2.0이라는 간신히 졸업 요건만 맞춘 학점은 제 무능함을 확인시켜 주는 듯했습니다. '싫으면 싫다'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서툰 사회성은 대인관계에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고, 세상과의 소통은 늘 삐걱거렸습니다. 만성피로에 시달렸고, 위장약을 달고 살았으며, 구부정한 자세의 마른 체형은 제 불안한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했습니다.

처음 취업한 전기안전공사에서의 생활은 제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편했습니다. 내성적인 성격에 민원인을 상대해야 하는 업무는 매일매일이 고역이었고, 사회생활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발견한 철도청 채용 공고는 제게 탈출구처럼 느껴졌습니다. 다니던 회사를 뒤로하고 1998년 2월, 철도청 기능직 10급에 합격했습니다. IMF라는 불안한 시대에 안정적인 직장을 포기하는 저를 주변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망이 더 컸습니다.

그러나 발령은 쉽게 나지 않았고, 1년여의 불안한 대기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제가 기다리던 그 시기, 철도노조는 민주화의 격랑 속에 있었습니다. 1999년 직선제 쟁취 투쟁 이후, 2000년 2월 노조위원장 선거의 3중 간선제 방식이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새로운 직선제 선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즈음인 2000년 4월 7일, 저는 드디어 대전철도차량정비단 설비부에 발령받아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2. 서툰 손과 떨리는 마음의 선반 작업


현장에서 맡게 된 선반 일은 제게 또 다른 거대한 벽이었습니다. 대학 시절 4년 내내 실습 시간이 있었지만, 기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무관심으로 인해 제대로 참여하지 않았던 과거가 발목을 잡았습니다. 공고 출신 선배 동기들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멀뚱히 서 있기만 했던 시간들, 간신히 출석만 채워 F 학점만 면했던 실습 과목들이 후회로 밀려왔습니다. 입으로는 노동 해방과 노동자의 삶을 외쳤지만, 정작 현실 속 노동자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그들의 삶이 어떤 무게를 지니는지에는 무관심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습니다.

어설프게 배우는 선반작업

나보다 적은 나이지만, 일찍 입사해서 나에게 선반일을 알려준 순박한 동인 씨!


3. 우연히 맡게 된 노조 활동의 시작


제가 발령받은 시기는 철도노조에 민주화의 열기가 뜨겁게 타오르던 때였습니다. 2001년 5월, 처음으로 직선제를 통해 김재길 위원장이 선출되면서 노조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2년 2월 25일, 철도 민영화 저지를 기치로 내건 첫 총파업이 감행되었습니다. 대전 지역 조합원들은 충남대에 모여 매서운 겨울 추위 속에서도 밤샘 농성을 함께했습니다.

결국 철도 민영화는 잠정 보류되었지만, 공무원 신분이었던 노조의 파업은 불법으로 규정되었고, 노조 핵심 간부들은 파면과 해고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대창지방본부 역시 김상문 위원장이 파면되고 여러 간부들이 징계를 받았습니다. 과거 노조 간부 자리를 돈으로 매수하던 부조리한 모습은 사라지고, 파업과 징계의 후폭풍 속에서 조합 간부를 맡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입사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았던 제게까지 그 자리가 돌아온 것입니다. 2002년 8월, 저는 얼떨결에 지방본부 조사국장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4. 첫 번째 벽: 간부 식당이라는 이름의 차별


노조 간부가 되었지만, 조직 내 뿌리 깊은 차별적인 문화는 내 눈에 쉽게 눈에 거슬렸습니다. 5급 사무관 이상 10여 명 간부들만 따로 이용하는 배식대는 입사해서 회사 식당을 이용하는 처음부터 제 심기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양반 상놈'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밥을 따로 먹는다니. 현장에서는 사무실을 '양반 동네', 현장을 '상놈 동네'라며 은근히 폄하하는 분위기가 만연했지만,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근무 환경에 따른 복장 차이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밥을 따로 먹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선배들에게 물어봐도 간부들이 특별히 비싼 돈을 내고 밥을 먹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높으신 분들'은 '아랫사람들'과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을 수 없다는 권위적인 발상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능직 10급의 햇병아리 조합원이었습니다. 현장의 엄격한 서열 문화 속에서 선임의 눈 밖에 나는 것은 곧 험난한 현장 생활을 의미했습니다. 욕설과 폭언, 심지어 폭력까지 심심치 않게 벌어지던 그 시절, 인문계 출신에 현장 일머리도 없고 몸까지 약했던 저는 하루하루 버텨내는 것조차 버거웠습니다.

간부 식당은 배식구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식판을 그대로 두면 식당 아주머니들이 알아서 치워주는 시스템이었던 것입니다.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노조 간부가 된 저는 이 부조리한 관행에 맞서기로 결심했습니다. 가장 먼저, 식판을 치우지 않고 가는 간부들의 사진을 찍어 다음 날 식당 입구에 "이 많은 식판은 누가 치우나?"라는 문구와 함께 대자보를 붙였습니다. 다음 날 식당은 직원들의 술렁거림으로 가득 찼고, 오후가 되자 대자보는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굴하지 않고 매일 똑같은 내용의 대자보를 붙였습니다.


5. 변화의 첫걸음: 끈기로 이어간 작은 저항


끈질긴 대자보 시위는 결국 간부들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들은 하나둘씩 스스로 식판을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나 노정팀장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본사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다음 달부터 간부 식당을 월 정액권 구매자만 이용할 수 있는 곳으로 운영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식당 앞 게시판에는 이 내용이 공지되었습니다.

고민 끝에 저는 정액권을 구매하기로 했습니다. 민주적인 집행부가 들어선 이후 노조는 조합원들의 다양한 요구와 끊이지 않는 사건 사고들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식당 문제까지 더 끌고 가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고, 혼자서 부딪혀 해결해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정액제 식당 운영 첫날, 제가 간부들과 함께 줄을 서서 밥을 받고, 같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자 직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저는 태연하게 50대 중반의 간부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조용히 밥을 먹고 나왔습니다.


6. 낯선 식탁에서 배운 소통의 의미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시간이 흐르면서 점심시간에 현장에서 만나는 조합원들의 반응은 더욱 다채로워졌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저를 힐끗거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 신입이 왜 저기서 밥을 먹지?" 하는 수군거림이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노골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야, 너 간부 식당에서 밥 먹는 거 봤다? 불편하지 않아?",

"윗사람들이랑 같이 밥 먹으면 무슨 얘기해?",

심지어 "혹시 승진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야?"라며 짓궂게 묻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선임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어이, 젊은 친구. 너무 튀는 행동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괜히 찍히면 피곤해져."라며 충고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일부 젊은 직원들은 "속 시원하다! 나도 저런 거 보기 싫었는데."라며 은근한 지지를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대부분 조합원들은 간부 식당이 없어지면 자기 앞이나 옆에서 간부들이 같이 밥을 먹으면 불편할 것 같다고 그냥 '양반'들은 자기들끼리 먹게 내버려 두라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사무실에서 오래 근무하면서도 간부를 달지 못하고 6급으로 있는 사람들이 조용히 응원을 보내는 일도 있었습니다.

가끔은 불편한 시선도 느껴졌습니다. "저렇게 윗사람들 옆에 붙어 다니니 출세는 빠르겠네."라며 냉소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액제 구역에서 밥을 먹는 것이 꼭 부정적인 반응만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소통의 기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간부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먼저 말을 걸어오거나, 현장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오늘 작업은 어땠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생각이 다르다면서?"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젊은 직원의 생각을 궁금해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점심 식사 후 자신의 방에 들러 차 한 잔을 하고 가라며 권유하기도 했고, 저 역시 노조 생활의 어려움이나 현장의 불합리한 점들을 이야기하며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저는 노사 간의 긴장감이 감도는 상황 속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사측의 의견을 듣고 노측의 입장을 전달하는 일종의 '메신저'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서로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과 직접 소통하며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그 낯선 식탁에서 밥을 먹는 동안, 대다수의 현장 조합원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식당을 이용했고, 심지어 다른 노조 간부들조차 그곳을 찾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그 공간이 여전히 벽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 벽을 혼자서 넘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시선과 반응들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 그다음에는 '미친놈'나 '건방진 녀석'이라는 낙인,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생겨나는 공감의 시선까지… 그 모든 반응들이 제게는 꼰대 문화라는 거대한 벽에 작은 균열을 내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저는 겉으로 보이는 강함보다 끈기 있는 행동이 더 큰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느꼈던 불편함과 답답함은, 낡은 권위주의에 대한 젊은 날의 서툰 저항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7.작은 실천이 남긴 발자국


그 후 철도가 공무원에서 공사로 바뀌면서 기능직과 일반직의 구분이 사라지고 모두 같은 6급으로 시작하는 체계로 바뀌었고, 제 노력 때문은 아니지만 간부 식당, 일명 정액제 식당도 없어졌습니다. 지금은 사무실 직원도 모두 현장에서 입는 작업복 복장으로 근무하고, 간부 직원들도 같은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문득 앞에서 펼쳐졌던 저의 작고 어설픈 도전기가 삭막했던 조직 문화에 작은 에피소드로 기억되곤 합니다. 그리고 가끔, 후배들이 힘든 회사 생활에 지쳐 푸념을 늘어놓을 때면, 저는 조용히 그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며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힘들지? 나 때는 밥 먹는 것조차 투쟁이었어, 큭큭."

그러면 후배들은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위로받는 듯한 미소를 짓곤 합니다. 어쩌면, 거창한 영웅담이 아니더라도, 소소한 일상의 저항이 조그만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그들도 어렴풋이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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