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수 엘리트의 뿌리와 조병옥이라는 인물의 거대한 아이러니
90학번인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김대중은 그저 권력욕에 사로잡힌 보수 정치인일 뿐이었다. 당시 학생들에게 '1노 3김'은 민주화보다 대권을 우선시하는 조롱의 대상이었고 87년 대선 분열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후 소설 [태백산맥]을 통해 민주당의 모태인 한국민주당이 지주와 엘리트들의 기득권 정당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 실망감은 더 깊어졌다. 특히 민주당 역사의 가장 아픈 이면에는 제주 4.3 사건이 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의 경무국장으로서 강경 진압을 주도했던 조병옥의 행적을 보며 나는 한때 이승만의 경무국장 조병옥과 훗날 민주당의 대선 후보 조병옥이 동명이인인 줄로만 알았다. 공산주의 폭동으로 규정하며 무고한 양민을 희생시켰던 경찰 수장이 어떻게 민주당의 뿌리가 될 수 있는지 도저히 같은 인물이라고 믿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민주당이 4.3의 진상 규명에 앞장서는 것은 자신들의 뿌리가 저지른 과거의 과오를 현재의 가치로 씻어내려는 몸부림이며 가해자의 과거를 씻어내며 진화해 온 기묘한 역사를 품고 있다.
이런 민주당의 보수적 색채는 1963년 대선에서 절정에 달했다. 명문가 지주의 아들이었던 윤보선은 군사 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를 향해 그의 남로당 활동 경력을 문제 삼으며 '빨갱이'라고 공격하는 치열한 사상 논쟁을 주도했다. 이에 맞서 박정희는 자신을 뼛속까지 가난한 '빈농의 자식'이라 내세우며 기득권인 윤보선과 대립각을 세웠다. 역설적이게도 이 구도는 호남에서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 평소 빨갱이로 몰려 고초를 겪던 호남 민중들은 지주의 아들이 내뱉는 그 멸시의 언어에 강한 반감을 느꼈고, 오히려 빈농의 자식이라 자처하는 박정희에게 압도적인 표를 몰아주었다. 결국 박정희는 호남의 지지에 힘입어 겨우 15만 표 차이로 승리했다.
2. 1971년 대선과 김대중, 영화 [킹메이커]가 주목한 현대사의 분기점
이 보수 야당의 흐름이 요동치기 시작한 것은 1971년 대선이었다. 당시 김대중은 40대 기수론을 앞세워 당내 원로들을 제치고 후보가 되었는데 이는 엘리트 정당이었던 민주당이 대중정당 노선과 정책을 지향하는 대중 정당으로 체질을 바꾸는 민주당사의 거대한 흐름이었다. 영화 [킹메이커]에서도 묘사되듯 이 과정은 서창대라는 인물로 대변되는 엄창록의 탁월한 전략과 김대중의 신념이 결합한 치열한 사투였다. 김대중은 향토예비군 폐지, 4 대국 보장론, 대중경제론 같은 파격적인 정책을 내놓으며 박정희 정권을 위협했고 이에 당황한 집권 세력은 현대사 최초로 노골적인 지역감정을 등장시켜 정권을 유지하려 했다. 비록 낙선했지만 이 선거를 통해 김대중은 한국 정치를 이끄는 실질적인 리더로 급부상했다.
3. 광주항쟁의 비극과 정치의 중심이 된 김대중의 철학
71년 대선 이후 이어진 고난의 세월 속에서 1980년 광주항쟁은 김대중이라는 인물을 한국 정치의 명실상부한 중심으로 우뚝 세우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광주의 아픔을 온몸으로 껴안으며 그는 단순한 야당 지도자를 넘어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균형감각인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이라는 유명한 비유를 완성했다. 원칙을 지키는 서생의 맑은 정신과 그 원칙을 현실에서 구현해 내는 상인의 유연함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이루어내는 것 그것이 그가 광주의 비극을 딛고 일어서 평생을 걸쳐 보여준 정치적 예술의 정수였다. 이러한 균형감각이야말로 그를 다른 정치인들과 차별화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4. 철도노조 간부를 하면서 알게 된 정치란?
대학 졸업 후 철도에 입사하며 시작된 전국철도노동조합(철도노조) 전임자로 활동하며 나는 정치라는 것이 얼마나 처절한 현실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운전과 역무 그리고 차량과 시설 등 저마다의 노동 조건과 요구사항이 다른 3만 조합원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일은 결코 이론이나 논리대로 되지 않았다. 조합원들의 변화무쌍한 방향 전환과 쏟아지는 불만 그리고 지켜야 할 명분 사이에서 줄을 타는 것은 매 순간이 고통이었다. 조합원들의 현실적인 이익을 대변하면서도 산적한 민원들을 처리하고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 혹은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가려내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과업이었다. 3만 명이라는 작은 사회에서도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싸워나가는 것이 이토록 힘겨운데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공동체를 이끄는 정치는 얼마나 더 치열하겠는가. 철도노조의 현장은 나에게 거시적인 정치가 아닌 실존으로서의 정치를 미루어 짐작하게 한 학교였고 이를 통해 나는 과거에 단순히 보수 정치인이라 치부했던 김대중의 고뇌를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다.
5. 1997년의 승리와 해방이 정의한 변절의 의미
1997년 대선 당시 보수의 벽은 여전히 거대했다. 집권 여당이 IMF 사태를 초래하고 후보 아들의 병역 의혹이 터졌음에도 승리는 결코 쉽지 않았다. 김대중은 서생의 문제의식을 잃지 않으면서도 상인의 현실감각을 발휘하여 김종필, 박태준과 손을 잡는 DJP 연합이라는 파격적인 승부수를 던졌다. 당시 이인제 후보가 독자 출마하여 무려 500만 표를 가져가는 거대한 변수 속에서도 김대중은 단 39만 표 차이로 간신히 승리하며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우리는 흔히 국민의 힘으로 당적을 옮긴 이들을 변절자라 부른다. 하지만 이 변절이라는 낙인조차 사실은 정권교체라는 역사적 성취가 있었기에 가능한 명명이다. 이광수나 최남선처럼 독립운동을 하다가 나중에 친일로 돌아선 이들을 우리가 변절자라 부르며 비판할 수 있는 것도 결국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이 왔기 때문이다. 만약 여전히 일제강점기이거나 정권교체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과연 그들을 비난할 수 있었을까.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다. 정권교체라는 해방이 없었다면 그들은 그저 시대의 흐름을 타는 사람들로 여겨졌을 것이고 우리 사회에는 그저 세상은 흐르는 대로, 힘이 쏠리는 대세에 편승하며 살아야 한다는 좌절과 패배감만이 만연했을 것이다.
6. 노무현의 당선과 김대중이라는 위대한 유산의 재발견
2002년 노무현의 당선은 내가 직접 지지하고 경선까지 찾아다니며 응원한 후보가 대통령이 된 첫 전율이었다. 철도노조 전임자로 일하며 정치의 굴곡과 변수를 느끼던 나는 노무현 정부가 겪은 험난한 과정을 지켜보며 김대중이라는 거인이 닦아놓은 길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단순히 대통령 병에 걸린 보수 정치인이 아니라 거대한 보수의 벽을 뚫고 한국 민주주의의 질곡을 끊어낸 전략가였다. 지주 정당이라는 어두운 뿌리에서 시작된 민주당이 김대중을 거쳐 서민과 개혁의 상징으로 진화해 온 과정은 그 자체로 역동적인 드라마다.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서생의 의식과 상인의 감각으로 균형을 잡았던 그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20대의 내가 몰랐던 김대중의 진면목을 이제야 철도노조집행부 활동과 노무현점부에 감정이입하면서 마주하게 되었다.